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3.20.사순 제5주간 수요일 다니3,14-20.91-92.95 요한8,31-42
진리가 너희를 참으로 자유롭게 하리라
-자유의 여정, 예닮의 여정-
"주님은 내 등불을 밝혀주시고,
당신은 내 어둠을 비추시나이다."(시편19,29)
“내가 하는 일이 옳은 것이라면,
설사 세상이 나를 돕지 않아도 하늘이 나를 돕는다.”
오늘 3월20일 다산 어른의 말씀도 좋습니다. 자유란 말만 들어도 가슴이 설레고 눈물이 난다는 어느 시인의 말도 생각이 납니다. 무책임한 자유가 아니라 반드시 책임이 따르는 자유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자유를 추구합니다. 자유로와 인간이고 자유로와 행복입니다. 자유가 있을 때 인격이지 자유가 없으면 인격도 없습니다. 과연 참으로 자유롭습니까? 자유롭다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요? 자유도 능력임을 깨닫습니다. 자유를 누리는 능력도 사람마다 천지차이일 것입니다. 어떻게 참으로 자유로운 삶을 살 수 있을까요?
사람은 자유입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자유에로 부르셨습니다.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된 인간의 복된 존재임을 알림이 자유입니다. 하느님이 우리에게 참으로 바라시는 바, 자유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인 조르바>의 작가인 그리스의 니코스 카찬차키스의 묘비명도 특이합니다.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
평생 자유를 추구했지만 자유롭지 못한 작가였습니다. 우리 수도생활을 하느님을 찾는 여정이라 하고 날로 자유로워지는, 자유의 여정이라고도 합니다. 과연 살아갈수록 자유로워지는 삶인지요? 자유를 추구하지만 세상것들에 중독되어 세상의 노예되어, 종되어 살아가는 이들도 점차 늘어나는 추세입니다. 광야인생 ‘제대로 미치면 성인이지만 잘못 미치면 폐인이 된다’라는 말마디는 저의 지론입니다.
광야인생 셋 중 하나 즉, 성인이 아니면 폐인, 또 괴물이 될 수 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세상 것들에 중독된 자들 얼마나 많은지요! 잘못된 자유의 헛된 추구가 세상 것들에 중독되어 폐인으로 괴물로 만들기도 합니다. 어제 저는 얼마전 영국의 유명한 베네딕도회 출신의 바실리오 흄 추기경(1923-1999)에 대한 글을 흥미있게 읽었습니다. 어느 유다인 랍비의 흄 추기경에 대한 소개글입니다.
‘내가 흄 추기경을 생각할 때 나는 유다이즘의 초기 성인들의 말을 떠올린다. 그들은 묻는다: “누가 영웅인가?” 그들은 대답한다: “낯선이들을 친구들로 만드는 이다(One who turns strangers into friends).” 그것이 바로 흄 추기경의 위대한 은총이었다. 그는 그의 하느님의 사랑과 그의 인간에 대한 깊은 감정으로 사람들을 그에게로 끌어들였다. 너희는 흄 추기경 그분과 함께 있는 동안, 너희들은 한없이 넓어짐을 느낄 것이다. 그는 하나의 친구다. 우리가 그분을 만나는 것은 행운이다. 그는 삶안에서, 죽음의 면전에서 지극히 고요하고 평온했다. 흄 추기경은 참으로 낯선이들을 친구들로 만든 하느님의 사람이었다.”
만나는 낯선이들을 누구나 친구들로 만들었던 흄 추기경이야말로 참으로 매력적인 참 자유인입니다. 대하는 이들을 누구나 무장해제시켜 본연의 편안하고 자유로운 참 사람으로 만드는 사람이 바로 참 자유인임을 깨닫습니다. 이런 자유 역시 은총의 선물임을 깨닫습니다. 이런 자유 또한 선택이자 훈련이요 습관임을 깨닫습니다. 자유 역시 부단히 배우고 익혀야 함을 깨닫습니다.
사람이라 다 똑같은 사람이 아니라 자유를 누리는 능력도 사람마다 참 다양합니다. 바로 오늘 복음이 참 자유의 비결을 가르쳐줍니다. 참 자유의 비결은 이 하나뿐이라 감히 말할 수 있습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주님 친히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진리입니다.
“너희가 내 말 안에 머무르면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된다. 그러면 너희가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이다. 그러면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서울대 교표인 "진리는 나의 빛(VERITAS LUX MEA)"이란 말마디도, 하버드 대학교의 로고중 "진리(VERI TAS)" 란 말마디도 여기서 유래합니다. 저절로 자유가 아니라 주님 안에 머물러 주님의 제자로 사는 선택이 우선입니다. 바로 이때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이고 이 진리가 참으로 우리를 자유롭게 합니다. 무지에 대한 답도 진리의 자유 하나뿐임을 깨닫습니다. 혼자 격리된 자유가 아니라 더불어 주님안에 머물러 제자들로 살 때 비로소 진리이신 주님을 깨달아 자유로워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주님을 떠나서는, 더불어의 공동체를 떠나서는, 참 자유는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자유의 여정은 우리 각자 날로 진리이신 주님을 깨달아 알아 닮아가는 예닮의 여정임을 깨닫습니다. 진리와 자유는 불간분의 관계에 있음을 봅니다. 진리없는 자유는 애당초 가능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과 빌라도의 대화도 생각납니다.
“나는 진리를 증언하려고 세상에 왔다. 진리에 속한 사람은 누구나 내 목소리를 듣는다.”
빌라도가 예수님께 물었다.
“진리가 무엇이오?"
진리이신 예수님을 앞에 두고 진리가 무엇이라 물으니 이런 무지에 대한 답은 침묵뿐이었을 것입니다. 진리와 자유는 함께 갑니다. “진리의 연인”이라 칭하는 성 아우구스티누스, “진리의 협조자”라 불리길 원했던 베네딕도 16세 전임 교황, 역시 참 자유인이었습니다. “진리에 몸바치는 것이 소원”이라 했던 불가의 고 성철 대선사 역시 익명의 크리스천이자 대 자유인임을 깨닫습니다. 이어지는 주님의 말씀이 참 자유를 분명히 깨닫게 합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죄를 짓는 자는 누구나 죄의 종이다. 종은 언제까지나 집에 머무르지 못하지만, 아들은 언제까지나 집에 머무른다.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는 정녕 자유롭게 될 것이다.”
아버지의 집인 수도원에서, 교회에서 죄의 종으로 머문다는 것은 너무 부끄러운 일입니다. 우리와 늘 함께 계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할 때 정녕 자유롭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날마다 주님과 일치를 깊이해주는 미사은총이 우리를 참으로 자유롭게 하는데 얼마나 결정적 역할을 하는지 깨닫습니다. 진리자체이신 예수님을 떠나 자유의 추구는 연목구어(緣木求魚)의 어리석은 행위일뿐입니다.
진리자체이신 주님과 함께 함이 참 자유의 첩경임을 깨닫습니다. 바로 오늘 제1독서 이스라엘의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 세 청년이 참 자유의 실상을 보여줍니다. 타오르는 불가마 속에서 자유로이 거니는 세 청년들 참 자유인의 상징입니다. 세 청년이 ‘이슬 머금은 바람 서늘한’ 불가마 속에서 한 일은 오늘 독서에서 생략됩니다만 단 하나 하느님 찬미였습니다.
‘세 젊은이는 가마 속에서 한 목소리로 하느님을 찬송하고 영광을 드리며 찬미하였다.’
새삼 불가마 같은 공동체 생활 중에도 온전한 자유인이 되게 하는데 찬미와 감사의 공동전례기도 은총이 얼마나 결정적인지 깨닫게 됩니다. 어떤 역경속에서도 진리자체이신 주님과 함께 하며 하느님 찬미에 전념할 때 온전한 자유임을 깨닫습니다. 기절초풍하여 그 사유를 묻는 바빌론의 네부카드네자르 임금입니다.
“우리가 묶어서 불 속으로 던진 사람은 셋이 아니더냐? 그런데 내가 보기에는 네 사람이 결박이 풀렸을 뿐만 아니라, 다친 곳 하나 없이 불 속을 거닐고 있다. 그리고 넷째 사람의 모습은 신의 아들 같구나.”
참으로 진리자체이신 주님과 함께 할 때 온전한 자유인들의 공동체임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귀신이 곡할 기적에 놀란 임금의 하느님 고백이 감동입니다.
“사르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하느님께서는 찬미받으소서. 그분께서는 당신의 천사를 보내시어, 자기들의 하느님을 신뢰하여 몸을 바치면서까지 임금의 명령을 어기고, 자기들의 하느님 말고는 다른 어떠한 신도 섬기거나 절하지 않은 당신의 종들을 구해내셨다.”
참 자유는 섬김의 자유입니다. 참으로 진리이신 주님과 함께 섬김의 삶에 충실할 때 천하무적의 진리의 용사로서 참 자유인의 삶이겠습니다. 주님은 날마다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진리이신 당신 안에서 섬김의 삶에 충실함으로 날로 자유로워지는 예닮의 여정을 살게 하십니다.
"생명의 샘이 진정 당신께 있고,
우리는 당신 빛으로 빛을 보옵나이다."(시편36,10).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