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의 눈-2016.1.18. 연중 제2주간 월요일(일치 주간)

by 프란치스코 posted Jan 18, 2016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ESC닫기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2016.1.18. 연중 제2주간 월요일(일치 주간)                                           사무상15,16-23 마르2,18-22


                                                                          하느님의 눈


하느님 탐구와 나의 탐구는 함께 갑니다. 이보다 더 중요한 과제는 없습니다. 평생 죽을 때까지 계속되는 하느님 탐구와 나의 탐구입니다. 오늘은 ‘하느님의 눈’을 주제로 이런저런 묵상을 나눔으로 강론을 시작합니다. 편견이나 선입견 없이 있는 그대로 제대로 보아야 올바른 분별을 할 수 있습니다. 


잘 듣는 것 못지 않게 잘 보는 것 역시 중요합니다. 제대로 듣고 봐야 서로간의 소통도 원활해 질 수 있습니다. 어느 쪽에 편향되어 듣거나 보지 말라고 두 귀에 두 눈입니다.


1.며칠 전 벽시계가 걸려 있는 수도원 성전 뒷면 여백의 중앙 벽시계 좌우 양면 아래에 커다란 두 개의 수묵화가 걸려 있었습니다. 어느 화가의 ‘깨어 있어라’는 제목의 기증받은 부엉이 두 눈의 참 특이한 그림이었습니다. 보는 순간 여백의 조화와 균형을 깨는 듯한 사진에 혼란과 더불어 몹시 눈에 거슬렸습니다만, 점점 그림의 진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특히 미사집전 때는 정면으로 볼 수 있어 그대로 부엉이의 깨어있는 눈을 직시할 수 있어, 저절로 두 눈 똑바로 뜨고 깨어 바라보며 또 부엉이와 눈을 맞추며 미사를 봉헌하게 됩니다. 부엉이의 두 눈이 상징하는 바 하느님의 눈입니다. 


‘아, 하느님의 바라보는 눈, 지켜보는 눈, 깨어있게 하는, 바라볼 때마다 정신 번쩍 나게 하는 하느님의 눈이구나.’


하는 은혜로운 깨달음이었습니다. 


2.더불어 예전에 써놓은 하느님의 눈이란 시도 떠올라 나눕니다. 


‘그리움이 깊어/시리도록 푸른 하늘이 되었다

 영원한 하늘이 되었다

 침묵의 하늘이 되었다

 영원히 바라보는 눈빛이 되었다 

 하느님의 눈이 되었다

 나는!’-1997.11.27.-


18년전 창밖 눈이 시리도록 푸른 하늘을 보는 순간 떠오른 시입니다. 흡사 푸른 하늘이 나를 빤히 바라보는 ‘하느님의 눈’처럼 느껴졌습니다. 


3.원장 수사의 그림에 대한 설명입니다.


‘부엉이는 밤에도 볼 수 있어서 ‘깨어있는 존재’를 상징하는 동물로 자주 그림에 등장한다. 부엉이가 로마신화에서 지혜의 여신인 ‘미네르바Minerva의 부엉이’란 이름으로 불리며 지혜의 상징으로 여겨졌다면, 그리스도교 수도승생활에서 부엉이는 ‘마음의 순결’에 이르기 위해 끊임없이 마음 속 악한 생각과 싸우는 ‘깨어있는 수도승monk’의 상징이었다.’


4.얼마전 어느 일간신문에서 소개된 원나라 화가 진감여가 그린 고려 말의 문신 익재 이제현의 전신 초상화에 대한 설명 또한 깨달음이었습니다. 이제현은 운명에 맡기면서도 어떤 상황이 닥치든 균형의 지혜를 찾는 사람이었다 합니다. 다음은 이제현이 자신의 초상화에 대한 설명입니다.


-불행은 나 자신이 만든 것이니, 스스로 반성해 보면 어떨까? 못생긴 내 얼굴을 그려둠으로 무엇을 할까만 나의 후손에게 전해 주고 싶은 것이 있다.


1.한 번 쳐다보고 세 번 생각하라.

2.불행이 있을 것을 경계하여, 아침 저녁으로 꾸준히 노력하라.

3.구차한 행복을 바라지 마라. 불행을 피하게 되리라.-


도대체 이보다 더 좋은 후손에게 주는 유언의 선물도 없을 것입니다. 수도원 성전 뒷면의 하느님의 눈을 상징하는 부엉이의 눈을 보면서 떠오른 이제현의 초상화요 유언입니다.


하느님의 눈을 지닌 복음의 예수님이요 1독서의 사무엘 예언자입니다. 복음의 예수님의 안목이나 관점은 얼마나 탁월한지요. 그대로 하느님의 눈이요 하느님의 안목입니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단식할 수야 없지 않느냐? 신랑이 함께 있는 동안에는 단식할 수 없다.”


단식에 대한 논란을 위의 한 말씀으로 말끔히 정리해 주십니다. 바로 지금 여기가 신랑인 주님과 함께 종말론적 구원을 누리는 하늘나라인데 새삼 뜬금없이 무슨 단식이냐는 것입니다. 단식의 때가 되면 그 때 단식할 것이고 지금 여기서는 그냥 종말론적 구원의 기쁨을 누리라는 말씀입니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복음의 결론같은 말씀을 통해 안목의 전환, 관점의 전환, 인식의 전환, 발상의 전환을 촉구하시는 주님이십니다. 바로 이것이 진정한 회개입니다. 오늘 사무엘 역시 구구하게 변명하는 사울에게 주님의 준엄한 심판을 전달합니다. 하느님의 눈을 의식하여 깨어살았다면 이런 불순종의 잘못은 범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번제물이나 희생 제물 바치는 것을 주님께서 더 좋아하실 것 같습니까? 진정 말씀을 듣는 것이 제사 드리는 것보다 낫고, 말씀을 명심하는 것이 숫양의 굳기름보다 낫습니다. 임금님이 주님의 말씀을 배척하셨기에, 주님께서도 임금님을 왕위에서 배척하셨습니다.”


주님은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당신의 안목을 닮게 하시고 새 부대에 새 포도주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오늘 화답송 후렴이 말씀을 요약합니다.


"올바른 길을 걷는 이는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시편50,23ㄴ). 아멘.



Articles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