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향기-우리는 진정 살아있는가?-2015.5.3. 부활 제3주일(생명 주일)

by 프란치스코 posted May 03,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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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5.3. 부활 제3주일(생명 주일)                                                                                      사도9,26-31 1요한3,18-24 요한15,1-8


                                                                                        생명의 향기

                                                                            -우리는 진정 살아있는가?-


오늘 강론 제목은 '생명의 향기'입니다. '생명의 향기'란 뜻도 어감도 참 좋아 우리에게 위로와 평화를 줍니다. 원래 제목은 '우리는 진정 살아있는가?'로 생각했는데 새벽 수도원 숙소의 문을 열고 나서며 향기 가득한 공기를 들이쉬는 순간 떠오른 제목입니다. 생명의 향기는 바로 하느님의 향기요, 부활하신 주님의 향기, 자연의 향기, 존재의 향기입니다. 존재의 깊이에서 발산하는 생명의 향기입니다. 이런 생명의 향기 가득한 성모성월 은총의 달 5월입니다. 우리 모두 생명의 향기를 회복해야 할 절호의 시기가 생명의 달 5월입니다. 


진정 살아있는 것들은 모두 생명의 향기를, 하느님의 향기를 발산하는 법입니다. 생명의 향기가 사라져가는 작금의 시대입니다. 참 시끄럽고 요란하고 혼란한 죽음의 시대입니다. 고요히 머물러 영혼이 뿌리 내릴 시간도 공간도 찾기 어렵습니다. 생명의 향기가 아닌 도처에서 죽음의 냄새가 진동합니다. 하느님 중심, 사람 중심이 아닌 돈 중심의 생화(生花)가 아닌 조화(造花)같은 삶이 만연된 시대입니다. 정보와 지식은 넘치는데 생명의 지혜는 메말라 가고 있습니다. 살아있는 생명들간의 만남이, 사랑이, 침묵의 공간이 사라져 가고 있는 죽음의 시대입니다. 곳곳에 스며들어 있는 어둠과 죽음의 세력들입니다.


현대의 특징은 가볍다, 얕다, 엷다는 것입니다. 무거움이, 깊음이, 두터움이, 중심이, 방향이, 뿌리가, 기다림이, 침묵이 없다는 것입니다. 인격적 응답은 없고 조건반사적 감정적 반응만 있을뿐입니다. 모두가 쉽고 빠르고 편한 것을 추구하고 힘들고 더디고 불편한 것을 기피합니다. 경거망동(輕擧妄動), 부화뇌동(附和雷同)의 시대입니다. 식자우환(識字憂患)이라 아는 것이 많아 병이 된 시대, 마치 희랍 신화에 나오는 판도라의 상자가 완전히 열린듯한 시대입니다. 노인들은 많은데 어른이 없는 세상이요 지배층은 있는데 지도층은 없는 혼란한 세상입니다. 정말 알아야 할 하느님을 모르는 하느님 '무지의 병'의 폐해가 참으로 큽니다. 그러니 결과는 외로움, 들떠있음, 불안함, 두려움입니다. 


이런 토양에서는 생명이 자랄 수 없습니다. 생명의 뿌리를 깊이 내릴 수 없습니다. 넓이는 있지만 깊이의 뿌리가 없는 부박(浮薄)한 세상이 되어 버렸습니다. 도대체 제자리에서 제정신으로 제대로 사는 사람들은 몇이나 되겠는지요. 하여 마음의 병이, 영혼의 병이 날로 깊어져 가는 사람들이요 문제는 이런 병의 심각성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살아있는 만남의 부재로 깊이 뿌리내리지 못해 참으로 많은 이들이 뿌리 없이 외롭게 떠돌며 지냅니다. 생각없는 사람들, 영혼없는 사람들, 사랑없는 사람들, 뿌리없는 사람들로 가득한 세상입니다. 이것은 분명 살아있는 삶이 아닙니다. 행복도 기쁨도 평화도 자유도 없습니다. 생명의 행복, 생명의 기쁨, 생명의 자유이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생명 주일입니다. 생명의 향기를 발하며 진정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을 알려드리겠습니다.


첫째, 늘 하느님을 사랑하고 기억하십시오.

이래야 하느님의 깊고 넓은, 멀리 두루 바라볼 수 있는 객관적 시야와 더불어 부단히 확장되는 이해지평을 지니게 됩니다. 하느님을 사랑하여 알아갈 때 순수와 자비요 지혜와 겸손입니다. 오늘날의 불행은 하느님을 잊음으로 이런 마음과 시야와 이해지평을 잃음에서 기인합니다. 돈 중심의 이해 공동체는 있어도 하느님 중심의 가치공동체는 점차 사라져가는 세태입니다. 복음 서두에서 예수님이 하느님의 위상을 알려줍니다.


"나는 참포도나무요 나의 아버지는 농부이시다.“


포도나무인 예수님은 물론 그 가지들이 모두 농부이신 하느님의 관리대상입니다. 아니 이 보다도 하느님은 더 크십니다. 포도나무가 뿌리내린 땅이, 주변 모두가 하느님의 만드신 것들이요 이들의 중심에 자리잡고 있는 우리의 모두가 되시는 하느님입니다. 우리 모두 이렇게 살아있음 자체가 생명의 하느님 체험인데 얼마나 많이 하느님을 잊고 지내는 지요? 


하느님은 말 그대로 우리 삶의 목표. 방향, 의미, 중심이 되니 우리의 모두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런 하느님을 잊을 때 무의미, 무감각, 무기력에 허무의 심연이요, 하느님을 발견할 때 비로소 참 행복에 기쁨과 평화요 의미충만한 활력넘치는 삶입니다. 하느님 하시는 역할은 무엇입니까?


"나에게 붙어있으면서 열매를 맺지 않는 가지는 다 쳐내시고 열매를 맺는 가지는 모두 깨끗이 손질하시어 더 많은 열매를 맺게 하신다.“


우리라는 가지들을 부단히 사랑으로 전지하시며 열매들 주렁주렁 익어가길 기다리시는 하느님이십니다. 과연 내 열매들은 잘 맺어 익어가고 있습니다. 우리 삶의 목표는 하느님께 영광드림에 있습니다. 우리 분도회의 '모든 일에 하느님께 영광'이란 모토에도 딱 드러맞는 다음 복음 말씀입니다.

"너희가 많은 열매를 맺고 내 제자가 되면, 그것으로 내 아버지께서 영광스럽게 되실 것이다.“

바로 오늘 복음의 결론입니다. 우리 사랑의 열매들, 평화의 열매들로 우리 아버지께서 영광스럽게 되시는 것이 바로 우리 삶의 유일한 목표입니다. 그러니 이런 하느님을 마음을 다해 목숨을 다해 정신을 다해, 힘을 다해 사랑하고 기억하는 일보다 더 중요한 일을 없습니다.


둘째, 늘 예수님 사랑 안에 머무르십시오.

우리는 이미 주님의 말씀으로 이미 깨끗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 사랑 안이 나의 제자리입니다. 주님 말씀 안에, 사랑 안에 머무를 때 저절로 정화와 성화요, 기쁨과 평화요, 위로와 치유입니다. 언제 어디서든 예수님 안에 머무르는 것입니다. 예수님 안을 벗어나 살기에 온갖 파생되는 문제입니다. 세상 안에, 돈 안에, 걱정 안에, 두려움과 불안 안에, 불평과 불만 안에, 미움 안에, 어둠 안에, 절망 안에, 죽음 안에, 온갖 우상들 안에 머무르기에 죽어가는 생명들입니다. 


바로 수도원 안에, 이 미사 안에 머무르는 시간은 말그대로 예수님 사랑 안에 머무르는 시간입니다. 예수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이 정주요 관상입니다. 예수님 사랑 안에 머물러 깊이 뿌리내릴 때 안정과 평화요 샘솟는 기쁨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무려 머무르다는 말이 8회 나옵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내 안에 머물러라, 나도 너희 안에 머무르겠다.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 너희는 나 없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너무나 단순하고 자명한 진리입니다. 주님 안을 벗어난 헛된 노고로 인해, 아무것도 얻지 못하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허무하고 공허한 삶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주님과 상호내주(相互內住)할 때 참 행복이요 풍성한 사랑의 열매들 공동체입니다. 바로 사도행전에서 묘사되는 공동체가 이의 모범입니다.


'이제 교회는 유다와 갈릴래아와 사마리아 온 지방에서 평화를 누리며 굳건히 세워지고, 주님을 경외하며 살아가면서 성령의 격려를 받아 그 수가 늘어났다.‘


주님 사랑 안에 머물 때 교회공동체의 성장과 성숙이요 성령의 격려를 받아 무수히 늘어나는 하느님의 열매인 자녀들입니다. 주님 사랑 안에 머물러 감격과 감사에 벅차 주님을 찬양하는 우리들에게 딱 드러맞는 오늘 화답송 후렴입니다.


"주님, 저는 큰 모임에서 당신을 찬양하나이다."


셋째, 늘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예수님 포도나무에 붙어있는 가지들이요, 모두 예수님 사랑 안에 머물러 있는 형제들입니다. 형제들과의 관계가 없는 '나'는 순전히 환상이요 착각입니다. 하여 제목도 '나'대신 -'우리'는 진정 살아있는가?'-로 정한 것입니다. 형제란 말 자체가 관계 개념입니다. 혼자의 단독자라면 형제란 호칭도 쓸 수 없습니다. 


인보성체수도회의 호칭 역시 이색적이며 복음적이었습니다. 수녀란 호칭대신에 선배든 동료든 후배든 모두 '언니'라 부릅니다. 창립자 윤을수 신부님의 유훈이라 합니다. 수사, 수녀란 호칭은 관계 개념이 아니기에 사실 복음적인 호칭이라 볼 수 없고 오히려 관계가 투명히 드러나는 형제, 언니란 호칭이 복음적입니다. 


나 혼자가 아닙니다. 다 똑같이 주님 안에 있는, 주님 나무에 붙어있는 평등한 생명의 형제들이요 언니들입니다. '우리'란 순수한 우리말이 얼마나 풍요로운지요. '나'의 복수의 뜻도 있지만 한 우리 안에 살아가고 있는 사랑의 공동체를 뜻하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형제란 말도 반갑습니다.


'형제들은 그것을 알고 그를 사울을 카이사리아로 데리고 내려가 다시 타르수스로 보냈다.‘


사랑하는 형제이기게 이렇게 최선의 노력을 다해 배려하는 동료 형제들입니다. 오늘 요한 1서가 형제 사랑의 계명을 분명히 밝혀 줍니다. 


"자녀 여러분, 말과 혀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합시다“


바로 진리이신 주님 안에서 행동으로 사랑할 때 하느님 앞에서 마음 편히 가질 수 있고 하느님 큰 마음을, 큰 사랑을 깨닫고 배우게 됩니다. 우리가 지켜야 할 계명은 단 하나, 하느님의 아드님 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을 지키는 사람은 주님 안에 머무르게 되고 주님께서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르십니다. 바로 이를 깨닫게 해주는 분이 성령입니다.


오늘 부활 제5주일 생명 주일에, 주님은 우리 모두 진정 생명의 향기를 발하며 살 수 있는 생명의 길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1.늘 하느님을 사랑하고 기억하십시오.

2.늘 예수님 사랑 안에 머무르십시오.

3.늘 서로 사랑하십시오.


부활하신 주님은 당신 사랑 안에 머물러 미사를 봉헌하는 우리 모두를 당신 생명과 사랑으로 가득 채워 주시어 우리 모두 옛 삶을 버리고 새 삶을 살아가게 하십니다. 우리 모두 주님 안에서 온전히 치유되고 회복되어 새사람으로 탄생되는 복된 미사시간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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