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좋은 삶 -참으로 잘 살았을 때, 잘 떠난다-2024.2.27.사순 제2주간 화요일

by 프란치스코 posted Feb 27,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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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2.27.사순 제2주간 화요일                                                        이사1,10.16-20 마태23,1-12

 

참 좋은 삶

-참으로 잘 살았을 때, 잘 떠난다-

 

“죽음의 잠에 빠지지 않게 제 눈을 비추소서.

 제 원수가 ‘내가 이겼다,’하지 못하게 하소서.”(시편13,4-5)

 

국내 사정이 4월10일을 총선을 앞두고 여야가 공천으로 참 시끄럽고 혼란스럽습니다. 공천 결과에 따른 반응에서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환히 드러납니다. 국민들에게는 반면교사가 됩니다. 참 아름답게 잘 떠나는 분들이 많지 않습니다. 온갖 추태를 부림으로 배은망덕(背恩忘德)과 더불어 그동안 내적 삶이 어떠했는지 환히 드러납니다. 가장 고약한 것이 배은(背恩), 배신(背信), 배반(背叛)입니다. 문득 오늘 다산의 어록과 중국의 사마천이 쓴 사기에 나오는 예화도 좋아 나눕니다.

 

“나무가 열매로 사람을 모으듯 어른은 성품으로 사람을 따르게 한다.”-다산

“복숭아와 오얏나무는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나무밑에 저절로 길이 생긴다”-사기

 

사람이 진실, 고결(高潔)하고 겸손하면 저절로 사람이 따른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잘 살았을 때, 잘 떠납니다. 삶과 죽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잘 떠날 때 일치와 평화의 선물을 남기지만, 그렇지 못할 때는 분열과 불화를 남깁니다. 늘 떠남을 준비하며 살아갈 때 하루하루 충실할 수 있을 것이며 떠날 때도 아름답게 향기처럼 떠날 수 있을 것이며 참으로 진실을 추구하는 누구나의 소망일 것입니다. 19년전, 2005년 참으로 수도원이 어려운 일을 겪던 해 써놨던 “떠날 때는 이렇게” 라는 시(詩)를 주일에 이어 최초로 공개합니다.

 

“떠날 때는 이렇게

자연이 또 참 좋은 스승이다

잘 떠남이 

아름다움의 극치다

얼마나

힘들고도 중요한 잘 떠남이냐

향기로 남는 떠남도 있고

악취를 풍기며 상처나 짐을 남기는 떠남도 있다

떠나기가 마냥 서운해

봄에다

흰 눈 가득 순결한 사랑 안겨 주고

말없이 떠나는 겨울

얼마나 아름다운 떠남이냐!”-2005.2.

 

얼마전 입춘(立春)과 우수(雨水)를 지나 내린 봄눈 내린 나무마다 설화(雪花)들 가득한 날에도 잘 어울리는 시입니다. 마침 주일 강론후 강론중 “봄이 되었다!”라는 시(詩)중에 나오는 “봄의 맑음”이라는 말마디가 자기 이름과 같다고 반색하던 ‘춘숙(春淑;봄춘, 맑을 숙) 도미니카’ 자매가 생각납니다. 이 말마디를 놓치지 않고 들은 경청의 모습에 감동했습니다.

 

어떻게 잘 떠날 수 있을까요? 마지막 떠남인 죽음 역시 언젠가의 갑작스런 선종은 없습니다. 하루하루 잘 살다 잘 떠날 때, 잘 떠나는 선종의 죽음임을 깨닫습니다. 바로 오늘 사순1주간 화요일 마태복음과 제1독서 이사야서가 잘 떠남을 위한 답을 줍니다. 지도자들을 대상으로 한 가르침인데 시공을 초월하여 오늘날의 교회지도자들은 물론이고 교회밖 각계 각층의 지도자들 그리고 모든 사람들에게 귀한 깨우침을 주는 가르침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의 지탄을 받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우리의 참 좋은 반면교사가 됩니다. 전반부는 이들의 언행이 불일치 함을 지적하며 이들의 허영을 단연히 배격하라 하십니다. 그들이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되 그들의 행실을 따라하지 말며, 남에게 보이고 싶어하는, 드러내기 좋아하는 허영을 말끔히 일소하고 진실하라는 충고입니다. 진실이 힘입니다. 이어지는 말씀은 생략이 불가하여 그대로 인용합니다.

 

“너희는 스승이라고 불리지 않도록 하여라. 너희의 스승님은 한 분뿐이시고 너희는 모두 형제다. 이 세상 누구도 아버지라고 부르지 마라. 너희의 아버지는 오직 한 분, 하늘에 계신 그분뿐이시다. 너희는 선생이라고 불리지 않도록 하여라. 너희의 선생님은 그리스도 한분 뿐이시다.”

 

“너희는 모두 형제다”라는 말마디가 큰 울림을 줍니다. 이런 자각에 투철한 이들이 정말 겸손한 이들입니다. 만민평등이요 일체의 우상을 배격하라는 것입니다. 스승님이자 선생님은 그리스도 예수님 한 분 뿐이시고, 아버지는 하늘에 계신 하느님뿐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하느님 중심의 겸손한 삶에 저절로 따라오는 내적자유와 내적평화임을 깨닫습니다. 

 

성 아우구스티노의 “아버지는 하느님이고, 어머니는 교회이고, 모두는 형제다” 라는 말씀에 새삼 공감하게 됩니다. 그러니 아버지의 효성스런 “자녀답게”, 형제들간에는 우애좋은 “형제답게” 살아갈 때 참 아름답고 품위있고 격조있는 삶이겠습니다. 이런 하느님 중심의 삶에서 상호존중과 상호섬김의 겸손한 자세가 나오고 이런 이들이 주님의 참제자라 할 수 있겠습니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거듭 강조되는 섬김과 겸손입니다. '주님을 섬기는 배움터'라 명명되는 우리 수도공동체이고 우리에게 직분이 있다면 ‘섬김의 직분’, 권위가 있다면 ‘섬김의 권위’, 우리의 여정이 있다면 ‘섬김의 여정’, 영성이 있다면 ‘섬김의 영성’ 하나뿐일 것입니다. 역시 섬김의 여정에서 여전히 초보자임에 부끄러움을 느낍니다.

 

오늘 제1독서 이사야서는 거짓경신례와 참된경신례가 뚜렷이 대조됩니다. 지도자들을 대상으로 하지만 우리들에게도 귀한 가르침이 됩니다. “주님의 말씀을 들어라”, “하느님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여라” 경청의 강조에 이어지는 거짓경신례를 얼마나 혐오하는 하느님인지 실감있게 표현되는 다음 내용은 오늘 독서에는 생략되어 있습니다.

 

“무엇하러 나에게 이 많은 제물을 바치느냐? 나 이제 숫양의 번제물과 살진 짐승의 굳기름에는 물렸다. 더 이상 헛된 제물을 가져오지 마라. 분향 향기도 역겹다. 그것들은 나에게 짐이 되어 짊어지기에도 지쳤다. 너희가 팔을 벌려 기도할지라도 나는 눈을 가려버리라. 아무리 기도를 많이 해도 들어주지 않으리라.”

 

사랑과 정의를 실천하는 이라면 빈손으로 와도 주님은 반기실 것입니다. 경신례의, 전례의 거부가 아니라 선행과 사랑, 정의가 통째로 사라진 헛된 경신례의 거부요, 이어 주님은 참된 경신례를 위해 필히 실천해야할 지침을 주십니다. 사랑은 명사가 아니라 동사입니다. 다음 다섯 가지 명령은 모두가 실천을 명하는 “하라”는 동사들입니다.

 

“1.너희 자신을 씻어 깨끗이 하여라.

2.너희 악한 행실들을 치워버려라.

3.악행을 멈추고 선행을 배워라.

4.공정을 추구하고 억압받는 이를 보살펴라.

5.고아의 권리를 되찾아 주고, 과부를 두둔해 주어라.”

 

사순시기는 회개의 시기입니다. 결국 오늘 말씀도 “내 중심”에서 “하느님 중심”에로의 방향전환의 회개를 촉구하는 말씀이요, 회개는 실천의 열매로 드러내라는 것입니다. 회개의 진정성을 보장하는 회개의 참 좋은 열매들이 경청, 진실, 겸손, 섬김, 선행, 사랑과 정의, 공정의 실천입니다. 이렇게 회개의 여정에 충실하여 잘 살 때, 비로소 잘 떠날 수 있습니다. 주님의 매일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끊임없는 회개와 더불어 하느님 중심의 참된 삶을 살도록 이끌어 주십니다. 

 

“옳은 길을 걷는 이는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시편50,23).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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