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3.26.사순 제5주일 에제37,12ㄹ-14 로마8,8-11 요한11,1-45
공동생활(共同生活)의 축복과 아름다움
-그리스도 예수님 중심의 공동체-
“나 주님께 바라네.
내 영혼이 주님께 바라며,
그분 말씀에 희망을 두네.”(시편130,5)
오늘 사순 제5주일 요한복음 11장 1절부터 45절까지 긴 복음이 참 은혜롭습니다. “라자로가 죽다-부활이며 생명이신 예수님-눈물을 흘리시다- 라자로를 살리시다”순서로 전개되는 내용도 다채롭고 풍부합니다. 순간 영감처럼 떠오른 강론제목, “공동생활의 축복과 아름다움-그리스도 예수님 중심의 공동체”에 감사했습니다.
라자로, 마르타, 마리아 삼남매의 베타니아 공동체가 바로 그리스도 예수님 중심의 공동체의 모범입니다. 말그대로 공동생활의 축복과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습니다. ‘공동생활’을 사전에서 찾아보고 지극히 평범한 내용에 공감하며 은혜받았습니다.
“일정한 시간과 공간에서 여럿이 서로 도우며 사는 생활”
혼자서는 못삽니다. 더불어의 삶이요 더불어의 여정이요 더불어의 구원입니다. 고립단절의 혼자의 삶이 지옥입니다. 찾아오는 모든 분들께 언제나 활짝 열려있는 제 집무실이 흡사 세상 공동체의 중심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제도 예고없이 10여명쯤 방문한 자매들에게 판공성사를 드리며 교회공동생활의 축복과 아름다움을 체험했습니다. 성 베네딕도 규칙의 다음 두절도 공동생활의 중요성을 깨닫게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을 섬기는 학원을 설립해야 하겠다.”(성규 머리45)
“그리스도보다 아무것도 더 낫게 여기지 말 것이니, 그분은 우리를 다 함께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할 것이다.”(성규72,11-12)
성규나 성경은 개인 수양 서적이 아니라 더불어의 공동생활에 필요한 사랑과 지혜를 배우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평생 보고 배워야 할 더불어의 배움터인 공동체입니다. 제 집무실 게시판에는 2년전에 써놓은 말씀이 여전히 붙어 있습니다.
“저에게 가장 큰 스승은 여기 제 몸담고 살아가는 수도공동체입니다.”
이와 더불어 제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좌우명 고백시 6째 연은 그리스도 예수님 중심의 믿음의 공동체 성원 모두에게 해당되는 진리를 설파합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주님의 집인 수도공동체에서
주님의 전사로, 주님의 학인으로, 주님의 형제로 살았습니다.
끊임없이 평생 날마다
이기적인 나와 싸우는 주님의 전사로
끊임없이 평생 날마다
말씀을 배우고 실천하는 주님의 학인으로
끊임없이 평생 날마다
수도가정공동체에서 주님의 형제로 살았습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받으소서.”
날로 늘어나는 1인가구와 노령화 현실에 교회공동체에 속한다는 것이 얼마나 큰 구원의 축복인지 깨닫습니다. 넓게 깊이보면 믿는 이들은 혼자 살아도 교회공동체에 속해 있기에 물심양면 공동체의 도움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전 불가의 절친 관계였던 두 고승, 성철과 청담의 일화도 생생합니다. 나이는 10세 정도 많은 청담이었지만 격의 없이 우정을 나눴고 힘이 장사인 두 고승은 오랜만에 만나면 이층 다다미 방에서 반가움에 씩씩 거리며 한바탕 씨름을 하며 우정을 확인하고 나눴다는 웃음짓게 하는 재미있는 일화가 수십년이 지닌 지금도 선명합니다.
수도원 다섯의 작은개들의 공동생활도 흥미롭습니다. 아예 이웃집 불암사의 선재라는 개는 요즘 수사님들의 환대를 받으며 상주하다 시피합니다. 어제는 새벽 4시 산책길에 제 뒤를 종종 따라왔고, 후에 날이 밝자 수도원 개집의 문을 열어놓으니 반가워 격렬하게 어울리는 모습이 더불어의 놀이를 즐기는 동네 아이들과도 흡사했습니다. 커다란 선재가 작은 개와 격렬히 싸우는 듯 해 자세히 보니 반가움과 애정의 표현이었고 몸에 전혀 손상을 주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강론 서론이 길었지만 이런 관점에서 오늘 말씀을 보면 그 이해가 확연해 집니다. 그리스도 예수님을 평생 도반이자 베타니아 공동체의 중심으로 모신 모습입니다. 예수님은 라자로, 마르타, 마리아를 사랑했고, 이들 또한 예수님을 사랑했습니다. 자연스럽게 예수님과의 우정과 더불어 형제자매들간의 우정이 함께 감을 봅니다.
삼남매의 서로 다르다는 사실이 공동체의 부요와 축복과 아름다움에 얼마나 크게 도움이 되는지요! 라자로의 소생 기적을 통해, 또 마르타와 주님과의 대화를 통해 주옥같은 진리를 배우고 체험합니다. 혼자라면 어찌 이런 구원의 진리 체험이 가능하겠는지요.
“주님,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이가 병을 앓고 있습니다.”
“그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오히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다. 그 병으로 말미암아 하느님의 아들이 영광스럽게 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마르타와 그 여동생과 라자로를 사랑하셨습니다. 주님의 인간적인 면모가 물씬 풍기는 오늘 복음입니다. 이렇게 형제들의 아픔에 도움을 청할 주님이 공동체의 중심에 계시다는 것은 얼마나 큰 축복인지요! 저도 자주 제 절친이신 예수님께 형제자매들을 위해 생미사와 연미사를 통해 간청할 때가 참 많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경우도 대부분 죽을 병이 아니라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것임을 깨달을 필요가 있습니다. 이어진 예수님의 반응 말씀은 어제 저녁기도 마리아의 노래 후렴에 이어 오늘 아침성무일도 즈카르야 후렴시 흥겹게 불렀습니다. 오늘 하루 흥겹게 기도 노래로 바치며 지내려 합니다.
“우리 친구 라자로가 잠들어 있으니, 이제 가서 그를 깨우자.”
얼마나 정겨운 주님의 반응인지요! 라자로뿐 아니라 우리 모두 주님의 친구가 된다니 말씀 자체가 위로와 구원이 됩니다. 죽음도 우리 전능하신 친구 예수님의 눈에는 잠들어 있음이요 이를 깨우면 된다는 것입니다. 그 와중에 예수님과 마르타와의 대화를 통해 우리는 참 중요한 구원의 진리를 배웁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
“예, 주님! 저는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습니다.”
얼마나 주님의 아름다운 축복의 구원의 진리요 마르타의 모범적 신앙 고백인지요! 참으로 귀한 진리와 고백을 배우는 우리들입니다. 마리아도 울고 함께 한 유다인들도 울었다는 장면에 이어 “예수님께서는 눈물을 흘리셨다”(요한11,35)는 대목도 우리와 함께 아파하시는 참으로 인간적인 주님의 면모가 연상되어 큰 위로가 됩니다. 라자로를 살리는 절정 부분 또한 감동의 극치입니다.
“돌을 치워라.”
우선 우리가 살아나는 데 주님께 협조해 할 일은 내 앞에 있는 장애물의 돌을 치우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돌을 치우자, 즉시
“아버지, 제 말씀을 들어 주셨으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짧은 감사기도후 큰 소리로 외치는 소리가 흡사 죽음과 같은 깊은 영적 잠에 떨어진 우리를 향한 말씀처럼 들립니다.
“라자로야, 이리 나와라.”
라자로 이름 대신 내 이름을 넣어 절망의 무덤안에 갇혀있거든 즉시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해 무덤문을 박차고 탈출하여 파스카의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오늘 라자로를 살리는 복음은 예수님의 일곱 표징중 마지막 절정의 표징입니다. 예수님은 물론 우리의 부활을 예고하는 놀랍고 고마운 표징입니다. 부활을 앞두고 부활의 기쁨을 미리 알려주는 복음입니다. 바로 제1독서 에제키엘 예언서 말씀의 실현입니다. 그대로 우리를 향한 구원의 말씀입니다.
“나 이제 너희 무덤을 열겠다. 너희를 무덤에서 끌어내어 이스라엘 땅으로 데려가겠다. 내 백성아, 내가 이렇게 너희 무덤을 열고, 그 무덤에서 너희를 끌어 올리면, 그제야 너희는 내가 주님임을 알게 될 것이다. 내가 너희 안에 내 영을 불어 넣어 너희를 살린 다음, 너희 땅으로 데려다 놓겠다.”
라자로를 무덤에서 살려 내신 주님은 당신 백성인 우리를 살려 내시고 당신 영을 우리 안에 불어 살려주시니 그대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제2독서 바오로 사도의 말씀처럼 하느님의 영이 우리안에 사시기에 우리는 육안에 있지 않고 성령 안에 삶입니다. 성령께서는 우리의 생명이 되어주시니 말그대로 영적 삶이요 이보다 더 큰 축복도 없습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죽음의 잠에서, 육적인 삶에서, 깨어나 성령 충만한 영원한 영적 삶을 살게 하십니다.
“파수꾼이 새벽을 기다리기보다, 내 영혼이 주님을 더 기다리네.
이스라엘아, 주님을 고대하여라.
주님께는 자애가 있고, 풍요로운 구원이 있네”(시편130,6-7).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