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5.24.연중 제7주간 금요일 야고5,9-12 마르10,1-12
혼인과 이혼
하느님 중심의 미완(未完)의 부부가정공동체
존경과 신뢰와 함께 가는 사랑입니다. 존경과 신뢰가 사라지면 사랑도 빛이 바래지고 약화되기 마련입니다. 모든 사랑이 그렇습니다. 성모성월 5월은 계절의 여왕이자 가정의 달이기도 합니다. 가정의 달과 연관된 날도 참 많습니다. 5월5일 어린이 날, 5월8일 어버이날, 5월11일 입양의 날, 5월15일 스승의 날이자 가정의 날, 5월20일 성년의 날, 5월21일 부부의 날등 정말 가정의 달같습니다.
저의 경우도 매해 10년째 스승의 날 전후로 저를 찾는 60세된 초등학교 6학년때 제자들이 있고, 어버이날 전후로 거의 30년째 저를 찾는 두 자매도 있습니다. 30대 중반의 젊었던 자매가 지금은 60대 중반에 이르고 있습니다. 참으로 힘든중에도 끝까지 가정을 지켜낸 분들입니다.
참 어려운 것이, 답이 없는 것이 공동생활입니다. 부부가정공동생활도, 수도가정공동생활도 힘들기는 마찬가지입니다. 하루하루 늘 새롭게 시작하는 길뿐이 없습니다. 이혼율, 자살율, 노인빈곤율, 출산율이 세계 꼴찌인 한국이라 합니다. 요즘 결혼은 복권에 당첨되는 것보다 더 어렵다하며 본당에서 결혼하는 경우도 1년 한둘 정도라 합니다. 오늘 복음은 “혼인과 이혼”이 주제입니다. 성서의 예수님이나 교회의 가르침은 분명합니다.
“창조때부터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다.’ ‘그러므로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둘이 한몸이 될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이제 둘이 아니라 한몸이다. 하느님께서 맺어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된다.”
바로 이 말씀 안에 부부일치의 비결이 있습니다. 하느님 중심의 부부공동체라는 것입니다. “하느님 중심”, 믿는 이들의 부부공동체뿐 아니라 수도공동체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원리입니다. 서로 좋아서 마음이 맞아서 사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달라도 바라보는 방향이 같기에, 공동체의 중심인 주님을 바라보기에 함께 살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과의 신뢰와 우정과 더불어 부부간, 수도자간 신뢰와 우정이 깊어질 때 진정한 공동체의 일치라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말 부부가 평생 함께 살아가는 것은 수도자가 함께 살아가는 것보다 더 힘들것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아이들 보기도 힘들지만 함께 사이좋게 살아가는 부부도 보기 참 힘듭니다. 이들을 보면 저절로 기분이 좋고 자주 눈길이 가곤합니다. 함께하는 부부에게 자주 드리는 격려 말씀도 생각납니다.
“잘 살고 못 살고를 떠나 이렇게 함께 끝까지 살았다는 자체로 구원이요 성인입니다.”
그리고 부부는 혼자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니라 둘이 합하여 평균점수 60점이 넘어야 함께 천국입장이라고 말합니다. 때로 저절로 넋두리처럼 나오는 말도 있습니다.
“결혼은 아무나 하나? 부부는 아무나 하나? 부모는 아무나 하나? 결혼자격 시험, 부부자격시험, 부모자격시험좀 있었으면 좋겠다. 자격미달되는 경우로 인해 파생되는 문제가 너무 많다.”
그러나 자격 갖춰하기로 하면 자격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모두가 평생 자격을 갖춰가는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부부가, 부모가, 수도자가 되는 것 역시 평생 과정입니다. 참으로 평생 공동체의 중심인 주님을 바라보며, 경청과 겸손, 배움과 노력의 자세로 살아감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예전 자주 들었던 예화도 생각납니다.
“10대 부부는 신나게 살고, 20대 부부는 꿈속에 살고, 30대 부부는 사랑하며 살고, 40대 부부는 싸우며 살고, 50대 부부는 미워하며 살고, 60대 부부는 불쌍해서 살고, 70대 부부는 고마워서 산다.”
애정이 우정으로 바뀌어가는 부부간의 내적성장과정은 수도자들 역시 흡사합니다. 세월흘러가면서 불쌍해서 고마워서 살아가는 신뢰와 연민의 사랑, 우정이 주류를 이루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쉽사리 이혼할 것이 아니라 서로 때가 될 때까지 끝까지 기다려주는 지극한 인내와 관용이 필수입니다. 혼인 주례때 자주 인용한 칼릴 지브란의 “예언자”라는 책에서 “결혼에 대하여” 라는 잠언이 부부관계뿐 아니라 공동체내의 인간관계에도 깊은 지혜를 가르쳐 줍니다.
“함께 있되 거리를 두라.
그래서 하늘 바람이 너희 사이에서 춤추게 하라.
서로 사랑하라.
그러나 사랑으로 구속하지 말라.
그보다 너희 영혼과 영혼의 두 언덕 사이에 출렁이는 바다를 놓아두라.
서로의 잔을 채워주되 한쪽의 잔만을 마시지는 말라.
서로의 빵을 주되 한쪽의 빵만을 먹지 말라.
함께 노래하고 춤추며 즐거워하되 서로는 혼자 있게 하라.
마치 현악기의 줄들이 하나의 음악을 울릴지라도 줄은 서로 혼자이듯이
서로의 가슴을 주라.
그러나 서로의 가슴속에 묶어 두지는 말라.
오직 큰 생명의 손길만이 너희의 가슴을 간직할 수 있다.
함께 서 있으라.
그러나 너무 가까이 서 있지는 말라.
사원의 기둥들도 서로 떨어져 있고
참나무와 삼나무는 서로의 그늘 속에선 자랄 수 없다.”
참으로 서로의 자리를 존중하고 배려하고 자유롭게 할 때 더불어 깊어지는 신뢰와 사랑의 관계일 것입니다. 반면 무례하고 불손하고 무시하고 함부로 대하는 거친 언행은 얼마나 서로에게 큰 상처를 주며 관계를 파괴하는지요. ‘사랑’이란 제 옛 글도 생각납니다.
“사랑은 하느님 안에서
제자리를 지켜내는, 거리를 견뎌내는
고독의 능력이다.
지켜냄과 견뎌냄의 고독중에
순화되는 사랑
깊어지는 사랑
하나되는 사랑이다.”-1997.3
“사랑은 아무나 하나?” “부부생활은 아무나 하나?” “부모는 아무나 하나?” “수도생활은 아무나 하나?” 예로 들기로 하면 끝이 없습니다. 완성을 향해가는, 그러나 아직은 미완의 공동체라는 예술작품입니다. 부부공동체든 수도공동체든 평생 공동체 건설에 관용과 겸손과 인내와 지혜를 다해 한결같이 배움의 여정에 충실함이 얼마나 결정적으로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야고보 사도의 가르침도 참 적절합니다.
“원망하지 마십시오. 주님의 이름으로 말한 예언자들을 고난과 끈기의 본보기로 삼으십시오. 사실 우리는 끝까지 견디어 낸 이들을 행복하다고 합니다. 여러분은 욥의 인내에 대해 들었습니다. 과연 주님은 동정심이 크시고 너그러우신 분입니다. 무엇보다는 맹세하지 마십시오. '예' 할 것은 '예'하고, '아니요.' 할 것은 '아니요.' 라고만 말하십시오. 그래야 심판을 받지 않습니다.”
주님께 궁극의 희망을 두는 이들은 원망도 절망도 실망도 하지 않습니다.
부부가 끝까지 함께 사는 것이 이상이겠지만 이혼도 엄연한 현실이요 도저히 함께 살 수 없는 경우도 있습니다.
교회법 교수 신부님이 로마에서 혼인법을 배운후 마지막 강의시 들은 결론 말씀이라 합니다.
"교회법을 총동원하여 살 수 있는 사람은 살게 해주고, 못 살 사람은 헤어지게 해주라."
이혼하여 혼자 살더라도 결코 하느님의 가정인 교회공동체를 떠나선 안됩니다.
하느님은 아버지이고 교회는 어머니이며 우리는 형제들입니다.
끝까지 삶의 중심인 주님을 닮아 인내와 관용, 겸손과 진실, 배움의 자세로 신의를 지키며 공동체 삶을 살아가십시오.
죽어야 끝나는 공부요 영적전쟁입니다.
하루하루 처음이자 마지막처럼, 주님을 따라 사랑의 학인, 사랑의 전사, 사랑의 순례자, 사랑의 수행자로 살아가십시오. 날마다 너그럽고 자비로우신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이렇게 살 수 있게 하십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