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3.23.사순 제5주간 토요일 에제37,21ㄴ-28 요한11,45-56
“우연은 없다”
-모두가 하느님의 섭리다-
“너희가 지은 모든 죄악을 떨쳐 버리고,
새 마음과 새 영을 갖추어라.
나는 누구의 죽음도 기뻐하지 않는다.
회개하라, 그러면 살리라.”(에제18,31ㄱ.32)
하느님을 떠난 인간의 비극이요 불행입니다. 무지와 허무에 대한 답은 하느님뿐임을 깨닫습니다. 많이들 아프고 병든 모습들입니다. 죄가 많으니 병도 많고 제대로 된 사람들이 많지 않습니다. 아니 매우 적습니다. 정말 길을 잃고, 희망을 잃고, 빛을 잃고 방황하면 괴물이나 폐인이 되기 십상인 오늘의 현실입니다. 너무나 하느님으로부터 멀리 떠나 있기 때문입니다.
믿는 이들뿐 아니라 사람이라면 누구나, 특히 지도자들은 기도해야 하는 때입니다. 기도해야 회개와 더불어 자기를 아는 겸손과 지혜가 따릅니다. 사순시기 막바지입니다. 역시 답은 단 하나, 하느님께 돌아오는 회개뿐임을 깨닫습니다. 하느님 안 제자리에 돌아와 제정신으로 제몫의 일을 하며 제대로 사는 지극히 평범하고 온전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새벽 새롭게 눈에 띈 말마디들이 고마웠습니다.
1.서울 이경상 주교의 문장이 확정되었고 사목표어가 새롭게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으로 살기(Vivere In Corde Jesu)”, 참 멋지고 아름다운 사목표어입니다. 온유와 겸손의 예수님 성심으로 살고 싶음은 믿는 이들 누구나의 바람일 것입니다.
2."세상과 벽을 쌓는다면 갇혀있는 나와 마주할 뿐이다. 그러니 사람이 지겹다면 오히려 사람 속으로 들어가라. 하루 아침의 분노를 견디지 못하고 서둘러 먼 곳으로 떠나면 무지렁이로 끝날 뿐이다."-다산
2.교황청 설교가 칸타라메사 추기경의 다섯 번째 사순강론 성서 말씀도 새롭게 마음에 와닿았고 청중 맨앞 한복판에 경청하는 교황님 모습도 보기 좋았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누구든 죽더라도 살 것이고, 살아서 믿는 누구든 결코 죽지 않을 것이다.” 참으로 부활이요 생명이신 주님을 믿음이 우리 삶의 모두임을 웅변하는 강론이었습니다.
우연은 없습니다. 모두가 은총이요 하느님의 섭리입니다. 우리 하나하나가 결코 우연적 존재가 아닌 하느님 섭리의 결과요, 신의 한수 같은 존재라는 것입니다. 정말 우리 요셉 수도원의 수도형제들 하나하나가 그러합니다. 하느님의 섭리가 아니곤 도대체 해명될 수 없는 공동체 삶의 신비입니다.
하나하나가 하느님의 선물같은 존재요 우리의 자연스럽고 당연한 응답은 감사와 찬미, 그리고 주어진 책임을 다하는 것입니다. 수도원 설립 25주년을 맞이하면서 수도공동체 삶을 “렉시오디비나”했을 때의 깨달음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1.모든 것은 다 때가 있다.
2.모든 것은 다 필요했다.
3.모든 것은 다 지나간다.
4.그러니 오늘 지금 여기를 살라.”
넷으로 요약되는 하느님 섭리의 깨달음이요, 지금도 이런 깨달음은 여전히 유효합니다. 우연은 없고 모두가 하느님 은총의 섭리안에서 진행된 수도원 역사임을 깨닫습니다. 어제 금요강론의 주제도 “하느님의 섭리”였고 그 내용을 일부 인용합니다.
하느님은 당신만이 아는 신비로운 방식으로 모든 것을 완성해 나가십니다. 그분이 지으신 것은 잠시도 그분의 손길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의 자유가 제한되거나, 우리가 그분의 영원한 계획대로 움직이는 허수아비에 불과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분 안에서 살고 움직이며 존재합니다.”(사도17,28)
하느님은 우리가 인생에서 겪는 좋고 나쁜 모든 일 안에, 심지어 고통스러운 일들과 무의미해 보이는 우연 속에도 존재하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인생이라는 삐뚤빼뚤한 선 위에서도 반듯하게 쓰기를 원하십니다. 어떤 역경속에서도 우리 모두 인간의 존엄한 품위를 잃지 않고 반듯하게 사시길 간절히 바라십니다. 바로 이런 모범적 섭리의 인물이 오늘 복음의 우리의 구원자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침묵중에 말씀하시지 않지만 대사제인 카야파가 우매한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통한 하느님의 섭리를 밝힙니다.
“여러분은 아무것도 모르는군요. 온민족이 멸망하는 것보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여러분에게 더 낫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헤아리지 못하고 있소.”
이 말은 카야파가 자기 생각으로 한 것이 아니라 그해의 대사제로서 예언한 셈입니다. 이래서 최고의회는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의하니 이 또한 하느님 섭리안에서 진행됨을 봅니다. 예수님은 그곳을 떠나 광야에 가까운 고장의 에프라임이라는 고을에 가시어, 제자들과 함께 그곳에 머무르시니 당시 예수님과 함께 한 제자들의 심정은 얼마나 착잡했겠는지요.
그러나 예수님은 하느님의 구원 섭리를 굳게 믿으며 묵묵히 흔들림없이 십자가의 길을 걸으셨을 것입니다. 이런 예수님의 죽음은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부활에 이어 당신 몸의 성전을 통해 영원히 우리 삶의 일치의 중심이 될 것임을 오늘 제1독서에서 에제키엘 예언자가 밝혀주고 있습니다. 말그대로 하느님 구원 섭리의 원대한 꿈의 실현입니다. 죽으시고 부활하시어 영원히 우리와 함께 하시는 파스카 예수님을 통해 오늘 지금 여기서 우리 안에 실현되는 하느님의 꿈임을 깨닫습니다.
“나는 그들에게 복을 내리고 그들을 불어나게 하며, 나의 성전을 영원히 그들 가운데에 두겠다. 이렇게 나의 거처가 그들 사이에 있으면서, 나는 그들의 하느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될 것이다.”
그대로 우리 모두 이 거룩한 성전미사를 통해 실현되는 하느님의 꿈이요 진리임을 깨닫습니다. 우연은 없습니다. 모두가 하느님의 섭리안에 이뤄지는 일입니다. 일어나는 모든 일이 하느님의 뜻은 아니더라도 하느님의 허락없이 이뤄지는 일은 하나도 없습니다. 예수님처럼 하느님의 참 좋은 협력자가 되기 위해 하루하루 100% 하느님 손에 달린 듯이 기도하고, 100% 내손에 달린 듯이 노력하는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의 자세가 참으로 절실합니다.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하느님의 섭리에 따라 잘 살 수 있도록 도와 주십니다.
“목자가 양떼를 돌보듯,
주님은 우리를 지켜주시리라.”(예레31,10ㄹ).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