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소聖召의 신비 -주님은 원하시는 사람을 부르신다-2021.1.22.연중 제22주간 금요일

by 프란치스코 posted Jan 22,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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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22.연중 제22주간 금요일                                                         히브8,6-13 마르3,13-19

 

 

 

성소聖召의 신비

-주님은 원하시는 사람을 부르신다-

 

 

 

오늘 복음은 주님께서 열두 사도를 뽑으시는 내용입니다. 그림처럼 묘사되는 아름다운 장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에 올라가신 다음, 당신께서 원하시는 이들을 가까이 부르셨다.’는 서두의 대목도 깊은 묵상 자료가 됩니다. 여기서 택한 강론 제목 ‘성소의 신비-주님은 원하시는 사람을 부르신다-’입니다.

 

마르코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군중을 가르치는 것은 호숫가에서 하시고, 기도하시거나 당신 제자들에게 중요한 일을 하실 때에는 군중에게서 떨어져 산으로 오르십니다. 바로 예수님의 삶의 자리는 산과 호수 사이임을 봅니다. 참 상징성이 깊습니다. 

 

산이 참 많은 나라 한국이요 산이 들어가는 지명도 많습니다. 제 경우만 해도 예산禮山의 봉산鳳山이 고향이고 중고등 학교는 덕산德山에서 나왔습니다. 예禮와 덕德의 고향이라 해서 예산, 덕산입니다. 추사 김정희의 고향도 예산입니다. 얼마전 감동깊게 읽은 추사 김정희 평전이었습니다. 책 표지의 글귀도 잊지 못합니다.

 

‘추사 김정희;산은 높고 바다는 깊네’ 이어 한자 산숭해심山崇海深이란 말마디가 참 인상적이었습니다. 산숭해심山崇海深, 산은 높고 바다는 깊네. 바로 추사 김정희의 인물됨됨이와 동시에 저는 복음의 예수님의 모습같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특히 명당은 배산임수背山臨水라 산을 배경으로 하여 강이나 하천, 바다를 볼 수 있는 곳을 꼽습니다. 

 

그러고 보니 산의 기도처와 호숫가의 가르침터를 지닌 예수님은 명당에 자리잡고 있음을 봅니다. 더불어 공자의 ‘지자요수 인자요산智者樂水, 仁者樂山’ 즉 ‘지혜로운 자는 물을 좋아하고, 어진 자는 산을 좋아한다’는 말마디도 생각납니다. 그러니 예수님은 산과 호수를 떠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새삼 요셉수도원이 불암산을 배경으로 하고 있음은 주님의 큰 천복임을 깨닫습니다. 무엇보다 늘 바라볼 수 있는 대상이 불암산이기 때문입니다. 앞에 호수나 바다는 없어도 저는 푸른 하늘을 바다처럼, 흰구름을 바다의 섬처럼 생각하며 바라보기도 합니다. ‘하늘과 산’에 이어 ‘하늘과 강’의 비유 역시 제가 좋아합니다. ‘밖으로는 정주의 산, 안으로는 하느님 바다 향해 끊임없이 흐르는 강’처럼 내적여정의 삶을 살아가는 분도 수도자들이기 때문입니다. 2014년 안식년도 대부분 남산南山아래 장충동 수도원에서 보냈으니 산과는 떨어질 수 없는 팔자인가 봅니다. 작년 애송하던 '꽃과 산'이란  자작 애송시가 생각납니다.

 

“꽃이 꽃을 가져오다니요/그냥 오세요/당신은 꽃보다 더 예뻐요.

산이 산을 가다니요/그냥 있으세요/당신은 산보다 더 좋은 산이예요.”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당신이 원하시는 열두사도를 뽑으십니다. 사도들이 예수님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사도들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성소의 신비요 우리의 경우도 똑같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택한 것이 아니라 주님이 우리를 택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아무도 성소를 판단할 수도 없고 성소의 호오나 우열을 비교할 수도 없음을 봅니다. 다 각자 하느님만이 아시는 고유의 성소요, 성소의 신비이기 때문입니다.

 

열두사도의 면면이 참 다양하기가 흡사 하나하나가 고유의 산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유유상종, 예수님은 자기에 맞는 비슷한 사람을 뽑은 것이 아니라 선입견이나 편견없이 하느님의 안목으로 있는 그대로의 고유한 사람을 뽑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예수님의 시야와 통찰은 얼마나 높고 깊은지 말그대로 하느님을 닮아 산숭해심입니다.

 

문득 어제 읽은 천년고찰 실상사에 관한 기사가 생각납니다. 산속에 있는 절이 아니라 유일하게 마을 한복판에 자리잡은 절입니다. 혹자는 실상사를 두고 “어디를 가든 내가 풍경의 중심이 되는 땅”이라 하니 흡사 주님 안에 있는 성소자들인 우리를 상징하는 말마디처럼 들립니다. 주님 안에 있을 때 우리는 어디에 있든 그 현실에 중심이 된다는 뜻으로, ‘수처작주 입처개진(隨處作主 立處皆眞)’ “머무르는 곳마다 주인이 돼라. 지금 있는 그곳이 진리의 자리이다”라는 말마디와도 일맥상통합니다.

 

실상사 종무실 안내판의 글씨 내용도 참 깊고 아름다웠습니다. “미쳐 몰랐네. 그대가 나임을! 홀로도 빛나고 함께도 빛나라!”. 또 주로 산을 촬영하는 작가의 말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산을 내버려 두고 건들이지 말라”, 그대로 산과 같은 형제들과의 평화로운 관계를 상징하는 말마디처럼 생각되었습니다. “서로 내버려두고 건들이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열두 사도에 대한 복음 말씀도 사도들은 물론 우리의 신원을 분명히 해줍니다. ‘그들을 당신과 함께 지내게 하시고, 그들을 파견하시어 복음을 선포하게 하시며, 마귀들을 쫓아내는 권한을 가지게 하려는 것이다.’ 우선 제자로서 주님과 함께 머물러 배우는 관상의 시간에 이어 파견되어 사도로 활동하는, 안으로는 관상의 제자, 밖으로는 예수님의 활동을 위임받는 활동의 사도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로 주님과 함께 관상의 제자들로 미사참여후 활동의 사도들로 삶의 제자리로 파견되는 우리들입니다. 사도의 활동에 앞서 제자의 관상이 우선적임을 깨닫게 됩니다.

 

오늘 제1독서 히브리서의 새계약의 대사제 예수님은 복음의 예수님보다 더 심원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대사제 파스카의 예수님을 통해 우리는 열두 사도보다 더 잘 배워 깨달아 깊이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레미야 예언자가 전하는 네가지 새계약의 특징은 그대로 대사제 예수님을 통해 실현됨을 봅니다.

 

1.새계약은 외적인 법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과 정신에 새겨지는 내적인 법을 뜻한다.

2.새계약은 옛계약과 달리 하느님과 하느님의 백성 양자를 완전히 일치시켜 ‘하느님의 백성’과 ‘백성들의 하느님이 되게 한다.

3.새계약은 백성들이 하느님께 가까이 가 그분의 뜻을 직접 알 수 있게 한다. 하느님께서 당신 법을 우리들 마음에 새겨 주시기 때문이다.

4.새계약의 특징은 사죄와 용서에 있다. 하느님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고 죄를 사해 주신다. 죄를 기억하지 않는다는 말씀은 죄를 용서한다는 말씀이다.

 

바로 예레미야 예언자의 새계약은 그대로 대사제이신 파스카의 예수님의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실현됨을 봅니다. 주님은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우리를 새롭게 부르시고 당신 관상의 제자로, 활동의 사도로 각자 삶의 자리에서 중심이 되어 살게 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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