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죽음 -어떻게 잘 살다 잘 죽을 수 있습니까?-2021.3.28.주님 수난 성지 주일

by 프란치스코 posted Mar 28,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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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3.28.주님 수난 성지 주일                                         이사50,4-7 필리2,6-11 마르14,1-15,47

 

 

 

삶과 죽음

-어떻게 잘 살다 잘 죽을 수 있습니까?-

 

 

 

해마다 주님 수난 주일에 긴 수난 복음을 들을 때 마다 생각나는 ‘삶과 죽음’입니다. 어떻게 하면 잘 살다 잘 죽을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아주 예전 개신교 목사님의 물음에 대한 제 답에 만족했고 지금도 여전합니다.

 

“신부님의 소원은 무엇입니까?”

“잘 살다 잘 죽는 것입니다!”

 

어떻게 해야 잘 죽을 수 있겠는가? 물론 하느님의 은총이지만 진인사대천명의 자세로 최선을 다해 끝까지 깨어 한결같이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사실 잘 살다 잘 죽는 일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습니다. 잘 살아야 잘 죽습니다. 죽음은 삶의 요약입니다. 그러니 가장 중요한 기도는 잘 살다 잘 죽게 해주십사 하는 기도입니다.

 

늘 준비해야 할 가장 중요한 준비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죽음입니다. 

참으로 중요한 마지막 시험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죽음입니다.

 

날짜를 알 수 없으니 늘 마지막 시험인 죽음을 준비하며 살아야 할 것입니다. 하여 사부 성 베네딕도는 ‘죽음을 날마다 눈앞에 환히 두고 살라’ 하셨습니다. 죽음을 날마다 눈앞에 환히 두고 깨어 오늘 지금 여기를 살 때 욕심이나 환상없이 투명하게, 또 외로움이나 그리움 없이도 주님 현존안에서 편안하고 충만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잊지 못할 아름다운 죽음이 생각납니다. 어느 자매의 3년간 암투병하다가 선종한 남편에 대한 고백입니다.

 

“남편은 3년간 성경 필사에 전념했습니다. 이 때에야 고통이 없었다 합니다. 남편은 성경을 필사 하면서 거듭 고백했습니다. ‘아, 행복하다! 내가 주님을 알지 못하고 성경을 몰랐다면 자살 했을 것이다.’ 그러던 남편이 선종하니 남편이 얼마나 자기를 사랑했는지 깨달아 알게 됐고 모든 앙금이 다 사라져 감사하는 마음이 가득하게 되었습니다.”

 

다른 한 자매는 남편의 임종어에 감격했고 남편 사후, 더욱 남편을 사랑하게 됐다는 고백입니다. 바로 다음 짧은 세마디 고백의 임종어였다 합니다. 좌우명이나 묘비명으로 해도 손색이 없겠습니다. 하느님 앞에서도 이 셋의 고백뿐일 것입니다.

 

“고맙습니다. 미안합니다. 사랑합니다.” 

 

이웃에게 줄 수 있는 참 중요한 최고의 선물이 이런 아름답고 거룩한 죽음일 것입니다. 하여 저는 자주 좌우명, 묘비명, 임종어, 유언을 미리 써놓고 삶의 좌표로 삼아 살아 볼 것을 권하곤 합니다. 저에겐 이를 위한 두가지가 있습니다.

 

1.삶의 여정을 일일일생, 하루로 압축해보는 것이고, 일년사계로 압축해보는 것입니다. 저의 경우 하루로 압축해보니 오후 4시쯤 되는 것 같고, 일년사계로 압축해 보니 초겨울쯤 되는 듯 하여 정신의 번쩍 듭니다.

 

2.제 좌우명 기도시중 특히 마지막 연을 자주 생각합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일일일생 하루를 처음처럼, 마지막처럼, 평생처럼 살았습니다.

저에겐 하루하루가 영원이었습니다.

어제도 오늘도 이렇게 살았고, 내일도 이렇게 살 것입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받으소서.”

 

어떻게 하면 잘 살다 잘 죽을 수 있겠습니까? 오늘 말씀을 바탕으로 그 중요한 비결, 셋을 나눕니다.

 

첫째, 기도입니다.

기도가 답입니다. 늘 간절히 절실히 끊임없이 기도하는 것입니다. ‘늘 기도하십시오’, 바오로 사도의 권고입니다. 우리 예수님의 기도 생활 또한 영원한 감동입니다. 아버지와의 끊임없는 사랑과 생명의 소통의 대화가 기도였습니다. 

 

날마다 해가 지면 외딴곳에서 아버지와의 일치의 친교중에 활력을 회복했으며 사명을 새로이 하셨습니다. 낮의 활동과 밤의 관상이 절대적 균형과 조화를 이뤘습니다. 오늘 제1독서 이사야서의 주님의 종의 셋째 노래는 그대로 예수님의 고백처럼 들립니다. 얼마나 주님과 깊은 일치의 상태에 있는 주님의 종인지 깨닫게 합니다. 모두가 ‘주어主語’는 하느님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나에게 제자의 혀를 주시어, 지친 이를 말로 격려할 줄 알게 하신다. 그분께서는 아침마다 일깨워 주신다. 내 귀를 일깨워 주시어, 내가 제자들처럼 듣게 하신다. 주 하느님께서 나를 도와 주시니, 나는 수치를 당하지 않는다.”

 

이어지는 주님 수난 복음 중 예수님 기도의 절정입니다.

 

“아빠,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무엇이든 하실 수 있으시니,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가 원하는 것을 하시지 마시고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것을 하십시오.”

 

예수님의 평생 삶이 요약된 기도입니다. 이어 십자가상에서의 탄원기도는 영원한 충격의 감동입니다.

“엘로이 엘로이 레마 사박타니?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

 

이에 감격한 백인대장의 고백이 예수님의 신원을 분명히 합니다.

“참으로 이 사람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다.”

 

둘째, 사랑입니다.

사랑만이 답입니다. 위중한 수난의 현장에서도 사랑의 성체성사를 거행하시는 주님이십니다. 사랑밖엔 길이 없습니다. 이 또한 기도의 열매임을 깨닫습니다. 기도는 테크닉이 아니라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사랑보다 연민이 좋겠습니다. 사랑인 ‘러브love’가 호수같다면, 연민인 컴팻션compassion은 바다같다는 마이스터 엑카르트 신비가의 말이 생각납니다. 

 

바다처럼 한량없이 깊고 넓은 하느님의 연민의 사랑입니다. 바로 예수님의 사랑이 이러했습니다. 세상 모두를 담는 바다같은 깊고 넓은 주님의 아가페 사랑이요, 세상 모두의 진상을 그대로 드러내는 거울같은 주님의 아가페 사랑입니다.

 

보십시오, 온갖 군상들이 예수님 안에 다 들어있고 본색이 다 탄로됩니다. 환호하다 돌변하여 십자가에 못박으라 광분하는 군중들, 배반자 유다, 주님의 장례를 위해 향유의 옥합을 봉헌하는 향기로운 여인, 예수님 기도중 잠들어 있던 세 제자들, 세 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한 베드로, 주님을 남겨두고 도주한 제자들, 하느님의 아드님임을 고백하던 백인대장, 멀리서 숨죽여 예수님을 지켜보던 여인들, 예수님의 시신을 곱게 싸서 안장한 의리의 사람 요셉, 모두가 우리의 가능성입니다. 과연 나는 어느 자리에 있겠는 지요. 

 

사랑이 회개를 촉발합니다. 회개해서 용서가 아니라 용서의 사랑이 회개에로 이끕니다. 이런 예수님의 바다같은 사랑에 감동하여 회개한 베드로입니다. 아마 무수한 사람들이 후에 제정신이 들면서 회개했을 것입니다. 그러고 보니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은 우리 모두에게는 영원한 회개의 표징이 됩니다.

 

참으로 깊고 넓은 사랑이 끊임없는 회개를 일으킵니다. 제 어머님이 돌아가신지 16년이 지났는데도, 지금도 어머니를 생각하면 마음이 짠해지며 끊임없이 샘솟는 회개입니다. 아마 죽을 때까지 평생 이러할 것입니다. 무엇보다 하느님의 한량없는 사랑이 우리를 평생 회개에로 이끕니다. 주님 수난과 죽음을 통해 환히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에겐 영원한 회개의 표징이 됩니다.

 

셋째, 순종입니다.

순종이 답입니다. 이 또한 기도와 사랑의 열매입니다. 산다는 것은 순종하는 일입니다. 일상의 작고 큰 순종에 항구하고 충실할 때 마지막 순종의 죽음도 잘 맞이할 수 있습니다. 억지로, 마지못해 순종이 아니라 자발적 사랑의 순종입니다. 겸손한 마음으로 잘 경청해야 순종입니다. 순종할 때 아름답습니다. 섬김의 순종, 순종의 겸손입니다. 

 

이런 순종이야말로 영성의 잣대요 영적 성장과 성숙의 표지입니다. 하느님께 이르는 길도 순종의 길 하나뿐입니다. 어찌보면 우리 삶은 순종의 여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 예수님께서도 고난을 통해 순종하는 법을 배워 순종하는 우리 모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셨습니다.

 

오늘 참으로 깊고 아름다운 제2독서 필리비서 그리스도 예수님의 비움 찬가가 참 감동입니다. 전반부는 순종의 결정적 모범인 예수님의 모습을, 후반부는 이런 순종의 예수님을 높이 들어 올리신 하느님의 응답을 묘사합니다. 전반부의 말씀을 그대로 인용합니다.

 

“그리스도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여느 사람처럼 나타나, 당신 자신을 낮추시고,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그러니 잘 살다가 잘 죽을 수 있는 답은, 참으로 아름답고 거룩한 삶과 죽음에 대한 답은 분명해 졌습니다. 

 

1.늘 깨어 간절히 항구히 기도하는 것입니다. 

기도에는 영원한 초보자인 우리들입니다.

2.늘 사랑을 배워 실천하는 것입니다. 

역시 사랑에도 늘 초보자인 우리들입니다.

3.늘 순종을 배워 실천하는 것입니다. 

역시 순종에도 늘 초보자인 우리들입니다.

 

말그대로 우리 삶의 여정은 기도의 여정, 사랑의 여정, 순종의 여정임을 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주님 수난 성지 주일 미사를 통해 우리 모두 기도와 사랑, 순종의 여정에 충실하고 항구할 수 있는 은총을, 하여 잘 살다 잘 죽을 수 있는 은총을 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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