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유일한 희망이신 예수님 “늘 예수님편에 서자”2024.3.7.사순 제3주간 목요일

by 프란치스코 posted Mar 07,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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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3.7.사순 제3주간 목요일                                                         예레7,23-28 루카11,14-23

 

 

우리의 유일한 희망이신 예수님

“늘 예수님편에 서자”

 

 

“주님의 목소리를 오늘 듣게 되거든 

 너희 마음을 무디게 가지지 마라.”(시편95,7ㄹ과 8ㄴ)

 

바로 오늘 화답송 후렴이자 사순시기 내내 계속되는 새벽 성무일도시 초대송 후렴입니다. 사순시기 낮기도 독서시 계응송 역시 늘 동일합니다.

 

“주여, 내 마음을 깨끗이 만드시고,

 내 안에 굳센 정신을 주소서.”(시편51,12)

 

어제 삼종기도후 교황님의 짧은 강론도 멋졌습니다. “겸손으로 교만과 싸우자(Combat pride with humilty)”는 일곱 번째 강론으로 이제 다음번 허영 하나만 남았습니다. 겸손한 마음 역시 어진 마음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말마디중 ‘배우다’, ‘섬기다’에 이어 ‘어질다’입니다. 공자의 인(仁)이 바로 어질 인(仁)자입니다. 마음이 어질다는 마음이 “좋다, 착하다, 순하다, 슬기롭다, 너그럽다, 관대하다, 유연하다, 현명하다”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모든 좋은 덕목을 다 담고 있는 “어질다”라는 우리 말이 참 좋습니다. 오늘의 다산 어록도, 논어에 나오는 말씀도 어진 사람에 대한 언급같습니다.

 

“타인의 결을 받아들이는 능력을 감수성이라고 한다. 감수성은 지식이 아니기에 남에게 귀 기울이는 태도로 나타난다.”-다산

새삼 남에게 귀 기울이는 경청의 자세가 얼마나 본질적으로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바로 이런 들음의 수용적 사람들이 어진 사람들입니다.

 

“사람이 어질지 못하다면 예를 지켜서 무슨 소용인가? 사람이 어질지 못하다면 음악을 한들 무슨 소용인가?”-논어

공자가 강조한 것 역시 호학(好學)과 더불어 인(仁)입니다. 결국 공부의 목적도 어진 사람이 되는데 있음을 봅니다. 

 

얼마전 주고 받은 결코 잊지 못할 고마운 마음 가득 들었던 어느 분과의 아름다운 대화 내용과 제 자작시를 소개합니다. 지금 남도(南道) 섬진강 부근에는 매화꽃이 한창이랍니다.

 

-“섬진강 매화마을입니다.”

“섬진강의 시인 김용택이 생각납니다. 봄철이 유난히 아름다운 섬진강의 그 자체가 시이지요!”

사실 금수강산(錦繡江山)이란 말도 있듯이 봄철의 한반도는 어디나 아름다운 시적(詩的) 풍경입니다.

“내년 봄에는 신부님 모시고 매화 가득한 아름다운 섬진강에 봄여행하고 싶습니다. 봄의 섬진강은 항상 평화롭고 아름답습니다.”-

 

주고받은 대화에 즉시 떠오른 “산(山)과 강(江)”이라는 자작시에 만족했고 위로 받았습니다. 이 또한 어진 마음의 표현이겠고 참으로 정주 영성의 절정이 아니겠나하는 자긍심(自矜心)도 들었습니다.

 

“아니 

 산이 산에 갈 수가 있나?

 강이 강에 갈 수가 있나?

 나 머물 때는 산(山)이요 움직일 때는 강(江)인데

 나 언제나 거기 그 자리에 한결같이 임기다리는 산인데

 나 언제나 거기 그 자리에 끊임없이 임향해 흐르는 강인데

 늘 임을 만나 임과 함께하는 영원한 삶인데

 어찌 산이 산에 강이 강에 갈 수가 있나?”

 

베네딕도 16세 전임 교황님이 자주 사용했고,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부러워했던 말마디 “Enough!(충분하다!)”를 저 또한 좋아합니다. 매사 지족(知足)의 삶을 사는 넉넉하고 자유롭고 행복한 ‘Enough(이너프)의 사람들’을 감히 누가 유혹할 수 있을런지요! 

 

밖으로는 “정주의 산”처럼, 안으로는 맑게 흐르는 “생명의 강”처럼, 산과 강의 정주영성을 살아가는 참으로 깊고 어진 사람들이 이상적 베네딕도회 수도자들입니다. 오늘 제1독서 예레미야서와 루카복음 말씀을 읽으며 묵상하다 보니 떠오른 예화와 시입니다. 

 

오늘 말씀을 묵상하며 흡사 무지의 악에, 사탄에 사로잡힌 사람들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사실 삶의 중심인, 참으로 어지신 예수님에게서 멀어질 때 누구나의 가능성이 무지의 악마입니다. 베드로의 예에서 보다시피 사탄이, 악마가 따로 있는게 아니라 주님을 떠날 때 우리 모두의 가능성입니다. 이런 이들은 바로 자기를 모르는 무지한 이들입니다. 다음 실감나는 예레미야서의 묘사가 그대로 우리 인간의 부정적 단면을 보여줍니다.

 

“그들은 순종하지도 귀를 기울이지도 않고, 제멋대로 사악한 마음을 따라 고집스럽게 걸었다. 그들은 앞이 아니라 뒤를 향하였다...그들은 나에게 순종하거나 귀를 기울이지 않고, 오히려 목을 뻣뻣이 세우고 자기네 조상들보다 더 고약하게 굴었다...그들의 입술에서 진실이 사라지고 끊겼다.”

 

하느님의 인간에 대한 깊은 좌절감의 표현입니다. 예나 이제나 우리는 변함없이 후안무치, 적반하장, 내로남불 등 부정적 모습들을 얼마나 많이 목격하는지요. 사람이라하지만 하늘을 우러러 부끄러움도 두려움도 없는 이런 이들이 악마요 사탄입니다. 악에 사로잡힌, 악에 포획된 이들입니다. 바로 이런 이들에 대한 주님의 간절한 회개에의 촉구입니다. 사순시기 우리에게 주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내 말을 들어라. 나는 너희 하느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될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길만 온전히 걸어라. 그러면 너희가 잘될 것이다.”

 

제1독서 예레미야서의 구제불능의 마음이 딱딱하고 목이 뻣뻣한 무지한 이들은 오늘 복음에서도 계속됩니다. 살아있는 생명의 특징은 따뜻함과 부드러움이요 죽어있는 죽음의 특징은 차거움과 딱딱함입니다. 흙도 마음처럼 살아있는 흙은 따뜻하고 부드럽습니다. 살아있다 하나 죽어있는 차갑고 딱딱하게 굳은 마음들은 얼마나 많은지요.

 

바로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 ‘마귀 우두머리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마귀를 쫓아낸다 곡해하는, 또 하늘에서 내려오는 표징을 보여달라’는 이들이 바로 마음이 완고하고 목이 뻣뻣한 이들입니다. 예수님은 영리한 마귀들이 결코 분열되는 일은 없으니 사탄의 힘을 빌려 사탄을 쫓아내는 일은 어불성설임을 천명하시며 당신의 구마행위는 전적으로 하느님의 능력에 기인함을 밝힙니다.

 

“그러나 내가 하느님의 손가락으로 마귀들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와 있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어 악마를 포박할 수 있는 가장 힘센자로 당신을 묘사합니다. 이미 이사야 예언서(이사49.24-25)에서 예고되고 있는 현실입니다. 벙어리 마귀를 쫓아내신 주님만이 우리를 사탄의 손아귀에서 구출할 수 있음을 말씀하십니다. 우리 안에 잠재해 있는 어둠의 세력을 축출할 수 있는 분은, 우리의 희망이자 구원자이신 예수님뿐이라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도 기억하실 것입니다. 

 

“나는 과연 비참한 인간입니다. 누가 죽음에 빠진 몸에서 나를 구해줄 수 있습니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를 구해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로마7,24-25)

 

우리의 희망이자 구원자이신 예수님은 또 우리 모두의 구원을 위해 늘 당신 편에 설 것을 간절히 바라십니다.

 

“내 편에 서지 않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고, 나와 함께 모아들이지 않는 자는 흩어버리는 자다.”

 

과연 우리는 어느 편에 서 있습니까? 구원 역시 선택의 은총임을 깨닫습니다. 단호히, 결연히 늘 사탄이 아닌 주님을 선택하여, 흩어버리는 분열의 삶이 아닌 모아들이는 일치의 삶을 살 때, 또 온마음으로 주님을 사랑하고 섬기며 따르는 삶을 살 때, 참으로 온전한 참나의 자유인의 삶일 것입니다. 진리이신 예수님만이 우리를 자유롭게 합니다. 이 거룩한 미사중 주님을 삶의 중심에 모시며 바치는 사랑의 고백입니다.

 

“예수님, 당신은 저의 전부이옵니다.

 저의 사랑, 저의 생명, 저의 희망, 저의 기쁨, 저의 행복이옵니다.

 하루하루가 감사와 감동이요 감탄이옵니다.

 날마다 당신과 함께 새롭게 시작하는 아름다운 하루이옵니다.”-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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