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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8.29.토요일 성 요한 세례자의 수난 기념일                                      예레1,17-19 마르6,17-29

 

 

 

삶과 죽음

-깨어 있어라!-

 

 

 

성 요한 세례자의 수난 기념일 아침 성무일도 찬미가도 참 깊고 아름다웠습니다. 성인의 삶을 그림처럼 보여줍니다. 새삼 가톨릭 교회의 깊고 아름다운 전통과 전례에 고마움을 느낍니다. 찬미가 1-2절만 인용합니다.

 

“드높은 공덕갖춘 행복한 이여/당신은 깨끗하기 눈과도 같고

죄라곤 모르옵는 능한 순교자/은거를 사랑하신 예언자시여

 

당신의 높은 성덕 우리게 입혀/굳은 맘 박힌돌을 없애주시어

거칠고 굽은 길을 평탄케 하여/우리를 지름길로 인도하소서”

 

요즘은 하루하루가 참 새롭고 소중하게 느껴집니다. 손주를 본 분들의 한결같은 말은 아기가 참 귀엽다는 것입니다. 자식을 키워 볼 때 못느꼈던 것을 손주를 보며 아기가 얼마나 예쁜지 깨닫는 다는 것입니다. 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아이를 보면 얼마나 신비롭고 신기한지 하늘에서 보내준 하느님의 선물임을 실감합니다. 생명의 빛으로 가득한 아기의 모습을 보면 눈에 보이는 생생한 희망이자 기쁨이요 구원임을 깨닫습니다.

 

오늘이 손주 돌잔치라 미사를 부탁한 분이 있어 손주 사진을 부탁했더니 즉시 귀여운 사진이 전송되었고 예수님 부활상과 더불어 답신을 보냈습니다.

 

“정말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참 귀엽고 사랑스럽고 똑똑해 보입니다. 이런 손주 여럿이면 좋겠어요. 예수님도 축하인사 드린답니다!”

 

마치 요즘 동요를 예뻐하는 제 마음이 손주를 통해 자녀들 키울 때 느끼지 못했던 예쁨을 깊이 새롭게 느끼는 분들과 닮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수십년전 체험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그윽하고 깊은 향기를 발하던 집무실의 동양란꽃이 계속될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순식간에 꽃들이 다 떨어졌습니다.

 

“아, 죽음이 있어 삶이 선물인줄 알겠다!”

 

죽음이 있어 생명이 얼마나 귀한 선물인지 깨닫습니다. 죽음이 있어 생명의 선물에 감사하며 하루하루 기쁘게 살아갑니다. 삶과 죽음은 참 다정한 친구처럼 생각됩니다. 생명의 하느님이십니다. 우리 믿는 이들에게는 생명안에 죽음이요 죽음 안에 생명이 아닙니다. 

 

삶과 죽음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깨어 있음’입니다. 깨어 있을 때 살아 있는 것이고 깨어 있지 않을 때 죽어 있는 것입니다. 참으로 깨어 있을 때 살아 있다 할 수 있습니다. 살아있다해도 깨어 있지 못하면 죽은 것과 별 차이가 없습니다. 그러니 살아 있다 하나 죽어 있는 삶을 사는 이들은 얼마나 많은지요. 얼마전 ‘오늘의 에디터스 초이스’에 뽑힌 기사가 생각납니다.

 

"종교나 언론이 정치·상업화되면 세상이 얼마나 극악해질 수 있는지 지난 3년이 웅변한다. 누가 되어도 자신들이 반대하면 전체를 파탄 내서라도 꼭 끌어내겠다는 광기는 자신들이 찬성하는 정권이 들어서면 형광등 수천 개의 아우라로 눈 녹듯 사라질 것이다. 언제까지 이럴 건가? 답답하지만 답이 없다.”

 

사람들이 광기에 휘둘리는 것도, 종교나 언론이 날로 정치, 상업화 되어 극악極惡해 지는 궁극의 원인도 깨어 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종파와 관계 없이 참 사람이 되는 데 깨어 있음의 훈련이, 깨어 있음의 일상화, 생활화가 절실한 시절입니다. 

 

깨어 있음은 빛입니다. 깨어 있음이 무지의 병을 치유합니다. 빛으로 깨어 있을 때 죄악의 유혹도 범접치 못합니다. 깨어 있음의 빛이 무지의 어둠을 몰아내기 때문입니다. 깨어 있음은 눈이 열리는 개안을 뜻합니다. 무지에 눈먼 사람들은 얼마나 많은지요. 결코 살아 있다 할 수 없습니다. 깨어 있을 때 비로소 깨끗한 마음의 순수와 열정에 깨달음의 지혜요 겸손과 온유입니다. 타락의 원죄 이전이 사람들이 이랬을 것입니다.

 

막연한 깨어 있음이 아닙니다. 얼마 못가 무지의 어둠에 사로잡힙니다. 주님은 생명입니다. 주님은 빛입니다. 생명과 빛의 주님을 중심으로, 주님께 희망을 두고 주님을 찾는 기쁨, 주님을 기다리는 기쁨으로 살아갈 때 비로소 한결같이 깨어 살 수 있습니다. 하여 끊임없는 기도를 강조하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오늘 말씀을 보면 이해도 확연해 집니다.

 

어둠 속의 빛을, 죽음 속의 생명을, 무지 속의 지혜를 상징하는 제1독서의 예레미야요 복음의 세례자 요한입니다. 둘다 고립무원, 사면초가의 현실입니다. 얼마나 외롭고 고독했을지 예언자의 숙명처럼 느껴집니다. 살아 있다 하여 다 살아 있는 것이 아니라 진짜 하느님 앞에 깨어 살아 있는 이들은 ‘진리와 정의의 사람’ 이 둘뿐입니다. 참으로 제자리에서 제정신으로 제대로 깨어 있는 이들은 이 둘뿐입니다.

 

“동생의 아내를 차지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하느님을 믿기에 진리와 정의에 바탕한 이런 용기있는 충언입니다. 헤로데, 헤로디아, 살로메, 영혼이 없는, 생각이 없는, 한마디로 '하느님 중심이 없는' 무지의 사람들입니다. 하느님 없는 무지의 인간이 얼마나 악해질 수 있는지 보여줍니다.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님과 일치의 여정에 항구할 때 비로소 무지에서 벗어나 참으로 깨어 있는 참 사람이 될 수 있음을 봅니다. 

 

참으로 하느님으로 영적 무장을 할 때 무지한 삶의 영적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습니다. 바로 예레미아 예언자에게 주시는 주님의 말씀이 오늘 영적전투를 앞둔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얼마나 하느님 중심의 온전한 삶에 충실한 예레미아 예언자인지 깨닫습니다.

 

“너는 허리를 동여매고 일어나, 내가 너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그들에게 말하여라. 너는 그들 앞에서 떨지 마라. 오늘 내가 너를 요새 성읍으로, 쇠기둥과 청동 벽으로 만들어 온 땅에 맞서게 하겠다. 그들은 너와 맞서 싸우겠지만 너를 당해 내지 못할 것이다. 내가 너를 구하려고 너와 함께 있기 때문이다.”

 

어제 세상살이가 사바세계 같다는 어느 자매의 말에 공감했습니다. 기후위기의 징후와 코로나19 사태로 인한 혼란한 현실이 때로 아수라장, 연옥도, 지옥도를 연상케합니다. 이럴수록 하느님 중심의 깨어 있는 삶이 얼마나 절대적인지 깨닫습니다. 중국의 저명한 소설가, 옌렌커의 말도 깊이 마음에 와닿습니다.

 

“회의와 책임, 이것이 지식인의 존엄이다. 속세에 살아도 세속적인 글쓰기는 하지 말자.”

 

참으로 하느님 중심의 삶에 항구하고 충실할 때 깨어 있는 존엄한 삶, 세상에 속화되지 않고 세상을 성화하는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의 삶임을 깨닫습니다. 세상의 부패를 막아주는 소금처럼, 세상 무지의 어둠을 몰아내는 빛처럼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새삼 세상의 소금이기는커녕 세상의 부패같은, 세상의 빛이기는커녕 세상의 어둠같은 종교는 아닌지 성찰하게 됩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깨어 세상의 소금으로, 세상의 빛으로 살게 하십니다.

 

“주 하느님, 당신은 저의 희망, 어릴 적부터 당신만을 믿었나이다. 저는 태중에서부터 당신께 의지했나이다. 어미 배속에서부터 당신은 저의 보호자시옵니다.”(시편71.5-6ㄱㄴ).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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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안젤로 2020.08.29 06:10
    깨어 있음은 빛입니다. 빛으로 깨어 있을 때 죄악의 유혹도 범접치 못합니다. 깨어 있음의 빛이 무지의 어둠을 몰아내기 때문입니다. 깨어 있음은 눈이 열리는 개안을 뜻합니다. 무지에 눈먼 사람들은 얼마나 많은지요. 결코 살아 있다 할 수 없습니다. 깨어 있을 때 비로소 깨끗한 마음의 순수와 열정에 깨달음의 지혜요 겸손과 온유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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