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지(無知)에 대한 답(答)은 “진리(眞理)이신 주님과 ‘만남의 여정’뿐이다”2024.4.6.부활 팔일 축제 토요일

by 프란치스코 posted Apr 06,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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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4.6.부활 팔일 축제 토요일                                                        사도4,13-21 마르16,9-15

 

 

무지(無知)에 대한 답(答)은

“진리(眞理)이신 주님과 ‘만남의 여정’뿐이다”

 

 

“주님께 감사하라, 그 좋으신 분을,

 영원도 하시어라, 그 사랑이여.”(시편118,1)

 

무지한 인간이 물음이라면 답은 주님뿐입니다. 무지에 대한 답은 진리이신 주님과 만남의 여정뿐입니다. 만남중의 만남이 부활하신 주님과의 만남입니다. 한두번이 아니라 평생 날마다 주님과 만나야 합니다. 그래서 믿는 이들의 삶의 여정은 주님과 만남의 여정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요즘 말씀은 거의가 부활하신 주님과의 만남과 그 변화를 보여줍니다. 사실 성서는 거의가 주님과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들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대로 만남, 회개, 자비, 지혜, 겸손, 용기로 이어지는 인간 현실을 깨닫습니다. 오늘 옛 어른의 말씀도 무지한 인간의 실상을 보여줍니다.

 

“닥치는 대로 벌면 닥치는 대로 쓴다. 사람답게 쓰기 위해서는 사람답게 벌어야 한다.”-다산

‘사람답게’는 막연하고 ‘하느님의 자녀답게’하면 분명해집니다.

“부자가 되고 싶은가? 치욕을 참고, 목숨을 걸고, 친구를 버리고, 의로움을 버리라.”-순자

부자가 되려는 마음은 무지의 절정입니다.

 

어제 수도형제와의 대화중 깨달음을 잊지 못합니다. 착함과 약함의 차이를 새삼 깨닫습니다. 정신 질환을 앓고 있는 형제에 대한 수도형제의 진단입니다. 

 

“착한 것이 아니라 약한 것입니다. 정신이 약한 것입니다.”

 

그래서 정신력이 강한 이들을 멘탈 갑이라고 말합니다. 어제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전임 베네딕도 16세 교황님에 대한 말씀에 대한 이해도 확연해 집니다.

 

“그분은 매우 섬세한 분입니다. 그러나 그분은 약하지 않았고, 강했습니다. 그분은 겸손했고 누구에게 부담주는 것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많은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참 고귀한 인품의 두 어른 교황님들입니다. 베네딕도 16세 교황과의 마지막 만남의 고백도 감동적입니다.

 

“베네딕도는 침대에 누워있었다. 그분의 의식은 여전히 또렸했으나 말씀하실 수는 없었다. 그분은 나를 바라보고 내 손을 꼭 쥐었고 내 말하는 것을 이해하였으나 한마디도 분명히 표현할 수 없었다. 나는 그분의 손을 잡고 보면서 그분과 함께 잠시 머물렀다. 나는 그분의 맑은 눈을 기억한다. 나는 그분께 애정 가득한 몇마디 말씀을 드리고 강복을 드렸고, 서로는 말없는 중에 작별인사(goodbye)를 했다.”

 

이어지는 회고담도 깊은 가르침이자 깨우침이 됩니다. 참으로 “주님의 현인(賢人)”인 교황들입니다. 이런 고귀하고 아름다운 삶자체가 참 좋은 복음 선포가 됩니다.

 

“교황들 사이에는 일관성(continuity)이 있다. 각 계승자인 교황은 언제나 일관성으로 특징지어 진다. 일관성중에 각자 고유의 은사가 빛을 발한다. 거기에는 언제나 일관성이 있고, 파탄(rupture)은 없다...몇몇 추기경들이 베네딕도 교황에게 가서 내가 이단이라고 말했다. 그분은 모두를 경청했고 위엄을 지니고 모든 것을 분별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그리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이것은 이단이 아니다.’ 그분은 이렇게 나를 방어해 주었다! 그분은 언제나 나를 방어해 주었다.”

 

얼마나 감사한 마음으로 전임 교황을 회고하는지요! 이런 아름다운 추억이 미래를 열어가는 희망이 되고 힘이 됩니다. 참으로 주님을 만난 위대한 인품과 우정의 교황들입니다. 오늘 복음은 앞서 부활하신 주님과 만났던 분들의 고백을 듣고 불신했던 무지한 제자들의 반응과 더불어 주님의 꾸중으로 특징지어 집니다.

 

‘열한 제자가 식탁에 앉아 있을 때, 예수님께서 나타나셨다. 그리고 그들의 불신과 완고한 마음을 꾸짖으셨다. 되살아난 당신을 본 이들의 말을 그들이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바로 ‘불신과 완고한 마음’ 이것이 주님을 만나기 전 무지한 인간의 실상입니다. 그러나 이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는 순간 회개와 더불어 완전히 새롭게 태어났음이 분명합니다. 이어지는 사명의 부여가 이를 입증합니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믿는 이들의 최우선의 책무가 복음 선포입니다. 안으로는 친교의 제자, 밖으로는 선교의 사도가 믿는 이들의 신원입니다. 참으로 부활하신 진리이신 주님을 만날 때, 회개와 더불어 겸손과 온유, 자비와 지혜, 정직과 용기의 제자요 사도가 됨을 깨닫습니다. 보십시오. 예수님의 유언대로 선교사로서 맹활약이 시작된 사도들입니다. 사도들의 특징은 담대한 용기입니다. 참으로 진리이신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자유롭고 담대해진 사도들입니다. 다음 묘사가 참 좋은 증거입니다.

 

‘그들은 베드로와 요한의 담대함을 보고 또 이들이 무식하고 평범한 사람임을 알아차리고 놀라워하였다.’

 

사도들의 담대한 용기는 다음 고백에서 절정에 이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여러분의 말을 듣는 것이 하느님 앞에 옳은 일인지 여러분 스스로 판단하십시오.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정말 진리이신 주님을 만나 자유로워지고 담대해진 사도들입니다. 박해자들에 대한 순교자 영국의 토마스 모어(1478-1535)의 감동적인 고백도 생각납니다. 저는 “왕의 좋은 종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이 우선입니다.”(The King’s good servant, but God’s first), ‘왕의 종’이전에 ‘하느님의 종’으로서의 올바른 처신이 우선이라는 고백이요, 담담히 순교의 죽음을 맞이한 성 토마스 모어입니다.

 

가톡릭 교회는 2000여년 동안 훌륭한 역사와 전통을 면면히 계승해온 위대한 종교입니다. 우리 교회는 완전히 문맹의 사람들은 물론 고도의 지성인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사랑하고 아는 데에는 차별이 없습니다. 고도의 관상과 신비주의와 성성(聖性)은 모두에게 주어진 동등한 은총이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무지에 대한 답은 주님과 사랑의 만남뿐임을 깨닫습니다. 누구에게나 활짝 열린 주님과의 만남입니다. 진리이신 주님을 만날 때 저절로 회개와 겸손, 자비와 지혜, 담대한 용기의 사람으로 변모되니 비로소 무지로부터의 해방입니다. 날마다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주님과 만남의 여정에 결정적 도움을 주십니다.

 

"여러분에게 맡겨진 이들을 위에서

 지배하려고 하지 말고, 양 떼의 모범이 되십시오."(1베드5,3).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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