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2.9.연중 제5주간 금요일 1열왕11,29-32;12,19 마르7,31-37
들어라!
-“에파타(열려라)!”-
"주님, 당신 구원, 그 기쁨을 도로 주시고,
정성된 마음을 도로 굳혀 주소서."(시편51,14)
아침성무일도시 마음에 와닿은 시편입니다. 또 본기도 앞부분, "말씀의 빛으로 무지의 어둠을 없애시는 하느님"이란 말마디가 마음을 상쾌하게 합니다. 어제 저녁미사때 강론 원고에 없던 내용의 인용이 새로웠고 잊지 못합니다. 아주 예전 30년전쯤 어느 자매로부터 무심코 들었던 말인데 지금도 생생한 다음 탄식성 말마디입니다. 아마도 자녀로부터 많은 상처와 실망을 받은 분이었을 것입니다.
“음식이 맛이 가면 버리기라도 하는데 자식은 맛이가면 버릴수도 없고...”
하느님의 솔로몬에 대한 탄식도 이와 흡사하리란 생각이 듭니다. ‘맛이갔다!’ 음식뿐 아니라 사람도 변질되면 맛이 갈 수 있습니다. 정말 맛있는 음식도 맛이가면 버리는데 사람은 버릴 수 없으니 참 문제입니다. 밭농사는 일년인데 사람농사는 평생이요, 사람은 고쳐 쓸 수 없다고도 말합니다.
그러니 어렸을때부터의 사람 교육이, 훈육이 얼마나 결정적으로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어렸을 때만이 아니라 평생 배움의 여정에 충실하는 평생 공부가 또 얼마나 중요한지, 참으로 마음의 귀를 기울여 듣는 경청의 회개가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또 교육을 보면 미래가 보인다는데 오늘날의 학교 교육을 보면 미래가 심히 우려됩니다.
정말 말그대로 죽음에 임박했던 노년의 솔로몬은 완전히 맛이 갔으니 죄의 결과는 이처럼 무서운 것입니다. 새삼 회개하는 마음으로 마음의 귀를 기울여 들으며 하루를 시작하는 매일미사은총이 사람의 맛이 가지 않게 하는데 얼마나 큰 기여를 하는지 감사하게 됩니다.
말그대로 회개 은총의 효소가 부패인생을 발효인생으로 만들어 줍니다. 다윗의 발효인생과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그의 아들 솔로몬의 부패인생입니다. 어제 저녁식사때 식당독서중 2월8일자 성규의 말씀이 귀에 쏙 들어왔습니다. 요즘 식당독서중 규칙서는 가장 긴장에 속하는 “제7장 겸손에 대하여”중 어제는 열한째 단계에 속하는 말씀입니다.
“겸손의 열한째 단계는, 수도승이 말할 때 온화하고 웃음이 없으며 겸손하고 정중하며 간결한 말과 이치에 맞는 말을 하고, 목소리에 있어서는 큰소리를 지르지 않는 것이다. 책에서는 ‘지혜로운 사람은 적은 말로써 드러난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1500여년전 규칙서인데 시공을 초월하여 오늘날도 그대로 공감되니 참 놀랍고, 역시 고전중의 고전인 베네딕도 규칙서임을 깨닫습니다. 이런 겸손의 덕을 지닌 사람은 참으로 잘 듣는 사람일 것입니다. 문득 ‘온화(溫和)하고’, 즉 ‘따뜻하고 부드럽고’라는 한자 뜻을 대하니 얼마전 성지순례 내용을 담은 수필집을 낸 분의 이름, ‘온화(溫花)’가 생각납니다. ‘따뜻한 꽃’이란 꽃’화(花)’자로 원래 한문에는 없는 단어일 것입니다. 참으로 잘 듣는 경청이 얼마나 중요한지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할 것입니다. 베네딕도 규칙 맨 첫마디도 “들어라!”로 시작됩니다.
“들어라! 오 아들아, 네 마음의 귀를 기울여 스승의 계명을 경청하고 어진 아버지의 권고를 기꺼이 받아들여 그것을 실행하여라.”(머리1절)
지난 2월3일자 제1독서 열왕기 상권에서 지혜를 청하던 솔로몬의 “당신 종에게 듣는 마음을 주시어 당신 백성을 통치하고 선과 악을 분별할 수 있게 해주십시오(열왕상3,9)” 말도 생각납니다. 듣는 마음, 듣는 귀를 지녔던 솔로몬이 완전히 변질되어 맛이 가, 마음의 귀가 닫힌 완고한 사람이 되었으니 바로 마음이 하느님을 떠난 죄의 결과입니다. 죄의 결과 다윗 때는 하나였던 이스라엘은 솔로몬 사후 산산히 분열된 나라가 되었으니 바로 오늘 제1독서의 내용입니다. 이런 상황을 고려한 화답송 시편81장의 선정이 참 적절하고 후렴도 잘 어울립니다.
“나는 주님, 너의 하느님이니 너는 내 말을 들어라.”
여기서도 강조되는 말마디가 ‘들어라’입니다. 평생 배움의 여정중에 잘 들으며 공부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공부를 강조한 다산 정약용의 어록중 오늘 2월9일자 말씀이 이채로웠습니다.
“그 어떤 공부도 예술이 함께하면 즐겁다. 지식이 놓친 마음을 예술은 따뜻하게 데워준다. 가르침의 목적과 의도를 제대로 알지 못하면 학문을 즐기지 못한다. 그러나 아직 학문을 즐기지 못한 이들에게는 노래와 춤부터 가르쳐야 한다.”
그리하여 옛 선비들은 모이면 시(詩)를 짓고 거문고를 타며 노래와 춤을 가무(歌舞)를 즐겼던가 봅니다. 이런 경지의 전인적 공부라면 정말 멋질 것이며, 새삼 끊임없이 시편을 노래하는 우리의 성무일도가 전인적 공부에 얼마나 큰 기여를 하는지 깨닫게 됩니다. 세상에 이렇게 매일 시편을 노래하는 사람들이, 또 성가를 노래하는 미사와 같은 전례가 어느 종교에 있겠는지요.
오늘 귀먹고 말 더듬는 이를 고치시는 복음도 참 은혜롭습니다. 육신의 귀가 아무리 밝고 좋아도 죄로 인해 마음이 편견이나 선입견으로 굳어져 있으면 즉 마음의 귀가 닫혀 있으면 있는 그대로 듣지 못합니다. 마음의 귀가 열려 있어야 제대로 듣습니다. 입이 열려 있다고 말 잘하는 것이 아니라 침묵중 마음의 귀로 잘 듣는 이가 진짜 생명을 주는 유우머나 청담, 덕담의 참말을 합니다.
이런 면에서 오늘 복음의 귀먹고 말더듬는 이가 상징하는바 바로 우리들입니다. 죄로 인해 마음의 귀가 먹고 제대로 참말을 못하는 우리들입니다. 다음 예수님의 정성을 다해 귀먹고 말더듬는 이를 치유하는 과정이 그대로 우리를 향한 미사은총처럼 생각됩니다. 예수님은 당신 손가락을 그의 두 귀에 넣으셨다가 침을 발라 그의 혀에 손을 대신후 하늘을 우러러 한 숨을 내쉬신 다음 그에게 말씀하십니다.
“에파타! 열려라!”
그러자 곧바로 그의 귀가 열리고 묶인 혀가 풀려 말을 제대로 하게 되니 얼마나 통쾌한지, 바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을 상징합니다. 죄로 인해 마음의 귀가 먹은 이들은 회개와 더불어 듣게 하시고 말못하는 이들은 제대로 말하게 하시는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의 기적을 목격하고 마침내 복음 선포자가 된 군중들의 고백은 그대로 이 거룩한 미사에 참석한 우리의 고백이 됩니다.
“주님이 하신 일은 모두 훌륭하다. 귀먹은 이들은 듣게 하시고 말못하는 이들은 말하게 하시는구나!”
제가 참 좋아하는 예수님의 아람어 둘입니다. 하나는 “탈리타 꿈(소녀야 일어나라!)”이고 하나는 오늘의 “에파타!(열려라!)”입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탈리타 꿈!” 일어나, 주님과 함께 “에파타!” 활짝 열린, 축제인생을 살게 하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고해인생이 아닌 축제인생을 살게 하십니다.
"주님 좋으시다, 영원하신 그 사랑,
당신의 진실하심, 세세에 미치리라."(시편100,5).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