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4.17.부활 제3주간 수요일 사도8,1ㄴ-8 요한6,35-40
파스카의 기쁨
-부활하신 주님과 늘 함께 하는 삶-
“온 땅은 춤추며 하느님을 기리라.
그 이름의 영광을 노래하여라.
빛나는 찬미를 주님께 드려라.”(시편66,1-2)
계속되는 파스카의 축제, 알렐루야 부활시기입니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온갖 파스카의 봄꽃들과 더불어 날로 짙어지는 아름다운 신록입니다, 파스카의 기쁨을 상징하는 신록의 아름다움, 신록의 기쁨입니다. 요즘 부활시기 전례도 계속되는 “알렐루야. 알렐루야” 하느님 찬미입니다. 부활의 기쁨, 찬미의 기쁨이 없으면 도대체 이 광야인생 무슨 기쁨으로 살아갈수 있을런지요! 예수님 부활 사건이 하느님의 얼마나 큰 선물인지 새삼 깨닫습니다. 예수님을 닮아 선교해야 하는 교회임을 깨닫습니다. 옛 어른이 가르침도 이와 맥을 같이 합니다.
“물이 한 곳에만 모여 있으면 그 물은 썩는다. 물이 낮은 곳으로 흘러갈 때 물은 생명의 근원이 된다.”-다산
“하늘은 한 사람을 부유케 하여 사람들의 가난을 구제케 하였으나, 세상은 제 부유함에 취해 가난한 사람을 능멸한다. 이런 사람들은 천벌을 받는다,”-채근담.
오늘 제1독서 사도행전의 장면이 참 역동적입니다. 스테파노의 순교에 이어 복음은 사마리아에 전파됩니다. 이제 예루살렘에서 유다와 사마리아 및 로마로 판도가 바뀌면서 복음의 불길이 퍼져가는 모습입니다. 순교의 피는 교회의 씨앗이라는 속담이 그대로 실현되는 모습입니다. 박해와 스테파노의 순교상황시 죽음의 분위기는 생명으로, 어둠은 빛으로, 절망은 희망으로 반전되는 모습들이 그대로 파스카의 신비를 보여줍니다. 흡사 강풍에 번지는 복음의 불길같습니다.
박해로 흩어진 사람들은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말씀을 전하며 일곱 부제들중 스테파노에 이어 두 번째에 속하는 필리포스는 사마리아에 그리스도를 선포하며 맹활약을 펼칩니다. 필리포스를 통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니 놀라운 기적들의 발생입니다. 정말 신바람 나는 분위기입니다.
‘군중은 필리포스의 말을 듣고 또 그가 일으키는 표징들을 보고, 모두 한마음으로 그가 하는 말에 귀를 기울였다, 사실 많은 사람에게 붙어 있던 더러운 영들이 큰 소리를 지르며 나갔고, 또 많은 중풍 병자와 불구자가 나았다. 그리하여 그 고을에 큰 기쁨이 넘쳤다.’
얼마나 역동적 분위기인지요! 그대로 필리포스를 통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니 이런 기적에 큰 기쁨, 파스카의 기쁨입니다. 바로 시공을 초월하여 똑같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는 파스카의 봄철에 이 거룩한 미사시간입니다. 예전 인용했던 “예수님은 봄이다”라는 자작시가 생각납니다.
“예수님은 봄이다
봄은 사랑이다
봄이 입맞춘 자리마다
환한 꽃들 피어나고
봄의 숨결 닿은 자리마다
푸른 싹들 돋아난다
예수님은 봄이다
봄은 사랑이다”-1999.3
엊그제 4월15일은 온종일 부드러운 봄비에 촉촉이 젖은 봄의 대지였습니다. 늘 인용해도 기분 좋은 ‘봄비’란 자작시가 생각났습니다.
“마음을
촉촉이 적시는 봄비
하늘 은총
내 딸아이 하나있다면
이름은
무조건 ‘봄비’로 하겠다”-2005.4
19년전 봄이나 지금의 봄이나 여전히 똑같은 심정입니다. 봄비처럼 메마른 우리를 촉촉이 적시는 부활하신 주님의 은총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우리의 모두입니다. 우리의 사랑, 우리의 생명, 우리의 희망, 우리의 기쁨, 우리의 행복입니다. 오늘 복음 서두 말씀은 어제에 이어 같은 내용이 반복됩니다. 그처럼 다음 대목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도대체 이런 부활하신 파스카의 예수님이 아니곤 누가 우리의 궁극의 배고픔을, 목마름을 해결해 줄 수 있을런지요. 이런 주님을 만나지 못해 험난한 광야 여정중 세상 것들에 중독이 되어 폐인이 되기도 하고 괴물이 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주님이 그리워, 보고파, 배고파, 목말라, 주님의 생명을, 사랑을, 평화를 찾아 끊임없이 주님의 집인 수도원을 방문하는 사람들입니다.
“아버지께서 나에게 주시는 사람은 모두 나에게 올 것이고, 나에게 오는 사람은 나는 물리치지 않을 것이다.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은, 그분께서 나에게 주신 사람을 하나도 잃지 않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것이다.”
얼마나 은혜로운 말마디인지요! 하느님은 우리 모두에 먼저 세상에 예수님을 보내셨고 이어 우리를 예수님께 보내셨습니다. 우리 하나하나가 우연적 존재가 아니라 구원을 위해 예수님께 보냄 받은 “하느님의 선물”이란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하나하나가 예수님께 보낸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이어 또 당신께 온 우리 모두에게 구원의 약속을 환기시키는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신 하느님의 목적도 이것 하나뿐입니다.
“내 아버지의 뜻은 또, 아들을 보고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다. 나는 마지막 날에 그들을 다시 살릴 것이다.”
예수님의 결연한 자세가 확연히 느껴지는 대목입니다. 당신께 오는 이들 모두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고 마지막 날에 모두 살릴 것이라는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님의 단호하고 결연한 자세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믿는 우리의 구원의 선택이 얼마나 결정적인지 깨닫습니다. 다음 베네딕도 규칙 말씀도 이런 그리스도의 마음과 일치합니다. 바로 이런 그리스도의 마음은 하느님의 마음입니다.
“그리스도보다 아무것도 더 낫게 여기지 말 것이니 그분은 우리를 다 함께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실 것이다.”(성규72,11-12)
바로 이 거룩한 미사시간 이런 구원의 주님을 마음 깊이 모시는 은혜로운 시간입니다. 이미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영원한 생명의 구원을 살기 시작한 우리들이요 저절로 나오는 다음 주님 향한 사랑의 고백입니다.
“부활하신 주님,
당신은 저희의 모두이옵니다.
저희의 사랑, 저희의 생명, 저희의 희망, 저희의 기쁨,
저희의 행복이옵니다.
하루하루가 감사와 찬미요, 감동과 감격이옵니다.
날마다 생명의 빵이신
당신과 함께 새롭게 시작하는 아름다운 오늘이옵니다.”
“내 입은 님의 찬미로 가득 차 있고
진종일 당신께 영광을 드리나이다.
주님을 찬미할 때, 내 입술은 방실방실
속량하신 영혼도 너울너울 기쁘리다.”(시편71,8.23).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