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좋은 삶의 꼴: 2015.1.18. 연중 제2주일(뉴튼수도원 69일째)

by 프란치스코 posted Jan 18,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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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18. 연중 제2주일(뉴튼수도원 69일째)

                                                                                                사무 상3,1ㄴ-10.19 1코린6,13ㄷ-15ㄱ.17-20 요한1,35-42


                                                                                 참 좋은 삶의 꼴


오늘은 '참 좋은 삶의 꼴'에 대한 묵상을 나눕니다. 누구나 참된 삶에 대한 갈망이 있습니다. 참 사람이 되고 싶은 것입니다.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된 인간의 복된 운명입니다. 삶은 은총이자 과제입니다. 하느님의 사람이 되는 것이 평생과제입니다. 수도자를 흔히 무엇을 하기 위해(to do), 무엇을 지니기 위해(to have)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사람이 되기 위해(to be) 수도원에 왔다고 합니다. 비단 수도자뿐 아니라 모든 이에게 부과된 위대한 평생과제가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토마스 머튼에 대한 평가가 생각납니다.

"그는 가톨릭인이전에 그리스도교인이었고, 그리스도교인이전에 종교인이었고, 종교인 이전에 사람이었다.“

탐구여정의 정점에 사람입니다. 보편인(universal man)으로서 참된 사람입니다. 참으로 역설적인 것이 가톨릭적일수록 보편인의 참 사람임을 깨닫습니다.

어디선가 읽은, 가끔 인용했던 구절도 생각납니다.

"사람 못된게 중되고, 중 못된게 수좌되고, 수좌 못된 게 부처된다.“

역시 사람을 정점에 두고 있습니다. 어디에 있든 그 삶의 자리가 사람이 되기 위한 구도처이자 수행처입니다. 

누가 참된 사람이며 참 좋은 삶의 꼴은 무엇입니까?


첫째, 주님을 찾는 삶입니다.

무엇을 찾느냐가 삶의 꼴을 결정합니다. 끊임없이 주님을 찾아야 합니다. 이래야 안주하지 않습니다. 찾을 때 정주(定住)요 찾지 않으면 안주(安住)입니다. 끊임없이 바다 향해 흐르는 강처럼 깨어 끊임없이 하느님 바다 향해 흐르는 강같은 사람입니다. 

오늘 주님은 복음 말씀을 통해 우리를 향해 묻습니다.

"무엇을 찾느냐?“

평생 화두로 삼아야 할 말씀입니다. 답은 오직 하나, 하느님입니다. 하여 수도자를 일컬어 '하느님을 찾는 사람'이라 정의합니다. 깨어 하느님을 찾을 때 하느님을 만나 말씀을 듣습니다. 

"저를 부르셨습니까? 저 여기 있습니다." 

어린 사무엘은 주님을 찾았기에 깨어 있었고 주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엘리 스승의 조언에 따라 주님의 부르심에 대한 마지막 대답이 참 좋습니다.

"주님, 말씀하십시오. 당신 종이 듣고 있습니다.“

이렇게 깨어 찾을 때 주님을 만납니다. 

요한은 물론 그의 제자들 역시 깨어 주님을 찾았기에 주님을 만났습니다.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요한은 주님을 보는 순간 환호했고 두 제자는 주님을 따라 나섭니다. 진정 주님을 찾을 때 무욕의 집착없는 훌륭한 인격의 스승입니다. 엘리와 요한이 그 모범입니다. 엘리는 어린 사무엘을, 요한은 두 제자를 유일한 스승이신 주님께 안내했습니다. 엘리와 요한처럼, 진정 참 스승이신 주님을 찾을 때 무욕의 겸손한 스승임을 깨닫습니다.


둘째, 주님 안에 머무르는 삶입니다.

어디에 머무르냐가 삶의 꼴을 결정합니다. 주님을 찾아 발견했으면 이어 주님 안에 머물러 주님의 온유와 겸손을 배워야 합니다. 주님 안에 머무를 때 위로와 치유요 자기의 발견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을 만난 요한의 두 제자의 질문이 참 적절합니다.

"라삐, 어디에 머무르고 계십니까?“

주님이 묵고 계신 곳에서 주님의 삶을 보고 배우고 싶은 열망을 반영합니다. 요한이 즐겨 사용한 용어가 '머무르다(그리스어 menein, 영어 remain)'입니다. 백문이 불여일견입니다. 스승을, 부모를 그대로 보고 배우는 제자요 자녀들입니다. 우리가 보고 배울 유일한 분은 주님이십니다. 보이는 스승이나 친구, 선배, 동료들을 통해 주님을 만나고 또 배우게 됩니다. 하여 수도원을 '주님을 섬기는 배움터'라 정의하기도 합니다. 아니 우리 삶의 자리 모두가 바로 주님을 섬기는 배움터요 그 스승은 주님이십니다.

"와서 보아라.“

마치 불가의 스승과 제자간의 선문답 같습니다. '와서 보아라' 이보다 더 좋은 교육은 없습니다. 우리 역시 주님의 초대에 응해 와서 보면서 이 거룩한 미사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주님 안에 머무르면서 바오로를 통해 주님의 말씀도 듣습니다.

"몸은 불륜이 아니라 주님을 위하여 있습니다. 여러분의 몸은 여러분 안에 계시는 성령의 성전임을 모릅니까? 그러니 여러분의 몸으로 하느님을 영광스럽게 하십시오.“

바로 주님 안에 머무를 때 올바른 처신(處身)임을 깨닫습니다. 주님 안에 늘 머물렀던 성인들처럼 성령의 성전인 거룩한 몸으로 하느님을 영광스럽게 해야 함을 배우고 깨닫습니다. 사무엘 역시 주님안에 머무르면서 얼마나 잘 배웠는지 다음 구절에서 아름답게 들어납니다.

'사무엘이 자라는 동안 주님께서 그와 함께 계시어, 그가 한 말은 한마디도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하셨다.“

언제 어디서든 주님 안에 머물러 배울 때 주님은 우리가 한 말 역시 한 마디도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하십니다. 필요한, 생명과 빛을 주는 사랑의 말만 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셋째, 주님을 선포하는 삶입니다.

무엇을 선포하느냐가 삶의 꼴을 결정합니다. 주님의 찬미를 선포하라 있는 입입니다. 주님이 얼마나 좋은지 맛보고 깨달았으면 주님을 선포해야 합니다. 진리를 나눌 때 비로소 기쁨은 배가되고 진리도 확실히 깨달아 알게 됩니다. 예수님의 초대에 응한 요한의 두 제자는 예수님께서 묵으시는 곳에서 그날 그분과 함께 묵습니다. 주님과의 결정적 만남이 얼마나 이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는지 그 반응을 보면 담박 들어납니다.

"우리는 메시아를 만났소.“

안드레아는 즉시 자기 형 시몬을 만나 주님을 알렸고, 예수님께 안내했습니다. 주님은 시몬을 눈여겨 보며 말씀하십니다.

"너는 요한의 아들 시몬이구나. 앞으로 너는 케파라고 불릴 것이다.“

주님과의 운명적 만남으로 자기를 발견한 두 제자와 시몬입니다. 주님을 만나야 참 나의 발견이요 참 나를 살 수 있습니다. 바로 여기 복음 선포의 절박성이 있습니다. 평생 살아도 주님을 모르기에 자기를 모르고 사는 사람도 부지기수이기 때문입니다. 이웃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은 주님뿐입니다. 주님이 없이는 아무리 '나는 누구인가?' 물어도 답은 나오지 않습니다. 


주님은  오늘 연중 제2주일, 우리에게 참 좋은 삶의 꼴을 지닌 참 사람이 되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길을 알려주셨습니다.

1.주님을 찾으십시오.

2.주님 안에 머무르십시오.

3.주님을 선포하십시오.

주님은 당신을 찾아 성체성사에 참여한 우리 모두에게 풍성한 축복을 내려주십니다.


"주님이 제게 상을 차려 주시니, 제 술잔 넘치도록 가득하옵니다."(시편23,5참조).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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