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권위의 삶 -주님으로부터 오는 것-2020.9.1.연중 제22주간 화요일 피조물 보호를 위한 기도의 날

by 프란치스코 posted Sep 01,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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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9.1.연중 제22주간 화요일   피조물 보호를 위한 기도의 날

1코린2,10ㄴ-16 루카4,31-37

 

 

 

참 권위의 삶

-주님으로부터 오는 것-

 

 

 

어제 ‘홀로와 더불어’라는 시인 구상 추모 문집의 단아하고 품위있는 글들을 읽으며 참 권위의 힘을 실감했습니다. 참으로 주님을 닮은 거룩한 사랑의 권위가 사람들을 감화感化하고 덕화德化하고 정화淨化하고 성화聖化하고 위로慰勞하고 격려激勵하고 치유治癒하며 기쁨과 평화를 준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하느님으로부터 기원하는 참 권위가 이웃을 구원한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 우리 수도원의 반려견 다섯을 돌보는 일명 ‘문보물’이라 부르는 수사의 예도 소개하고 싶습니다. 저는 문보물 수사를 반려견들의 ‘수련장’이자 ‘수호성인’이라 부릅니다. 반려견들이 수사님을 따르는 모습에서 사랑의 권위를 느끼기 때문이며 엊저녁은 반려견들의 집에 모기향을 켜놓으며 잠자리를 마련해 주는 모습도 사진에 담았습니다.

 

참 권위가, 진정한 권위가 참으로 절실한 시대입니다. 신뢰가 무너지면 회복이 참 힘들 듯 권위도 무너지면 회복이 참 힘듭니다. 권위없이는 살 수 없습니다. 참으로 살기 위해 참 권위는 필수입니다.  교회 역시 생생한 전통과 참 권위를 지닐 때 소금과 빛의 사명에 충실한 참 권위의 교회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일부라지만 대면예배 고집, ‘공공의 적’이 된 개신교, 목숨과 바꿀수 없는 종교의 자유?”란 기사를 보며, 이래서는 교회의 권위도 보장될 수 없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참 권위도 지녀야 하겠지만 서로의 권위를 존중하고 지켜주는 일도 기본에 속합니다. 참 권위는 각자 삶의 자리에서 주님을 닮아 책임을 다하며 ‘답게’ 살 때 옵니다. ‘스승답게’ ‘부모답게’ ‘책임자 답게’ 궁극으로 ‘하느님의 자녀답게’ 품위 있게 살 때 옵니다. 비상한 권위가 아니라 평범하면서 꼭 지녀야 할 하느님의 선물같은 권위입니다. 죽이는 권위가 아니라, 살리는 권위 사랑의 권위입니다. 

 

오늘은 9월 순교자 성월의 첫날이자 ‘피조물 보호를 위한 기도의 날’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2015년 공동의 집인 지구를 돌보는 것에 관한 회칙 ‘찬미받으소서’를 반포하면서 해마다 9월1일을 ‘피조물 보호를 위한 기도의 날’로 정했습니다. 특히 교회는 오늘부터 성 프란치스코 축일인 10월4일 까지 ‘피조물의 계절’, ‘지구를 위한 희년’으로 정해 피조물 보호에 각별히 주의를 기울일 것을 촉구합니다.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생태환경위원회 위원장 강우일 주교님의 ‘2020년 피조물 보호를 위한 기도의 날 담화’도 참으로 시의적절한 주옥같은 말씀으로 가득했습니다. 근본적이 전환이 필요하다는 진정성 가득 담긴 절박한 호소였습니다. 한 마디로 피조물 보호에 생태적 회개를 통한 ‘하느님의 자녀답게’ 사는 참 권위의 삶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시간되면 시대의 표징같은 예언적 담화를 꼭 정독하시길 권합니다. 

 

수십년전 희랍어 시간, 희랍어 ‘권위(ex-ousia)’에 대한 어원을 통한 명쾌한 설명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권위는 외부로부터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존재자체로부터 나오는 것이란 해설입니다. 외적인 지위에서, 옷에서, 외모에서, 권력에서, 재물에서 오는 참 권위가 아니라 사람됨됨이의 안의 존재로부터 온다는 것입니다. 존재자체이신 하느님을 닮아갈수록 참으로 권위있는 삶임을 깨닫습니다. 바로 오늘 복음의 예수님이 그 생생한 본보기입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에 사람들을 가르치셨는데 그들은 그분의 가르침에 몹시 놀랍니다. 그분의 말씀에 권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누구나 참 권위는 알아 채는 법이며 그 권위 앞에는 저절로 승복하기 마련입니다. 예수님의 참 권위를 한 눈에 알아 본 더러운 마귀의 영입니다.

 

“아! 나자렛 사람 예수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입니다.”

 

바로 예수님의 권위는 거룩하신 하느님으로부터 기원함을 봅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닮을 때 반영되는 거룩한 권위입니다.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하고 명령하시자 더러운 영은 혼비백산 그에게 아무런 해도 끼치지 못하고 그에게서 나갑니다. 

 

“이게 대체 어떤 말씀인가? 저이가 권위와 힘을 가지고 명령하니 더러운 영들도 나가지 않는가?”

 

사람들의 즉각적인 경탄의 반응입니다. 모 정당의 이름이 ‘국민의 힘’으로 정해졌다는 뉴스가 생각납니다. 참 권위의 힘은 하느님의 힘임을 깨닫습니다. 하느님을 닮아가면서 하느님의 자녀답게 살 때 하느님의 힘은 사랑의 힘, 겸손의 힘, 섬김의 힘으로 표현될 것입니다. 민심民心은 천심天心입니다. 참으로 ‘국민의 힘’이 ‘하느님의 힘’임을 깨닫는 겸손한 삶이라면 저절로 참 권위를 지닌 정당이 될 것입니다.

 

참 권위를 지닌 삶을 살아야 합니다. 어제 어느 자매님께 “자매님은 자매님 고유의 매력을, 아름다움과 향기를 지니고 있습니다!” 드린 격려말이 생각납니다. 각자 제 삶의 자리에서 제모습, 제색깔, 제향기를 지니고 하느님의 자녀답게 살 때 바로 참 권위의 삶임을 깨닫습니다. 

 

오늘 제1독서의 바오로 사도의 하느님의 지혜에 대한, 하느님의 영을 통한 깨달음에 대한 말씀도 참 권위의 삶에 결정적 도움을 줍니다. 세상의 영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오는 영을, 하느님의 영을 받은 영적 인간인 우리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무지와 교만의 현세적 인간은 하느님의 영에게서 오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러니 세례 받아 하느님의 영을 받아 하느님의 자녀가 된 영적 인간인 우리는 참 권위를 지닌 삶을 살아야 함을 깨닫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지니고 있습니다.”

 

제1독서의 결론같은 말씀이 참 권위의 소재를 밝힙니다. 참으로 우리가 예수님을 닮아가면서 그리스도와 일치가 깊어질 때 비로소 참 권위의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예닮의 여정과 함께 가는 참 권위의 삶임을 깨닫습니다. 프란치스쿄 교황님의 말씀도 잊지 못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애덕은 박애가 아니라, 매사 그리스도의 눈으로 보는 것이며 각자의 얼굴에서 그리스도를 보는 것이다.”

 

그리스도와 일치되어갈 때 참 권위를 지닌 애덕의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페인트칠같은 얼마 못가 들통나는 외적 가짜 권위가 아니라 저절로 안의 하느님으로부터 배어나와 빛을 발하는 참 권위임을 깨닫습니다. 이래서 끊임없는 기도를 통한 주님과의 일치를 권하는 것입니다. 화장하지 않아도, 곱게 꾸미지 않아도, 성형수술 안해도 내면의 아름다움이 저절로 빛을 발하면서 참 권위를 지니게 해 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난해부터 출판계에서는 얼짱이 아닌 몸짱에 대한, 예쁜 얼굴이나 몸이 아닌 강한 몸을 지향하며 운동하는 여성에 대한 책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합니다. 아주 바람직한 좋은 현상입니다. 여기에다 몸뿐 아니라 영적 삶에도 힘을 쏟는 다면 금상첨화의 참 권위있는 삶이 될 것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자비하신 주님을 닮아 참 권위의 사람이 되도록 도와 주십니다. 

 

“주님은 너그럽고 자비하시며, 분노에 더디시고 자애가 넘치시네. 주님은 모두에게 좋으시며, 그 자비 모든 조물 위에 내리시네.”(시편145,8-9).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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