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4.24.부활 제4주간 수요일 사도12,24-13,5ㄱ 요한12,44-50
예수님은 누구인가?
-우리의 영원한 배경이신 예수님-
“하느님 찬양하라 내 영혼아
한평생 주님을 찬미하라.
이 생명 다하도록 내 하느님 기리리라."(시편146,1-2)
봄(春)은 봄(觀)입니다. 왜관수도원 계간지 분도지가 봄호 65권 표지를 보는 순간 떠오른 생각입니다. 65권이니 벌써 창간된지 16년째가 됩니다. 파스카의 기쁨, 신록의 기쁨 가득한 봄철은 참 볼 것도 많으니 역시 봄은 봄입니다. 어제 4월23일은 세계 책의 날이었습니다. 작은 잡지 분도 계간지이지만 참 알찬 잡지로 책의 날 소개해드리고 싶은 교회잡지입니다. 특집의 초점란은 파견(선교)였고, 분도잡지 역시 우리의 배경이신 주님을 환히 드러내려는 선교 목적으로 출판되는 잡지입니다.
어제 바티칸의 교황님을 찾은 어느 수도회 장상에게 주신 교황님의 말씀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당신이 섬기는 이들의 아버지들이 되십시오. 하느님의 사랑과 연민의 얼굴을 반영하는 아버지들이 되십시오.” 말씀에 이은 다음 말씀입니다.
“내가 충격을 받은 하나는 우크라이나 아이들이 여기 로마에 왔을 때 일입니다. 이 아이들은 웃지 않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웃음을 잃었습니다. 그들이 웃을수 있는 능력을 다시 살릴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
우리의 배경이신 주님을 환히 드러내는 주님의 얼굴이 되어갈 때, 선교는 저절로 이루어 질 것입니다. 오늘 4월24일, 옛 어른의 말씀처럼 배경이신 주님께서 환히 드러날수록 하는 일 모두가 이런 즐거움의 경지가 될 것이며, 고해인생은 축제인생이 될 것입니다.
“즐기는 것은 만 번을 반복하는 애정이며, 앞으로 만 번을 더 반복할 것이라는 긍지다.”-다산
삶은 반복입니다. 이런 반복의 삶이라면 반복의 기쁨, 반복의 행복, 반복의 새로움이라 부를수 있겠고, 바로 매일 평생 반복하여 부르는 찬미와 감사의 시편성무일도가 그러합니다.
“아는 것은 좋아하는 것만 못하고, 좋아하는 것은 즐기는 것만 못하다.”-논어
정말 배경이신 주님만이 점차 드러나는 삶일수록 이런 즐거움의 연속일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기쁨, 행복이기 때문입니다. 어제 참 많은 분들의 호응을 받았던 “배경을 가리지 말라”는 시화(詩畫)를 나누고 싶습니다. 요즘 이처럼 폭발적인 열화와 같은 반응을 보인 자작시는 드뭅니다.
“내
그 나무를, 집을 좋아하지 않음은
단 하나
크고 높아서
그 좋은 배경(背景)인
하늘과 산을 가려버리기 때문이다.
내
그 사람을 좋아하지 않음은
단 하나
크고 높아서
그 좋은 배경(背景)인
주님을 가려버리기 때문이다.
날로
작고 낮아져
그 좋은 배경(背景)을 환히 드러내는
누구나 좋아하는
겸자(謙者)가
덕자(德者)가 될 일이다.”-2024.4.23
집은 자연입니다. 집은 삶입니다. 집이 좋아야 삶도 좋습니다. 집은 살아있습니다. 어머니 자연 배경과 잘 어울리는, 자연과 잘 조화된, 자연친화적인, 자연속에 숨겨진 옛 고향집같은 정다운 집이 정말 좋은 집, 살만한, 살아야할 집입니다. 사실 우리 옛 집들은 다 이러했습니다. 오늘날 병이 많은 것은 집과도 관계가 있습니다. 처음에는 ‘싫어함’이란 부정적 말마디를 썼다가 즉시 ‘좋아하지 않음’이란 긍정적 말마디로 바꿨습니다. 수도원 전경도 별내 신도시가 건설되고 고층의 아파트 숲들이 즐비하니 배경을 이루었던 그 좋던 하늘과 산, 들의 옛 전경도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위 시 나눔에 대한 아름다운 고백의 세 답글도 나눕니다.
1.“한없이 좋으신 분, 주님을 가려버리지 않게,
더 낮아지고
더 작아지게
노력하는 삶의 자세
가슴에 담고 살아가겠습니다.”
2.“이 시는 최고입니다. 주님 만날 때까지 간직하고 싶습니다. 아멘! 아멘!”
3.“주님을 가려버리지 않도록 낮아지고 작아져 겸손하게 살아야 됨을 다시금 아름다운 시를 통해 깨우쳐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예수님을 통해 배경이신 하느님 아버지가 환히 드러나듯 우리를 통해 배경이신 예수님이, 하느님이 환히 드러나는 삶이 우리 영적 삶의 궁극 목표이겠습니다. 정말 예수님을 통해 하느님이 환히 드러나니 예수님이 아니곤 하느님 아버지를 알 길이 없습니다.
한없이 작아지고 낮아져서, 마침내 비움과 겸손의 절정에서 나는 사라져 하느님 아버지와 일치되어 살았던 예수님이셨고, 부활의 파스카 예수님에게서 일치의 완성에 도달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누구인지 다음 복음에서 하느님 아버지와의 관계를 통해 환히 계시됩니다. 나는 사라져 배경이신 아버지와 하나된 예수님의 정체를 보여줍니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나를 믿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것이다. 나를 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보는 것이다. 나는 빛으로서 이 세상에 왔다. 나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어둠 속에 머무르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나는 그분의 명령이 영원한 생명임을 안다. 그래서 내가 하는 말은 아버지께서 나에게 말씀하신 그대로 하는 말이다.”
빛이신 배경의 하느님을 반사하는, 빛이신 배경의 하느님과 하나된 빛이 되어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이십니다. 인간의 무지와 허무, 불안과 두려움의 어둠에 대한 궁극의 답은 빛이신 예수님뿐임을 깨닫습니다. 주님이야말로 세상의 빛, 인류의 빛, 영혼의 빛입니다. 세상 무슨 빛이 주님의 빛을 대체할 수 있겠는지요! 새삼 구원과 심판도, 천국도 지옥도, 생명과 죽음도, 행복과 불행도, 희망과 불행도 스스로 자초한 선택의 결과임을 깨닫습니다.
부활하신 파스카의 주님을 배경한, 주님과 일치를 이룬 사도행전의 제자들의 선교 활동이 눈부시게 펼쳐집니다. 제자들을 통한 부활하신 파스카 주님의 활동입니다. 제자들은 사라지고 배경이신 파스카의 예수님만이, 하느님의 말씀이신 예수님만이 환히 드러납니다. 다음 짧은 대목이 이를 요약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더욱 자라면서 널리 퍼져나갔다.’
이어 바르나바와 사울은 예루살렘에서 사명을 수행한 후, 둘은 선교사로 파견되니 마침내 바오로 사도의 제1차 선교여행이 실현됩니다. 주님의 두 제자이자 사도인 바르나바와 사울의 선교사로서의 맹활약이 펼쳐집니다. 이들을 통해 일하시는 분은 바로 이들의 영원한 배경이신 파스카의 예수님임을 깨닫습니다. 날마다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배경이신 주님과의 일치를 깊게하시어 당신의 사도이자 선교사로, 당신의 빛으로 어둔 세상에 피견하십니다.
“하느님, 우리를 어여삐 여기소서,
우리에게 복을 내리옵소서.
어지신 그 얼굴을 우리에게 돌리소서,”(시편67,1).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