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된 예언자의 삶 -하느님 중심의 신망애(信望愛)의 삶-2021.7.4.연중 제14주일

by 프란치스코 posted Jul 04,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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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7.4.연중 제14주일                                                        에제2,2-5 2코린12,7ㄴ-10 마르6,1-6

 

 

 

참된 예언자의 삶

-하느님 중심의 신망애(信望愛)의 삶-

 

 

 

참 늦게서야 감명깊게 읽었습니다. 참으로 부끄럽게하는, 분발케하는 사람이, 책이 참으로 좋은 사람이요 책입니다. 성경책이, 예수님이 바로 그런분이지만 저는 늦게서야 그런 사람과 책을 만났습니다. 체 게라바와 그의 평전입니다. 715쪽에 달하는 평전을 6.22일부터 짬짬이 읽다가 7.3일 성 토마스 사도 축일에야 독료했습니다. 저는 중요하고 감동적인 구절은 밑줄치며 읽는 습관이 있는데 참 많은 쪽수가 빨간 줄로 가득했습니다. 시간되면 잠언같은 주옥같은 구절들은 기록해두려 합니다.

 

결코 안주하지 않았던 육신의 모두를 극복한 영혼의 사람, 영혼의 순례자였습니다. 39년의 짧은 인생을 참 치열하게 혁명가로 살다가, 주님의 전사戰士로 살다가 전사戰死한 인물이었습니다. 전사戰死해야 비로소 전사戰士라 할 수 있습니다. 끊임없는 기도와 회개로 내적혁명가의 삶을 살려는 저는 이미 그보다 33년을 더 살고 있으니 참 부끄럽게 하고 분발케 합니다. 

 

참으로 현실 한복판에서 별같은 이상을 살았던 현실주의적 이상주의자였습니다. 그가 늘 썼던 별달린 베레모가 상징하는 그의 별같은 삶입니다. “우리 모두 리얼리스트가 되자. 그러나 우리의 가슴속에 불가능한 꿈을 가지자!” 그의 삶을 요약한 말입니다. 불가능한 꿈, 영원한 꿈 하느님을 품고 살라는 말씀으로 들립니다. 바로 예수님이 그러하셨습니다. 길다 싶지만 여러 생생한 증언들을 인용하여 나누고 싶습니다.

 

-‘로저 실러 신부는 라이게라의 조촐한 성당에서 체 게바라를 위한 미사를 올린다. 작은 성당은 미사를 드리러 온 사람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신자들은 고인을 기리며 경건하게 촛불을 든다. 밤이 깊어가고 신부는 말을 내 뱉는다. “이 죄악은 절대로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 죄를 지은 자들은 반드시 벌을 받을 것이다.”-

 

-‘마리아 무뇨스 수녀는 시신이 안치된 영안실의 분위기를 전한다. 이상한 침묵이 감돌고 있었다. 아무도 입을 열지 못했다. 그가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생텍쥐페리의 <어린왕자>에서 말하는 방식대로 하자면 ‘내가 죽은 것처럼 보일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사실이 아닐 것이다.’라고 표현할 수 있다. 마치 그에게 다시 생명을 불어넣기라도 하려는 듯이 이상하게 푸른 색으로 변한 그의 눈은 다시 뜨여 있었다.‘-

 

-“1967년 10월9일은 체 게바라의 실제적인 삶이 끝나고 사후의 또 다른 삶이 시작된 날이다. 그는 무척이나 대담한 사람이었다. 위험을 두려워하지 않았으므로 가장 어렵고 위험한 순간에 가장 어렵고 위험한 일들을 해냈다. 그는 순결하고, 용감하고, 모든 것에 초연하고, 욕심이 없는, 인류 역사상 가장 훌륭한 인간이었다. 조국이 아니면 죽음을! 영원한 전진!”-

 

-‘체 게바라는 누구나 만나자 마자 친근감을 느끼게 되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의 사람됨, 자연스러움, 호의적인 태도, 인간성, 독창적이나 기발한 면 때문에 누구나 애정을 갖게 된다. 체 게바라야 말로 인간다움의 전형이다.’-

 

-‘나는 체 게바라와 근 10년을 같이 지냈다. 그는 우리를 비추어볼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거울이었다. 그를 모범으로 삼았기 때문에 확고부동한 노선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침착성을 타고 난 사람이었다. 그의 일생은 값을 정할 수 없을 만큼 가치가 있다. 그의 사상은 러시아와 미국이 달 착륙에 성공하기 전에 이미 우주의 전체를 포함한 넓이를 가지고 있었다 말하고 싶다.’-

 

실존주의 철학자 사르트르는 체 게바라를 ‘그 시대의 가장 완전한 인간’이라고 평가합니다. 흡사 그의 삶이 참된 예언자의 삶처럼 느껴집니다. 어떻게 하면 믿는 이들 누구나 불림받은 하느님 중심의 신망애의 삶을, 참된 예언자의 삶을 살 수 있을까요? 바로 복음의 예수님이, 제1독서의 에제키엘이, 제2독서의 바오로 사도가 그 생생한 모범입니다. 또한 영감의 원천이 되는 체 게바라의 삶도 부단한 자극이, 도전이 됩니다.

 

첫째, 한결같은 믿음의 삶입니다.

일희일비하지 않은 시종여일의 삶입니다. 어떤 환경에서든 늘 새롭고 놀랍고 좋은 삶입니다. 끊임없이 맑게 흐르는 내적여정의 삶입니다. 바로 우리 정주의 삶이 목표하는 삶입니다. 예수님의 삶이 바로 그러했습니다. 고향 사람들의 반응에 실망했음을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무지의 편견, 질투에 눈이 먼 고향사람들은 그대로 우리의 부정적 보편적 모습이기도 합니다.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친척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

 

제가 화들짝 놀라며 옷깃을 스민 대목이 복음의 마지막 말마디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믿지 않는 것에 놀라셨다. 예수님께서는 여러 마을을 두루 돌아다니며 가르치셨다.’(마르6,6). 넘어지면 곧장 일어나 다시 제자리에서 새롭게 시작하는,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의 자세가 몸에 밴 예수님이십니다. 그대로 믿음의 힘을 반영합니다. 백절불굴(百折不屈)의 한결같은 믿음입니다. 체 게바라의 말도 생각이 납니다.

 

“인간은 태양을 향해 당당하게 가슴을 펼 수 있어야 한다. 태양은 인간을 불타오르게 하고 인간의 존엄성을 드러내 준다. 고개를 숙인다면 그는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잃게 되는 것이다.”

 

하느님 태양을 품고 늘 하느님의 자녀답게 살라는 말이겠습니다. 바로 시종여일(始終如一), 초지일관(初志一貫), 종신불퇴(終身不退), 하느님 중심에 자리 잡은 한결같은 정주(定住)의 삶, 믿음의 삶입니다. 

 

둘째, 전화위복(轉禍爲福), 우공이산(愚公移山), 우보천리(牛步千里), 호시우행(虎視牛行)의 자세로 사는 것입니다. 믿는 이들에게 절망은 없습니다. 하느님 사전에 없는 단어가 절망입니다. 정말 대죄는 희망을 잃은 절망입니다. 믿음의 힘에 이어 희망의 힘입니다. 넘어지는 게 죄가 아니라 절망으로 자포자기하여 일어나 다시 새롭게 시작하지 않는 것이 대죄입니다. 영적전쟁은 죽어야 끝납니다. 

 

그러니 날마다 희망을, 꿈을, 비전을 새롭게 하여 다시 시작하는 것입니다. 제가 여기 33년을 불암산 기슭 요셉 수도원에 정주했어도 결코 실망, 원망, 절망의 삼망에 빠진 적이 없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입니다. 하느님 꿈을, 희망을 지닌 자들은 결코 삼망의 유혹에 빠지지 않습니다. 바로 제2독서의 바오로가 그 빛나는 모범입니다.

 

“너는 내 은총을 넉넉히 받았다. 나의 힘은 약한 데에서 완전히 드러난다.”

 

파스카의 예수님께서 바오로에게 하신 말씀, 우리 모두에게 주시는 참 위로와 격려가 되는 말씀입니다. 역시 주님의 말씀에 감격한 바오로의 깨달음의 고백을 내 고백으로 삼으시기 바랍니다. 

 

“나는 그리스도의 힘이 나에게 머무를 수 있도록 더없이 기쁘게 나의 약점을 자랑하렵니다. 나는 그리스도를 위해서라면 약함도 모욕도 재난도 박해도 역경도 달갑게 여깁니다. 내가 약할 때에 오히려 강하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주님께 희망을 둘 때 약함은 강함으로 변합니다. 바로 약함의 그 자리에서 샘솟는 내적 힘입니다. 그러니 궁즉통(窮則通), 절망은 없다는 결론입니다. 체 게바라 역시 고질병과 같은 천식을 전화위복의 계기로 삼았습니다.

 

‘그의 삶은 한 올의 흐트러짐도 없었다. 그의 내면에 있는 부드러움과 강함은 잘 섞여서 너그러움이라는 하나의 돌이 된다. 악마처럼 밤낮으로 그의 가슴을 휘젓고 다니던 천식은 오히려 고귀한 삶을 살겠다는 의지로 바뀌었다.’

 

하느님 꿈을, 하느님 희망을 지닌 사람들은 결코 그 무엇에도 무너지지 않는 천하무적(天下無敵)의 사람이 됩니다. 모든 불리한 환경이나 조건들을 전화위복의 계기로 삼습니다. 바오로 사도가, 체 게바라가 빛나는 모범입니다.

 

셋째, 진실한 삶입니다.

사랑과 진실은 함께 갑니다. 결코 타협이나 거짓말은 있을 수 없습니다. 비겁하게 피하지 않고 담대하게 진실로 직면합니다. 사랑의 힘입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사랑할수록 진실하고 순수한, 겸손한 삶입니다. 예언자들의 삶이 그러했습니다. 오늘 제1독서 에제키엘이 그 빛나는 모범입니다. 주님의 영이, 진실의 영이 에제키엘을 일으키셨을 때 예언자는 자신을 파견하시는 주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사람의 아들아. 내가 이스라엘 자손들, 나를 반역해 온 저 반역의 민족에게 너를 보낸다. 그들은 저희 조상들처럼 오늘 나를 반역해 왔다. 얼굴이 뻔뻔하고 마음이 완고한 저 자손들에게 내가 너를 보낸다.”

 

우리가 파견되는 삶의 자리에서 무지에 눈멀어 굳어지고 완고하여 닫힌 무수한 사람들을 만날 것입니다. 좌절하지 말고 진실로, 진리로 직면하라는 것입니다. 참으로 주님을 사랑할 때 이런 힘을 주십니다. 주님의 힘은 바로 사랑의 힘, 진실의 힘입니다. 진실만이 당당합니다. 체 게바라의 삶이 그러했습니다. 체 게바라의 아버지의 증언입니다.

 

“에르네스토(체 게바라)는 진실에 열광적이었습니다. 진실은 그의 환상이었지요. 전투할 때는 냉정했고, 혁명과 관련된 모든 일에서는 굽힐 줄 몰랐던 만큼 그 아이는 더할 나위 없이 부드럽고 유머가 넘치는 아이였지요.”

 

흡사 체 게바라가 예수님의 아우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삶의 방식은 달랐지만 너무 공통점이 많은 친형제 같습니다. 지상에 잠시 파견된 어린왕자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참된 예언자들의 삶을, 하느님 중심의 신망애의 삶을 살아가는 모든 이들이 어린왕자들입니다. 하느님 꿈을, 별을 지니고 살아가는 현실주의적 이상주의자들이 진정 내적 혁명의 전사들이자 영적 어린왕자들입니다. 예수님이, 에제키엘이, 바오로가, 무수한 성인들이, 체 게바라가 그런 인물들입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영적 혁명의 전사가 되어, 영적 어린왕자가 되어 이렇게 현실주의적 이상주의자들로 살도록 힘을 북돋아 주십니다. 

 

“저희는 주 하느님을 우러러보며, 당신 자비만을 바라나이다.”(시편123,2ㄷㄹ).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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