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2015.9.5. 연중 제22주간 토요일

by 프란치스코 posted Sep 05,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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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9.5. 연중 제22주간 토요일                                                                                                        콜로1,21-23 루카6,1-5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

이 한마디로 모든 복잡하고 혼란한 상황이 말끔히 정리되는 느낌입니다. 예수님 당신이 우리 삶의 중심이심에 대한 선언입니다. 유일한 분별의 잣대는 주님이시오, 당신을 중심으로 안식일법은 물론 모든 것을 상대화하심으로 우리를 참으로 자유롭게 하는 주님이십니다. 이런 주님 앞에 우상들은 자리가 없습니다. 절대적인 분은 삶의 중심인 주님뿐이요 모든 것은 상대적일 뿐입니다. 


‘당신들은 어째서 안식일에 해서는 안되는 일을 하느냐’는 바리사이들의 항의에 난감해하는 제자들을 대신하여 한 말씀으로 중심을 잡아 주는 예수님이십니다. 이런 체험을 통해 제자들은 ‘보라, 하느님은 나를 도우시는 분이시다.’라는 화답송 후렴을 잘 이해하였을 것입니다.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

죽으시고 부활하신 죽음과 삶의 주인이신 파스카의 주님은 우리 삶의 중심이자 기반이요 배경이라는 말씀입니다. 삶의 중심을 잃어 방황이요 혼란입니다. 파스카의 주님을 통해 우리는 하느님과 화해하여 진정 마음의 평화와 안정을 누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바오로의 장엄한 고백이 진정 우리를 위로하고 격려합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하여 그분의 육체로 여러분과 화해하시어, 여러분이 거룩하고 흠 없고 나무랄 데 없는 사람으로 당신 앞에 설 수 있게 해주셨습니다. 여러분은 믿음에 기초를 두고 꿋꿋하게 견디어 내며 여러분이 들은 복음의 희망을 저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파스카의 주님 안에 믿음으로 정주할 때 하느님과 화해된 삶이요, 거룩하고 흠 없고 나무랄 데 없는 사람으로 하느님 앞에 설 수 있습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삶은 견디어 내는 것입니다. 때로는 슬픔도, 절망도, 아픔도 견디어 내야 합니다. 바로 파스카의 주님께 희망을 둘 때 꿋꿋하게 견디어 낼 수 있는 힘을 받습니다.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 외쳤던 석가모니의 말씀도 생각납니다. 얼마나 당당한 인간선언입니까? 바로 내가 세상의 중심이라는 선언입니다. 우리 하나하나가 세상의 중심이라는 선언입니다. 사람의 아들인 당신처럼 각자 주체적 인간으로 하늘 향해 우뚝 서라고 나무처럼 직립인간입니다. 세상 우상들에 휘둘리지 말고 또 하나의 예수님이 되어 참 나를 살라는 것입니다. 파스카의 주님과 일치될수록 내 삶의 자리에 주인이 되어 자존감 충만한 고유의 참 나를 살 수 있습니다.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

존엄한 인간품위를 확인시켜주는 말씀입니다. 문명의 야만시대를 대하며 과연 인간의 진보는 가능한지 묻게 됩니다. 사람의 아들인 파스카의 예수님이 바로 ‘오래된 미래’입니다. 파스카의 주님과 일치되어 살았던 모든 성인들 역시 ‘오래된 미래’이자 희망의 표지입니다. 미래가 없다고 희망이 없다고 탄식할 것은 없습니다. ‘오래된 미래’인 예수님이나 성인들이 우리의 미래요 희망입니다.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

우리 삶을 총괄하시는 파스카의 주님이십니다. 아무도 주님 섭리의 그물망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모든 시간이 주님 손 안에 있습니다. 모든 것이 주님의 은총입니다. 며칠전 동방영성에 관한 책을 읽던 중 다음 영어 말마디가 깊은 위로와 평화를 주었습니다.


‘There is really nothing worse in life’


우리 삶에서 더 나쁘다할 일은 실제 없다는 것입니다. 지나고 보면 다 그렇고 그런 일입니다. 바로 주님의 시야를 얻을 때 이런 초연한 자유요, 긍정적 낙관적 인생입니다. 절대로 비관할 것도, 슬퍼할 것도, 절망할 것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쨌든 잘 될 것입니다. 


다시 한 번 나누고 싶은 중력重力과 신력信力의 비교입니다. 물체가 아래로 떨어지고 열매가 아래로 향하는 것이나, 아랫배가 나오고 얼굴이 나이들어 아래로 쳐지고 젖가슴이 아래로 늘어지는 것이나 모두가 바로 중력탓입니다. 지구에 살아있는 한 누구나 중력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서있는 것보다는 앉아 있는 것이, 앉아있는 것보다는 누워있는 것이 편한 것도 중력탓입니다. 중력이 점점 아래로 끌어내려 서서히 우리를 무너뜨리고 마지막에는 죽음입니다. 


예수님의 승천, 예수님이 물위를 걸으심, 베드로가 잠시 물위를 걸음, 모두 하늘을 나는 천사들, 모두 중력을 벗어남에 대한, 무아無我에 대한 상징입니다. 중력에 거슬러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어서게 하는 힘이 바로 영혼의 힘이자 신력입니다. 


영적 삶의 본질도 중력과 신력의 차이입니다. 몸은 중력의 영향으로 날로 쇠락해가더라도 영혼은 늘 하느님을 향해야 합니다. 몸이야 세월의 풍화작용을 겪는다 해도 영혼은, 믿음과 희망과 사랑의 힘으로 날로 새로워지고 깊어져야 합니다. 


중력에 패한 듯 하지만 실상 승리한 신력의 사람들이 바로 우리의 ‘오래된 미래’가 성인들입니다. 답은 단 하나 안식일뿐 아닌 모두의 주인이신 파스카의 주님과 하나 되어 사는 길뿐입니다. 이래야 숙명론자가 비관론자가 되지 않습니다. 주님은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중력의 영향에도 불구하고 늘 깨어 새롭게 시작할 힘을 주십니다.


“주님, 당신의 기적들을 낱낱이 전하오리다. 지극히 높으신분, 저는 당신 안에서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당신 이름 찬미하나이다.”(시편9,2-3).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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