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10.17.목요일 안티오키아의 성 이냐시오 주교 순교자(35-110) 기념일

로마3,21-30ㄱ 루카11,47-54

 

 

 

회개와 겸손

-하느님 은총으로 구원받는다-

 

 

 

하루하루 살아갈수록 힘들다 합니다. 누구나 아름다운 삶에 아름다운 죽음을 소망할 것입니다. 곱게 물들어가기 시작한 가을의 단풍들, 황금빛으로 익어가며 고개 숙인 가을의 벼이삭들, 평화로운 일몰시 곱게 물들어가는 저녁노을 등 모두가 아름다운 노년과 죽음을 상징합니다.

 

어떻게 하면 나날이 한결같이 아름답게 살아갈수 있을까요? 하루하루 회개와 겸손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어제는 오늘이고 오늘은 내일이 됩니다. 오늘 회개하여 새롭게 살아야 어제의 반복이 되지 않을 수 있고 날마다 이런 오늘이 있어 아름다운 내일의 미래가 있는 것입니다. 

 

날마다의 어려움이나 시련들은 모두 회개를 통해 비움과 겸손의 계기로 삼는 것입니다. 이래야 참된 영적성장과 성숙에 아름다운 삶입니다. 사실 내가 잘 살아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은총으로 구원받습니다. 끊임없는 회개와 겸손을 통해 이런 구원의 은총을 깨닫습니다. 

 

오늘 루카복음과 제1독서 로마서가 참 좋은 대조를 이루며 깊은 묵상으로 이끕니다. 저는 루카복음의 바리사이들에게서 참 답답함을 느꼈습니다. 그대로 오늘의 부정적 인간현실을 보는 듯 했습니다. 

 

반면 제1독서 바오로 사도의 로마서를 읽으며 참 자유로움을, 해방감을 느꼈습니다. 제 자신 회개했습니다. 너무 치열히 살려고 노력하다 보면 하느님의 은총을 잊어 각박해질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과 독서를 읽으며 문득 떠오른 바리사이와 세리의 기도입니다. 

 

바리사이는 꼿꼿이 서서 혼잣말로 이렇게 기도합니다. 

“오, 하느님! 제가 다른 사람들, 강도짓을 하는 자나 불의를 저지르는 자나 간음을 하는 자와 같지 않고 저 세리와도 같지 않으니,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저는 일주일에 두 번 단식하고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바칩니다.”

 

하느님이 들어설 여지가 공간이 없습니다. 참으로 모범적 신자의 모습입니다만 참으로 답답하게 느껴집니다. 이런 모습에서 바리사이나 율법학자는 오십보 백보 별 차이가 없어 보입니다. 참으로 자기를 모르는 무지의 모습이며 전혀 회개나 겸손이 없는 모습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의 불행선언은 바로 이런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를 향합니다.

 

“불행하여라! 바로 너희 조상들이 죽인 예언자들의 무덤을 너희가 만들기 때문이다.”

 

예언자들의 무덤을 만들고 기념하면서 다시 예언자들을 죽이며 악행의 역사를 반복하는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과 그를 추종하는 무리들입니다. 참으로 회개하여 끊어버리지 않으면 반복되는 악순환의 역사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현실에서도 그대로 입증하는 진리입니다. 

 

예전에 조선시대 500년 역사를 압축한 20권의 만화로 된 실록을 본 느낌으로 한 권이면 충분하다 싶었습니다. 계속 반복되는 당쟁과 숙청, 살육의 ‘보복의 역사’였기 때문입니다. 해방후 76년이 되었어도 좌우의 첨예한 갈등과 분열과 투쟁은 계속 반복되는 ‘악순환의 역사’입니다. 언제 이런 악순환의 질곡에서 벗어날 수 있겠는지요! 답은 회개와 겸손뿐입니다.

 

주님은 오늘 복음의 결론으로 이 세대가 책임을 져야 한다고 못박듯이 말씀하십니다. 그대로 이 세대가 상징하는 바, 반복되는 악순환의 역사를 겪고 있는 모든 세대입니다.

 

“그러니 세상 창조 이래 쏟아진 모든 예언자의 피에 대한 책임을 이 세대가 져야 할 것이다. 아벨의 피부터, 제단과 성소 사이에서 죽어 간 즈카르야의 피에 이르기까지 그렇게 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 세대가 그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바로 오늘 이 세대에 속하는 우리 모두의 회개를 촉구하는 말씀입니다. 더 이상 피흘리는 악순환의 역사를 끊어버리라는 것입니다. 이어 지식의 열쇠를 치워버리고, 자신들도 들어가지 않고 또 들어가려는 이들도 막아 버리는 율법교사들에게도 가차없이 불행을 선언합니다. 이 또한 남이 잘 되는 것을 못보는 우리의 못된 심보의 부정적 측면으로 역시 우리의 회개를 촉구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참 사악합니다. 회개는 커녕 예수님께서 그 집을 떠나시자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독한 앙심을 품고 많은 질문으로 예수님을 몰아대기 시작합니다. 이런 비숫한 양상을, 참으로 잔혹하고 잔인한 모습을 우리도 오늘의 현실에서도 눈뜨고 보고 있지 않습니까? 회개가 쉬운 듯 해도 얼마나 가깝고도 먼지, 그래서 회개의 은총이라 합니다. 정말 주님께 청할 것은 회개의 은총, 겸손의 은총입니다.

 

복음의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통해 바리사의 기도를 연상했다면 오늘 제1독서 로마서의 바오로 사도를 통해서는 세리의 기도를 연상했습니다. 꼿꼿이 서서 독백의 기도를 바치는 바리사이들과는 대조적으로 세리는 멀찍이 서서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 엄두도 내지 못하고 가슴을 치며 말합니다.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기소서.”

 

얼마전 열명의 나병환자들의 예수님을 향한 부르짖음도 생각납니다. 

 

“예수님, 스승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참으로 주님을 만날 때 회개요, 회개에서 울어난 겸손한 기도입니다. 우리가 바칠 마지막 유일한 기도도 이 자비송 하나일 것입니다. 예수님의 결정적 결론 말씀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 바리사이가 아니라 이 세리가 의롭게 되어 집으로 돌아갔다.”

 

바리사이처럼 잘 살아서 의롭게 되는 구원이 아니라 세리처럼 회개하여 겸손할 때 의롭게 되어 구원입니다. 우리가 잘 살아서, 죄가 없어서 구원이 아니라 회개하여 겸손할 때 하느님 은총으로 구원을 받습니다. 바오로 사도가 로마서에서 이런 진리를 명쾌히 밝힙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지어 하느님의 영광을 잃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이루어진 속량을 통하여 그분의 은총으로 거저 의롭게 됩니다.”

 

우리가 잘 나서 구원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통하여 오는 하느님의 의로움으로 구원 받는 우리들이고 여기에는 아무 차별이 없습니다. 잘 살고 못살고는 사람 생각이고 도토리 키재기일 수 있습니다. 

 

못 살아도 참으로 회개를 통해 겸손해 질 때 하느님의 의로움으로, 은총으로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 자랑할 것이 전혀 없습니다. 행위의 법이 아니라 믿음의 법으로 의롭게 된 우리들입니다. 회개를 통한 겸손한 믿음입니다. 

 

참으로 이렇게 하느님의 의로움의 은총으로 구원을 체험한 이들은 세리처럼 겸손할 수 뿐이 없습니다. 기도를 바친다면 단 두가지, 자비송과 감사와 찬미의 기도뿐일 것입니다.

 

“주님! 죄인인 저희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주님! 세세영원히 감사와 찬미받으소서.”

 

진정한 수행은 회개와 겸손으로 이끄는 수행입니다. 참으로 수행에 치열할수록 회개를 통한 겸손도 더욱 깊어질 것입니다. 저절로 자비송과 더불어 감사와 찬미 기도가 그 삶의 전부가 될 것입니다. 참으로 아름다운 노년을, 죽음을 맞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문득 제 짧은 자작 애송시가 생각납니다.

 

“나무에게 하늘은 가도가도 멀기만 하다

아예 고요한 호수가 되어 하늘을 담자.”

 

하늘이신 하느님만 추구하는 나무같은 수행자로 살다보면 바리사이같은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자주 겸손히 멈춰 고요한 관상의 호수, 사랑의 호수, 은총의 호수가 되어 하늘이신 주님을 모시고 살 때, 세리처럼 텅 빈 충만의 겸손한 사람이, 참으로 깊고 아름다운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회개와 겸손의 복된 사람이 되어 살게 하십니다. 끝으로 오늘 기념하는 안티오키아의 성 이냐시오 주교 순교자의 서신중 마지막 유언같은 감동적인 말씀을 나눕니다. 이런 순교성인의 열렬한 하느님 사랑이 우리를 회개와 더불어 겸손으로 이끌어 줍니다.

 

“나의 간청입니다. 불필요한 호의를 나에게 베풀지 마십시오. 나를 맹수의 먹이가 되게 버려 두십시오. 나는 그것을 통해서 하느님께 갈 수 있는 것입니다. 나는 하느님의 밀알입니다. 나는 맹수의 이에 갈려서 그리스도의 깨끗한 빵이 될 것입니다.” 아멘.

 

 

 

 

 

 

  • ?
    고안젤로 2019.10.17 12:53
    사랑하는 주님, 주님 믿음으로 회개와 겸손으로
    세상을 만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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