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4.19.부활 제3주간 금요일 사도9,1-20 요한6,52-59
회개의 여정
-무지에 대한 답은 회개 은총 뿐이다-
“우리 위한 주님 사랑 굳건하여라.
주님의 진실하심 영원하여라.”(시편117,2ㄱㄴ)
매일 일기쓰듯 하는 강론입니다. 사제생활 초기 40대 강론이 격식을 갖춘 비교적 짧은 간결하고 강렬한 강론이었다면 지금은 이런저런 이야기와 시의 인용으로 자유로워진 강론이니 나이탓이기도 할 것입니다. 무엇보다 회개하는 마음, 기도하는 마음, 공부하는 마음으로 강론을 씁니다. 저는 언제나 밤 12-01사이에 기상하면, 만세칠창후 01-04시까지는 맑은 정신으로 그날의 강론을 씁니다. 죽으면 영원한 잠인데 때로는 잠시간이 아깝게 생각될 때가 많습니다.
오늘은 제64주년 4.19 혁명 기념일입니다. 1960년 당시 저는 초등학교 4학년이었고, 다음해 5.16 ‘군사정변’이 일어났습니다. 당시는 군사혁명으로 일컬어졌고 군사정변으로 옳게 바로잡혀 있음을 봅니다. 혁명중의 혁명이 무혈혁명인 선거혁명이요 가장 좋은 최고의 혁명이 끊임없는 영적혁명, 내적혁명이 회개일 것입니다. 한 두 번의 회개가 아니라 죽는 그날까지 계속되어야할 영적혁명, 회개의 여정입니다.
인간의 고질적 마음의 질병인 무지에 대한 유일한 답도 회개의 은총, 회개의 여정뿐입니다. 눈만 열리면 모두가 회개의 표징임을 깨닫습니다. 이런 회개의 은총을 통해 살아 계신 주님과 만남으로 비로소 무지로부터의 해방이 시작됩니다. ‘즐거운 아웃사이더’이자 ‘빠리의 택시 운전사’의 저자였고 대표적 진보운동인, 정치인, 언론인이었던 홍세화씨가 18일 서울 중랑구 녹색병원에서 향년77세로 별세했으니 이런 죽음 또한 우리에게는 회개의 표징이 됩니다.
어제 친애하는 사제로부터 ‘잠자는 성 요셉’ 상을 선물받았으니 이 또한 회개의 표징이 됩니다. 꿈은 하느님의 언어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책상위에는 잠자는 성요셉상이 있어, 교황님은 어떤 문제나 어려움이 생기면 그것을 종이에 써서 성요셉상 밑에 넣어두면 꿈중에 해결해 주신다 합니다. 저는 어제 잠잘 때 이불 속에 넣고 단잠을 잤고 매일 그러하려 합니다.
어제 교황님은 갈멜회 수녀님들을 알현하면서, “관상의 길은 원래 사랑의 길이다. 그길은 우리가 받은 사랑의 증인이 되도록 만든다. 그러니 하느님 사랑에 사로잡혀 살도록 하자.” 말씀하셨으니, 이 또한 우리의 사랑에 신선한 도전이자 회개의 표징이 되는 말씀입니다. 옛 어른이 다음 말씀도 회개와 더불어 우리를 참삶으로 이끌어 줍니다.
“부귀해서 삶에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삶에 만족하기에 부귀해 질 수 있는 것이다.”-다산
“현명한 사람은 재산이 많으면 그 뜻을 상하게 되고, 어리석은 사람이 재산이 많으면 허물만 더하게 된다.”-한서
새삼 끊임없는 회개의 여정을 통한 겸손과 지혜의 열매가 무지에 대한 최선의 처방임을 깨닫게 됩니다. 회개를 통해 겸손과 지혜의 참삶이 실현됩니다.
오늘 제1독서 사도행전은 사울의 회심을 전해 줍니다. 늘 읽어도 처음 읽는 듯 사울의 신선한 충격의 회심 은총 사건입니다. 스테파노의 순교후 결정적 순간을 기다려온 주님께서 마침내 목적을 달성하십니다. 무지하고 용감하면, 눈먼 열심에는 답이 없으니 신자들을 박해하던 무지몽매하던 사울이 그러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원대한 꿈에는 사도 바오로가 이미 예비되어 있었음을 봅니다. 바오로의 회심이 참으로 극적입니다.
“사울아, 사울아, 왜 나를 박해하느냐?”
“주님, 주님은 누구십니까?”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다!”
이 극적 회심 은총의 장면을 사울이 어찌 잊을 수 있겠는지요! 새삼 회개는 주님께서 주도하시는 은총이자 부활하신 주님은 믿는 이들 안에 늘 현존하심을 깨닫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야 할 자리는 가까이 만나는 형제자매들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회개로 맑아진 영혼들에게는 형제들 하나하나가 주님의 현존이자 얼굴로 보일 것입니다. 사울 역시 예수님께 보낸 하느님의 선물임이 드러납니다.
여기 어제 필리포스처럼 다리 역할을 하는 사람이 하나니아스라는 주님의 제자입니다. 하나니아스에게 안수를 받자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떨어지고 다시 보게 되었고 이어 일어나 세례를 받습니다. 세례를 받자 곧장 회당에서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선포하니 회개의 완성과 더불어 예수님과의 일치입니다. 그러나 결정적 회개로 끝난 사울의 삶이 아니라 평생 계속되었을 회개의 여정임이 분명합니다.
이런 사울처럼 전격적이고 극적인 회개만 있는 것이 아니라 평범한 일상에서의 소소한 회개도 있고 이런 회개가 중요합니다. 무엇보다 회개의 일상화, 회개의 생활화를 이뤄주는 ‘회개의 시스템’같은 나날의 일과표가 정말 중요하고 필요합니다. 바로 날마다 참여하는 성체성사와 시편성무일도가 회개의 일상화에 결정적 도움을 줍니다. 회개 역시 “회개-훈련-습관”의 도식이 성립됩니다.
자비송의 회개로 시작되는 성체성사를 통해 살아 계신 주님과 만남과 동시 이뤄지는 은총의 회개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은 성체성사의 진리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예수님의 성체성사에 대한 기막힌 절정의 강론을 그대로 인용합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사람의 아들의 살을 먹지않고 그의 피를 마시지 않으면, 너희는 생명을 얻지 못한다. 그러나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고 나도 마지막 날에 그를 다시 살릴 것이다.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고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과 같이, 나를 먹는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 것이다.”
개신교의 결정적 오류는 파스카의 예수님으로부터 말씀만 남기고, 초대교회부터 면면히 계승되어온 성체(성사)를 빼버릭고 극단으로 치달았다는 것입니다. 성체성사를 통해 살아 계신 주님을 만나 회개는 물론이요, 주님과 상호내주(相互內住)의 일치이니 회개의 여정, 예닮의 여정에 결정적 역할을 하는 성체성사의 은총에, 사랑에 감격하게 됩니다. 영혼의 궁극의 배고픔과 목마름도 성체성사를 통한 주님과의 일치뿐이요 무지와 허무에 대한 궁극의 답도 성체성사뿐임을 깨닫습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셨듯 우리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살게 되니 바로 이 거룩한 성체성사의 은총이요 이의 결정적 빛나는 본보기가 오늘 사도행전의 회심자 바오로 사도입니다. 바오로 사도야 말로 회개의 달인, 회개의 대가요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를 이렇게 만들어 줍니다. 사도 바오로의 감동적인 고백으로 강론을 마칩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갈라2,20).
“나의 간절한 기대와 희망은
내가 무슨 일에나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고
늘 그러했듯이 지금도 큰 용기를 가지고
살든지 죽든지 나의 생활을 통틀어
그리스도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나에게는 그리스도가 생의 전부입니다.”(필립1,20-21ㄱ).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