2024.2.3.연중 제4주간 토요일 1열왕3,4-13 마르6,30-34
지도자들은 물론 사람들의 필수 덕목
-섬김과 배움, 자비와 지혜-
제가 참 좋아하는 우리말 둘이 “섬기다”와 “배우다”이고 명사형으로 하면 “섬김”과 “배움”이 되겠습니다. 비단 지도자는 물론이고 참된 삶을 지향한다면 두 기본적 삶의 요소가 섬김과 배움일 것입니다. 둘은 분리된 것이 아니라 하나로 연결되었음을 봅니다. 섬기는 것도 배워야 한다는 것이지요. 섬김뿐 아니라 기도도 사랑도 믿음도... 모두가 평생 배워야 할 것들입니다.
그래서 깨달은 겸손한 이들은 기도든 믿음이든 사랑이든 늘 초보자라고 고백합니다. 농사짓든 이들을 대해도 늘 초보자라는 말을 듣습니다. 그러니 무엇이든 배우는, 공부하는 겸손한 자세가 기본임을 깨닫습니다. 말 그대로 “배움의 여정”중에 필요한 모든 덕목을 배우는 우리들입니다. 결국 배우다 세상을 떠날 것입니다. 우리의 사부 성 베네딕도 역시 자신의 공동체를 주님을 섬기는 학원으로 정의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을 섬기는 학원을 설립해야 하겠다. 우리는 이것을 설립하는데 거칠고 힘든 것은 아무것도 제정하기를 결코 원치 않는다. 그러니 결점을 고치거나 애덕을 보존하기 위하여 공정한 이치에 맞게 다소 엄격한 점이 있더라도 즉시 놀래어 좁게 시작하기 마련인 구원의 길에서 도피하지 마라.”(머리45-48)
참 아름다운 규칙서 내용으로 수도생활의 핵심을 말하고 있습니다. 주님을 섬기는 학원인 배움터라는 것이요 여기서 평생 주님과 이웃을 섬기는 것을 배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섬김과 배움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참으로 마음의 눈만 열리면 섬김의 삶을 추구하는 자들에게는 온통 배움의 대상입니다.
학원보다는 순수한 우리말 배움터가 좋습니다. 마산 트라피스트 수도원 정문에는 “주님을 섬기는 배움터”로 쓰여 있습니다. 배움터, 쉼터, 샘터, 일터 순수한 우리말이 참 정겹습니다. 주님의 배움터, 쉼터, 샘터같은 미사시간입니다. 참으로 섬기는 지도자는 물론 사람들에게 기본적으로 배워야 할 바 두 필수적 자질이 자비와 지혜일 것입니다.
하느님 아버지의 자질인 자비와 지혜를 고스란히 이어받은 오늘 복음의 예수님입니다. 예수님뿐 아니라 불자들도 부처님의 자비와 지혜를 말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보면 예수님의 자비와 지혜가 분리된 것이 아니라 한 실재의 양면임을 봅니다. 참으로 자비로운 연민의 사람이라면 저절로 지혜로운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자비심에서 샘솟는 지혜이기 때문입니다.
사도들이 예수님께 모여와 자기들이 한 일과 가르친 것을 다 보고했을 때 예수님의 분별의 지혜가 빛을 발합니다. 사도들의 피곤한 처지를 한눈에 직시한 배려와 공감의 자비하신 주님은 지혜롭게도 이들에게 관상적 휴식을 명하십니다.
“너희는 따로 외딴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
일터에서 외딴곳의 쉼터로 옮기라는 것입니다. 관상과 활동의 균형과 조화는 건강한 영적 삶을 위한 리듬입니다. 참으로 참된 영적 삶을 위해 구체적으로 외딴곳의 장소와 시간 마련은 필수입니다. 이어 전개되는 내용이 또 흥미롭습니다. 외딴곳에 도착하니 이미 영육으로 굶주린 이들이 장사진을 치고 있는 것입니다. 착한목자 주님은 유연하게 현실의 필요에 임하시니 새삼 사랑은 분별의 잣대임을 깨닫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배에서 내리시어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없는 양들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기 시작하셨다.’
그림같은 장면이 눈에 선합니다. 군중들의 절박한 요구에 응답해 휴식을 포기하고 이들의 구원활동에 전념하는 자비로우시고 지혜로우신 주님입니다. 가엾이 여기는, 측은히 여기는, 불쌍히 여기는 연민의 마음, 자비심은 그대로 하느님의 마음,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흡사 오늘 복음의 구조가 미사전례를 상징하는 듯 합니다. 말씀의 전례후에 이어질 오늘 복음에 오천명을 먹이신 기적은 그대로 성찬전례를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새삼 하느님의 자비와 지혜의 결정체같은 최고의 선물이 성체성사 미사임을 깨닫습니다. 참으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를 주님을 닮은 섬김과 배움의 겸손한 사람들로, 또 자비와 지혜의 사람들로 만들어 줍니다.
오늘 열왕기 상권에서 지금까지 맹활약했던 다윗 임금은 역사무대에서 퇴장하고 그 후계자로 솔로몬이 등장합니다. 하느님께서 다윗에 대해 베풀었던 애정이 그대로 솔로몬에게 계속되니 이것은 순전히 부왕 다윗 덕분입니다. 주님의 솔로몬을 향한 물음은 그대로 우리를 향한 물음처럼 들립니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과연 무엇이라 대답하겠습니까? 솔로몬의 대답은 통쾌할 정도로 정확했고 지혜로웠습니다.
“당신 종에게 듣는 마음을 주시어, 당신 백성을 통치하고 선과 악을 분별할 수 있게 해주십시오.”
경청과 분별의 지혜를 청하는 것이 주님 보시기에 좋았고, 이어 주님은 엄청난 축복을 약속하십니다. 자신을 위해 장수를, 부를, 원수들의 목숨을 청하지도 않고 분별력을 청한 솔로몬에게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주님의 솔로몬에 대한 편애가 지나칠 정도입니다.
“나, 내가 네 말대로 해 주겠다. 이제 너에게 지혜롭고 분별하는 마음을 준다...나는 네가 청하지도 않은 것, 부와 명예도 너에게 준다. 네 일생 동안 임금들 가운데 너같은 사람이 없을 것이다.”
솔로몬이 참으로 지혜로웠다면 부와 명예는 단연코 사양했을 것입니다. 부와 명예의 유혹에서 벗어날 사람은 거의 없기 때문이며 이들은 사람들을 타락과 부패로 이끌기 때문입니다. 앞으로 전개되는 솔로몬의 삶에서 보다시피 그의 타락과 부패로 인해 다윗이 이루어 전해준 성취는 서서히 무너지고 물거품이 되고 맙니다. “세우기”는 평생이지만 “무너지기”는 순간입니다.
만약 제가 솔로몬이었다면 하나가 아닌 넷만 청했을 것입니다. 주님의 한결같은 “섬김과 배움”의 겸손한 자세, 주님의 한결같은 “자비와 지혜”의 자질만 청했을 것입니다. 섬김과 배움, 자비와 지혜, 이 넷이야 말로 지도자들은 물론 참사람이 되기 위한 우리 모두의 기본적, 필수적 덕목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날로 주님을 닮아 섬김과 배움, 자비와 지혜의 사람들로 변모시켜 주십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