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의 ‘평생 사랑의 학인(學人)’인 우리들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2024.5.2.목요일 성 아타나시오 주교 학자(295-373) 기념일

by 프란치스코 posted May 02,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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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5.2.목요일 성 아타나시오 주교 학자(295-373) 기념일 

사도15,7-21 요한15,9-11

 

 

주님의 ‘평생 사랑의 학인(學人)’인 우리들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당신의 영광을 백성에게,

 그 기적을 만백성에게 두루 알리라.”(시편96,3)

 

하느님 사랑의 영광, 사랑의 기적을 알리라는 시편 화답송 말씀입니다. 어제 수도원에는 저녁기도후 김종훈 루가 형제의 수련착복식이 있었습니다. 역시 하느님께서 보내 주신 참 좋은 사랑의 선물인 수도형제입니다. 제의실 창밖 죽어 있었던 대추나무에 푸른 싹들이 움트니 죽음을 넘어서는 생명의 의지, 사랑의 의지에 감동합니다.

 

요즘 주차장 주변에는 파스카 사랑의 봄꽃, 이팝나무꽃들이 만개하기 시작했고 어제는 김포 고촌성당의 열심한 사랑의 자매들 다섯분이 수도원 넓은 밭의 채소 모종을 해주었습니다. 또 조루시아 자매도 온종일 사랑의 주방봉사에 정성을 다했습니다. 이미 읽었던 내용도 새롭게 마음에 와 닿을 수 있습니다. 교황님 홈페이지를 여는 순간 와닿은 말마디들입니다.

 

“인내는 그리스도의 사랑에 대한 확실한 증거를 제공한다.”

“교만은 겸손으로 싸워라.”

“모든 것은 믿음의 인내로 가능하다.”

이 모두의 뿌리에는 사랑이 있습니다. 사랑의 인내, 사랑의 겸손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옛 어른 다산의 말씀도 결국은 사랑으로 귀결됩니다.

“가까운 사이일수록 애틋하게 여기고, 익숙한 사이일수록 어려워하라.”

“수양의 근본은 효우(孝友;부모에 대한 효도와 형제에 대한 우애)이니, 여기에 본분을 다하지 않는다면, 아무리 학식이 높고 글재주가 좋더라도 흙담에 색칠하는 것이다. 아주 예전에 써놨던 사랑이란 두편의 시도 생각납니다.

 

1.“사랑은 

 하느님 안에서

 제자리를 지켜내는

 거리를 견뎌내는

 고독의 능력이다

 

 지켜냄과 견뎌냄의 고독중에

 순화되는 사랑

 깊어지는 사랑

 하나되는 사랑이다”-1997.3

 

2.“나무는

 넉넉한 품

 언제나 거기 있어 

 날아 오는 새들 모두 안아 들이는

 넉넉한 품

 

 새들은 

 나무에 자취를 남기지 않고

 나무는

 새들에 집착하지 않는다

 사랑은 이런 것”-1997.3.

 

서로의 거리를 존중하는 사랑, 배려하는 사랑, 집착없는 초연한 사랑, 자유롭게 하는 사랑, 생명을 주는 사랑을 강조한 것입니다. 주는 사랑, 나누는 사랑, 섬기는 사랑, 돌보는 사랑을 강조한 것입니다. 수도공동체 형제들의 신원을 저는 주님의 형제, 주님의 전사, 주님의 학인으로 세차원에 걸쳐 설명하곤 합니다. 더불어의 공동체 삶이기에 형제애, 전우애, 학우애의 균형과 조화의 공동체가 참 좋은 공동체라 정의하곤 합니다. 역시 뿌리에는 사랑이 있습니다.

 

사랑해서 사람입니다.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되었다는 것은 사랑이신 하느님을 닮았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본질은 허무도 무지도 탐욕도 아닌 사랑임을 깨닫습니다. 만민의 공통보편언어가 사랑입니다. 만병통치약이 사랑이요, 만병의 근원이 사랑결핍임을 깨닫습니다. 온갖 정신질환의 뿌리에는 사랑 결핍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사랑과 더불어 자존감 높은 삶이요 또렷한 신원의식입니다. 도대체 사랑을 대체할 수 있는 것은 세상에 아무것도 없습니다. 배는 밥으로 채울수 있어도 무한한 가슴은 사랑만으로 채울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랑밖에 길이 없다, 사랑밖에 답이 없다 " 고백하는 것입니다. 우리 수도공동체 역시 ‘섬김의 학교’라 하는데 사랑의 학교라 할 수도 있습니다. 평생 공부해도 졸업이 없는, 늘 공부해도 여전히 초보자처럼 느껴지는 사랑입니다. “사랑은 아무나 하나?” 사랑도 능력이요 평생 보고 배워야 함을 깨닫습니다. 늘 해도 늘 부족한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그 오랜 세월 사랑을 주제로 강론해왔지만 늘 부끄러움을 느낍니다.

 

해도해도 끝이없는 사랑입니다. 사랑없는 인생이라면 참으로 무의미하고 허무한 삶일 것입니다. 사랑해서 사람이요 사랑은 모두라 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라 선물로 주어진 인생이요, 마지막 죽음을 앞두고도 여전히 목마른, 배고픈, 그리고 못다한 사랑에 대한 아쉬움일 것입니다. 오늘 강론 주제도 사랑입니다. 어제는 “너희는 내 안에 머물러라” 였는데, 오늘은 사랑이 더해져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더욱 분명해졌습니다. 순식간에 읽혀지는 오늘 복음 전문입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처럼,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무를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하는 이유는,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고 또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다.”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의 “슬픈 성인은 불쌍한 성인이다”라는 말마디에 공감합니다. 사랑과 함께 가는 충만한 기쁨, 또한 주님의 참 좋은 선물입니다. 사랑도 배워야 함을 봅니다. 사랑에도 기준이, 모범이 있습니다. '아버지께서 사랑하신 것처럼'이 예수님의 사랑법입니다. 사랑이신 하느님은 예수님의 롤모델입니다. 마찬가지 우리도 예수님으로부터 예수님의 계명을, 사랑법을 배워야 합니다. 평생 아버지께 순종의 사랑을 다한 예수님은 우리의 롤모델입니다. 

 

이런 사랑의 평생 수행과 더불어 비로소 주님 사랑 안에 머무르는 삶이, 날로 예수님을 닮아가는 삶이 가능하겠고, 이것이 우리 인생의 유일한 목표일 것입니다. 바로 이런 사랑의 계명을 지키는 데 원천이 주님의 사랑입니다. 참으로 마르지 않는, 끊임없이 샛솟는 “사랑의 샘”인 주님과 하나로 일치되어 있을 때 비로소 지치지 않는 사랑의 수행일 것입니다.

 

바로 이런 사랑의 모범이, 믿음의 모범이, 오늘 기념미사를 봉헌하는 알렉산드리아 성 아타나시오 주교 학자입니다. 정말 백절불굴의 믿음의 투사, 사랑의 투사, 성 아타나니오 주교 학자로, 오늘날 쓰이는 신약성서 27권의 체계와 목록을 처음으로 만든 분입니다. 아리우스 이단에 대항하여 끝까지 정통교리와 교회를 지켰고 이런 와중에 다섯 번이나 유배와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 그 옛날에 78세까지 장수하셨으니, 새삼 인명은 재천임을 깨닫습니다. 알렉산드리아 교회 신자들에게도 참으로 사랑받았던 목자였습니다. 

 

성 대 바실리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 성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오와 함께 동방 4대 교부에 속한 분이며 후대에 수도승들의 교과서 같던 “안토니오의 생애”를 저술한 분입니다. 사막 유배중 안토니오와 빠코미오에게 많은 영향을 받았던 참 각별한 성인입니다. 역시 이런 백절불굴의 신앙의 뿌리에는 하느님께 대한 사랑, 하느님 백성들에 대한 목자적 사랑이 자리하고 있음을 봅니다. 아타나시오를 비롯한 교회 하늘에 무수히 각양각색으로 영롱한 빛을 발하는 별같은 성인들은 바로 우리 삶의 길잡이가 됨을 깨닫습니다. 문득 떠오른 오래전 '민들레꽃' 자작시입니다.

 

“어! 땅도 하늘이네

 구원은 바로 앞에 있네

 뒤뜰 마당 가득 떠오른 샛노란 별무리

 민들레꽃들!

 땅에서도 하늘의 별처럼 살 수 있겠네”-2001.4.18.

 

지금도 옛 수도원 본원 건물 소박한 한옥 뒤뜰 마당에 눈부시게 피어난 민들레꽃들을 보며 쓸때의 기억이 생생합니다. 땅에서도 하늘의 별처럼 살았던 사랑의 성인들이요 우리 또한 그러합니다. 사랑은 분별의 잣대입니다. 오늘 제1독서 사도행전의 베드로와 야고보 사도가 그 모범입니다. 예루살렘 교회의 두 인물이 누구입니까? 예수님의 직제자가 아닙니까? 예수님의 사랑을 보고 배웠기에 이런 사랑에 의한 지혜로운 분별일 것입니다. 베드로의 감동적인 고백입니다.

 

“사람의 마음을 아시는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하신 것처럼 그들에게도 성령을 주시어 인정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믿음으로 그들의 마음을 정화하시어, 우리와 그들 사이에 아무런 차별도 두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지금 여러분은 왜 우리 조상들도 우리도 감당할 없던 멍에를 형제들의 목에 씌워 하느님을 시험하시려는 것입니까? 우리는 그들과 마찬가지로 우리도 주 예수님의 은총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믿습니다.”

 

역시 명불허전, 그 스승 예수님에 그 수제자 베드로답습니다. 하느님 사랑과 목자적 사랑이 하나된 베드로의 고백에, 다소 베드로보다 후퇴한 느낌이지만 야고보가 역시 분별의 지혜로 율법의 요구를 최소화하여 매듭을 지어줌으로 예수님의 제자이자 사도로서 참 어른의 진면목을 보여줍니다. 날마다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예수님을 닮아가는 사랑의 여정에 항구할 수 있도록 결정적 도움을 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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