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자유롭고 행복한 삶 -신망애信望愛의 삶- 2021.1.19.연중 제2주간 화요일 ​​​​​​​

by 프란치스코 posted Jan 19,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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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19.연중 제2주간 화요일                                                          히브6,10-20 마르2,23-28

 

 

 

참 자유롭고 행복한 삶

-신망애信望愛의 삶-

 

 

 

누구나 원하는 바 참 자유롭고 행복한 삶입니다. 누가 과연 참으로 자유롭고 행복한 사람이겠습니까? 신망애信望愛 즉 믿음, 희망, 사랑의 사람입니다. 진정한 영적 성장은 신망애의 성장입니다. 최고의 보물이, 보약이 신망애 향주삼덕입니다. 육신은 비록 세월 흘러 나이들어 노쇠해가도 신망애의 영적성장은 죽는 그날까지 계속되어야 할 것입니다.

 

자주 인용했던 바 불교의 사찰에서 두 자산은 노승老僧과 노목老木이란 말이 생각납니다. 그대로 이 둘은 절의 산 역사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절이나 수도원을 찾을 때도 우선 확인하는 것이 노수도승과 노목입니다. 예전 수도원 초창기 두 노수사님(빌립보, 마인라도)을 함께 파견한 까닭에 대한 아빠스님 말씀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젊은 수도자들만 있으면 고아원 같아 노수도자도 함께 보낸다!”

 

사실 잘 성장한 노선배는 보고 배울 스승이기도 합니다. 무엇보다 보고 배울 것은 믿음, 희망, 사랑의 신망애 향주삼덕입니다. 며칠전 작년에 죽은 노목 소나무 일곱을 베어 냈습니다. 거의 100년 수령에 육박했던 나무들의 생애가 흡사 사람들의 생애를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루하루 자라서 거목이 되는 나무들처럼 사람도 그러하다는 것입니다. 사람처럼 수령이 있어 수명을 다하면 나무 역시 죽습니다. 

 

나무의 성장이 상징하는바 우리의 영적성장입니다. 영적성장이 없는 삶은 무의미합니다. 바로 신망애의 영적성장입니다. 하느님을 향한 향주삼덕 이전에 우리를 향한 주님의 신망애, 향인삼덕을 말하고 싶습니다.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끝없는 기대, 즉 하느님의 신뢰와 믿음, 사랑입니다. 참으로 포기하지 않으시고 끝까지 우리를 신뢰하고 희망하시고 사랑하시는 하느님이라는 것이며 이를 깨달을 때 끊임없이 샘솟는 힘입니다.

 

이것은 인간관계에서도 그대로 입증됩니다. 사람은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누구나 자기를 신뢰하고 희망하고 사랑하는 사람을 압니다. 참으로 신뢰받고 희망의 대상이 되고 사랑받고 있음을 느낄 때 참으로 높은 자존감에 이웃도 믿고 희망하고 사랑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하느님의 신뢰를, 희망을, 사랑을 받고 있으면 더욱 하느님을 신뢰하고 희망하고 사랑할 것이며, 이것이 진정 살 힘을 줍니다. 

 

수도원의 일출 장면이 참 장관입니다. 제가 가장 많이 찍는 카톡 사진중 하나가 일출장면입니다. 바로 날마다 새롭게 떠오르는 찬란한 태양이 바로 우리 인간에 대한 주님의 한결같은 믿음, 희망, 사랑의 표현입니다. 끝까지 우리에 대한 신뢰와 희망, 사랑을 포기하지 않는 하느님이십니다. 참으로 이런 주님을 깨달을 때 한결같은 성소도 가능합니다.

 

바로 이런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신뢰를, 희망을, 사랑을 깨달았던 대표적 인물이 오늘 말씀에 나오는 예수님과 다윗, 아브라함입니다. 누구보다 하느님의 신뢰와 희망과 사랑을 한몸에 받고 있었기에 저리도 당당하고 자유롭고 행복할 수 있었던 예수님이셨습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과 바리사이의 비유가 아니라 예수님과 다윗의 비유라 함이 맞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다윗에 견주어 말합니다.

 

“다윗과 그 일행이 먹을 것이 없어 배가 고팠을 때, 다윗에 어떻게 하였는지 너희는 읽어본적이 없느냐? 에브야타르 대사제 때에 그가 하느님의 집에 들어가, 사제가 아니면 먹어서는 안 되는 제사 빵을 먹고 함께 있는 이들에게도 주지 않았느냐?”

 

바로 사무엘 상권21장에 나오는 다윗의 예화입니다. 바로 이런 다윗과 똑같은 절대적 자유를 누리는 예수님 자신이라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예수님과 다윗의 놀랍고 과감한 자유로운 행위는 하느님께서 그들을 신뢰하고 있다는 그들의 신뢰감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자신을 신뢰하고 희망하고 사랑하고 있음을 확신하기에 저리도 자신감 있는 자유로운 행위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렇게 하느님께 신뢰받고 희망받고 사랑받고 있음을 느낄수록 하느님을 신뢰하고 희망하고 사랑할 수 뿐이 없기에 참으로 자유롭고 행복할 수 뿐이 없습니다. 바로 이런 하느님의 기대를 한몸에 받고 있음을 확신했기에 예수님은 이처럼 단호하게, 자유롭게 감히 말씀하실 수 있었습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

 

절대적 사랑의 법에 안식일법을 비롯한 모든 법은 상대화됩니다. 참으로 하느님의 신뢰와 희망과 사랑을 한몸에 받고 있음을 확신했고 누구보다 하느님 사랑의 마음에 정통했기에 거침없이, 주저함 없이 이런 말씀을 하실 수 있었음을 봅니다. 새삼 하느님과 사랑으로 하나된 예수님 자신이 모든 분별의 잣대임을 깨닫습니다.

 

예수님과 다윗에 이어 히브리서에 나오는 아브라합이 또 신망애의 모범입니다. 하느님께 전폭적 신뢰와 희망, 사랑을 받았던, 신망애의 사람, 아브라함처럼 되라는 우리 모두를 향한 히브리서 저자의 촉구입니다.

 

“여러분 각자가 희망이 실현되도록 끝까지 같은 열성을 보여 주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리하여 게으른 사람이 되지 말고, 약속된 것을 믿음과 인내로 상속받는 이들을 본받는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아브라함은 끈기 있게 기다린 끝에 약속된 것을 받았습니다.---하여 하느님께서는 당신께 몸을 피한 우리가 앞에 놓인 희망을 굳게 붙잡도록 힘찬 격려를 받게 하셨습니다.”

 

참으로 아브라함처럼, 예수님처럼, 다윗처럼, 한결같이 끝까지 하느님을 믿고 희망하고 사랑할 때, 또 하느님께 깊은 신뢰와 희망, 사랑을 받고 있음을 느낄 때 이런 항구한 믿음과 인내에 희망입니다. 이어지는 히브리서 말씀도 참으로 고무적입니다. 

 

“이 희망은 우리에게 영혼의 닻과 같아, 안전하고 견고하며 또 저 휘장 안에 까지 들어가게 해줍니다. 예수님께서는 멜키체덱과 같은 영원한 대사제가 되시어, 우리를 위하여 선구자로 그곳에 들어가셨습니다.”

 

영혼의 닻인 희망입니다. 영혼의 닻인 희망이 없는 삶이라면 평생 항해 인생, 얼마나 암담하겠는지요! 영혼의 닻인 희망이 없다는 것은 방향이 없다는 것입니다. 희망없는 삶은 그대로 방향없는 삶이니 이보다 큰 불행도 재앙도 없습니다. 하여 아브라함처럼, 다윗처럼, 대사제 예수님처럼, 하느님께 희망을 두라는, 하느님께 영혼의 닻을 내리라는 것입니다. 

 

하느님께 영혼의 닻인 희망을 내릴 때 안전 인생 항해입니다. 영혼의 닻인 희망을 잃어 표류하고 조난당한 영혼들은 얼마나 많은지요! 참으로 중요한 것이 우리 향한 주님의 신뢰와 희망, 사랑을 깨닫는 것이며 영혼의 닻인 희망을 주님께 깊이 뿌리내리는 것입니다. 오늘 화답송 후렴이 강론을 요약합니다.

 

“주님은 언제나 당신 계약을 기억하신다.”

 

바꿔말해 주님은 언제나 우리를 신뢰하시고 희망하시고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언제나! 끝까지! 이런 주님의 우리 향항 믿음과 희망과 사랑의 기대에 응답해 우리 또한 언제나 끝까지 주님을 믿고 희망하고 사랑해야 할 것입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는 우리 향한 주님의 한결같은 신망애의 표현이자, 동시에 주님 향한 우리의 한결같은 신망애의 표현입니다. 우리 모두 희망이란 영혼의 닻을 주님께 깊이 뿌리내리는 은총의 미사시간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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