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3.16.사순 제4주간 토요일 예레11,18-20 요한7,40-53
예수님은 누구인가?
“예수님 만나기, 예수님 알기, 예수님 살기”
-날마다 새롭게!-
“너희에게 새 마음을 주고, 너희 안에 생 영을 넣어 주겠다.
너희 몸에서 돌로된 마음을 치우고, 살로 된 마음을 넣어주겠다.”(에제36,26)
예수님은 누구인가? 우리 믿는 이들의 평생 화두입니다. 분명한 것은 믿는 이들에게는 끊임없이 물어야 할 가장 중요한 질문이며 “날마다, 새롭게!” 내 삶의 현장에서 예수님을 만나야 하고, 예수님을 알아야 하고, 예수님처럼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화답송 후렴에서 제1독서에서의 예레미야와 복음에서의 예수님의 고립무원의 처지를 느낍니다. 예레미야를 통해서도 예수님이 누구신지 은연중 감지됩니다. 두분다 하느님께 대한 강철같은 신뢰와 사랑을 지닌분들입니다.
“주, 하느님, 당신께 피신하오니, 뒤쫓는 모든 자에게서 저를 구하소서, 저를 구해 주소서. 사자처럼 이 몸 물어가지 못하게 하소서. 아무도 구해 주는 이 없나이다.”(시편7,2-3).
그대로 오늘 제1독서의 예레미야의 처지에 대한 묘사같고 이런 고립무원의 처지에서 예레미야 예언자의 기도가 심금을 울립니다.
“그러나 정의롭게 판단하시고, 마음과 속을 떠보시는 만군의 주님, 당신께 제 송사를 맡겨 드렸으니, 당신께서 저들에게 복수하시는 것을 보게 해 주소서.”
하느님만이 예레미야에게 유일한 구원의 출구임을 깨닫습니다. 아마 복음의 예수님도 매사 예레미야처럼 하느님께 희망과 신뢰를 두고 하루하루 절박한 마음으로 사셨을 것입니다. 예레미야의 반응을 통해 예수님의 처지가 은연중 짐작되며 주변인들의 증언을 통해서도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감지됩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은 전혀 드러나지 않고 숨겨져 있으며 예수님을 만난 이들의 소감들만 전할 뿐입니다. 추측컨대 하느님과 깊은 결속관계의 예수님이심을 깨닫게 됩니다.
“저분은 참으로 그 예언자시다.”
“저분은 메시아시다.”
예수님은 만난 이들에 대한 반응에 대해 격렬한 반대 의견이 이어지며, 몇몇은 예수님을 잡으려고 하였지만 그분께 손을 대는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쉽게 범접할 수 있는 예수님이 아님을 깨닫습니다.
“그분처럼 말하는 사람은 지금까지 하나도 없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성전 경비병들의 생생한 목격담에 역시 바리사이들의 격렬한 반대 의견이 뒤따릅니다. 그러나 바리사이들중에서 니코데모와 같은 깨어있는 이들도 있습니다. 이미 예전에 예수님을 개인적으로 만났던 분이기에 예수님을 아는 니코데모가 예수님을 위해 변론합니다.
“우리 율법에는 먼저 본인의 말을 들어보고 또 그가 하는 일을 알아보고 난 뒤에야, 그 사람을 심판하게 되어 있지 않습니까?”
역시 이에 대한 동료 바리사이들의 반응은 얼마나 완고한지요! 무지의 고정관념, 선입견, 편견이 철벽같습니다.
“당신도 갈릴래아 출신이라는 말이오? 성경을 연구해 보시오. 갈릴래아에서는 예언자가 나지 않소.”
새삼 예수님과의 참 만남이, 예수님을 참으로 아는 것이 얼마나 결정적인지 깨닫습니다. 살아 있는 참 만남이 없으니 소모적 논쟁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완전히 감춰져 있습니다. 이런 논쟁의 중심에 침묵중에 주변에 활짝 열려 있을 주님을 만나는 것이 급선무입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오늘 지금 여기서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을 알고, 예수님처럼 살아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난 분들의 체험을 나누는 것도 중요합니다.
“가장 약한 사람들을 섬기는 것은 하느님의 모든 남녀들이 해야할 일이다.”
“가난한 사람들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은 자동적으로 공산주의자로 만드는 것이 아니다. 가난한 이들은 복음의 깃발이며, 예수님 마음 안에 있는 이들이다. 그리스도교 공동체내에서 소유는 나눠져야 한다. 이것은 공산주의가 아니라, 순수한 그리스도교이다!”
“내가 은퇴한다면, 나는 전직 교황이 아니라 전직 로마의 주교로 불리길 원한다. 고백사제가 되고 병자들과 친교를 가질 것이다.”
바로 예수님을 만났기에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이런 고백도 가능합니다. 전임 베네딕도 16세 교황과의 관계에 대한 솔직한 고백에 공감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말한다. “전직 베네딕도 16세 교황은 부도덕적이고 무원칙적 사람들에 의해 이념적이고 정치적 목적으로 도구화됨으로, 10년 동안 우리 둘은 얼마나 많이 상처를 받았는지...”’
이런 고통들을 수용하고 견뎌낼 수 있었음도 예수님과의 깊은 신뢰와 사랑의 일치 체험에서 가능했음을 봅니다. 우리의 예수님과의 관계가 시냇물 깊이라면 두분 교황님의 예수님과의 관계는 태평양 바다 깊이일 것입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신 파스카 예수님은 우리와의 만남을 고대하십니다. 당신을 만나, 당신을 알고, 당신처럼 살기를 바라십니다. 어제 교황청 설교가 추기경의 4번째 사순강론도 은혜로웠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라자로의 부활은 예수님을 죽음에 이르게 했고, 예수님의 죽음은 그분을 믿는 모든 이들의 부활의 원인이 되었다. 그분은 시간의 끝에서 부활한 것이 아니라, 오늘 지금 여기서 시작된 부활인 것이다.”
바로 오늘 지금 여기서 부활한 주님을 만나, 주님을 알고, 또 주님처럼 살라는 것입니다. 어제 매주 2회 수도원 쓰레기를 말끔히 정리하면서 섬김의 직무에 충실한 원장 수사를 통해서도, 어느 형제와의 유쾌한 문자 메시지를 통한 만남에서도 저는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 대화 나눔을 일부 공개합니다.
-“신부님, 항상 좋은 말씀 주셔서 감사합니다. 신부님의 성덕 열심히 따라가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자랑스런 아버님 모심을 축하드립니다! 형제님은 아버님만 보고 배워도 성인이 될 것입니다! 그 89연세에 영육이 건강하시니 축복입니다! 형제님도 아버님 건강 타고 나셔서 영육으로 건강할 것이니 감사하며 은총의 사순시기 기쁘게 사시기 바랍니다.”
“네 알겠습니다. 이 기쁜 소식 아버지께 전달해 드리겠습니다... 아버지께 신부님 말씀 전해드렸더니 환하게 웃으시네요. 아버지 환하게 웃으시니 저도 행복합니다. 감사합니다.”-
저는 이 신심깊고 다정한 부자(父子)분을 통해서도 참 좋으신 예수님을 만난 듯 어제는 많이 유쾌했고 행복했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파스카의 봄같은 분입니다. 예전에 나눴던 “예수는 봄이다” 시를 다시 나눕니다.
“예수는 봄이다
봄은 사랑이다
봄이 입맞춘 자리마다
환한 꽃들 피어나고
봄의 숨결 닿은 자리마다
푸른싹 돋아난다
예수는 봄이다
봄은 사랑이다”-1999.3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봄같은 예수님을 만나, 예수님을 알고, 예수님처럼, 봄처럼, 살게 합니다. 저절로 솟아나는 참 자주 많이 나눴던, 늘 고백해도 늘 새로운 주님께 대한 사랑의 고백입니다. "예수님은 누구인가?"에 대한 저의 답변입니다.
“예수님, 당신은 저의 전부이옵니다.
저의 사랑, 저의 생명, 저의 희망, 저의 기쁨, 저의 행복이옵니다.
하루하루가 감사와 감동이요 감탄이옵니다.
날마다 당신과 함께 시작하는 아름다운 하루이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