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의 길 -어떻게 살아야 하나?-2015.9.6. 연중 제23주일

by 프란치스코 posted Sep 06,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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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9.6. 연중 제23주일                                                                                            이사35,4-7ㄴ 야고2,1-5 마르7,31-37


                                                                                            구원의 길

                                                                                   -어떻게 살아야 하나?-


“내 영혼아 주님을 찬양하여라.”

화답송 후렴처럼 주님을 찬양하는 영혼이 되어 우리 모두 미사에 참석하고 있습니다. 어제 하루 일간지와 교회신문을 보며 저절로 ‘어떻게 살아야 하나?’라는 탄식이 저절로 흘러나왔습니다. 전세계적으로 겪는 혼란이지만 유독 우리나라의 현실은 참 엄중하고 출구가 잘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빛과 어둠이 공존하는 현실이지만 화려한 외관과는 달리 내적으로 너무 망가져 있고 허약하다는 사실이 가슴을 칩니다. 마치 무겁고 힘든 과제를 가득 안고 강론을 준비하는 기분입니다. 


긍정적으로, 낙관적으로 보려해도 부정적으로 비관적으로 기울게 됩니다. 정확한 현실인식이 우선입니다. 체감온도라는 것이 있습니다. 많은 분들의 면담을 통해서도 얼마나 고단하고 희망없는 세상인지 깨닫습니다. 한사람, 한사람의 삶이 여유가 없고 위태해 보입니다. 참으로 심신이 건강한 사람, 행복한 사람, 자유로운 사람을 만나보기 힘듭니다. 잘 아시겠지만 몇 가지 부정적 현실을 소개합니다.


가톨릭 신문 1면에는 ‘자연 할퀴고 찢어가며 무엇을 위해 개발하나?’라는 제하에 ‘제2의 4대강 사업’이 될 수 있는 설악산 오색케이블카 설치 반대운동에 대한 소개였습니다. 요즘 교황님의 생태회칙에 이어 생태영성, 생태신학 등 생태란 말마디 역시 절박한 화두로 회자되고 있는 현실입니다. 사람은 절대로 자연에 의존하고 있기에 자연이 망가지면 저절로 사람도 망가지기 마련입니다. 구체적으로 인류의 미래는 인간과 자연인데 자연이 망가지고 사람이 망가지면 인류의 미래는, 희망은 없기 때문입니다.


평화신문 사설에는 ‘자살 예방 위해 교회와 세상 연대해야’하는 글을 통해서도 자살이 얼마나 심각한 사회문제인지 깨닫게 됩니다. 2013년 기준으로 인구10만명당 한국의 자살 사망률은 29.1명으로 OECD회원국 평균12.0명의 두 배를 넘어 회원국중 자살률 1위였다는 것입니다. 지난 8월30일 교육부 학생 ‘자살현황’ 자료에 의하면 올해 들어 8월17일까지 성적비관, 우울증 등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은 학생이 61명이 됐다는 것입니다.


요즘 청년들 사이에 회자되고 있는 말이 ‘헬조선’입니다. ‘헬한국’도 아닌 ‘헬조선’이라하며 지옥같은 현실을 풍자합니다. 경향신문12-13면도 온통 ‘헬조선과 노오력’ 제하에 '미개한 한국, 공동체 해체, 청년들 노예 삶, 금수저로 태어나지 못해, 환멸로 끝나는 분노, 노오력 강요하는 사회, 노오력해도 안되는 것들’ 등 자극적인 주제로 현실을 분석했습니다. 


위키백과에 까지 소개된 3포, 5포, 7포 세대였습니다. 연애, 결혼, 출산의 3포에, 인간관계와 집을 포기한 5포세대, 꿈과 희망마저 포기한 7포세대입니다. 남의 문제가 아니라 내 자식문제요 우리의 적나라한 현실입니다. 꿈과 희망이 없는 곳, 바로 거기가 지옥입니다. 이런 상황일수록 역설적으로 복음선포는 절박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을 찾을 때 길이 보입니다. 이런 현실을 전제로 한 오늘의 강론 주제는 ‘구원의 길’이고 부제로는 ‘어떻게 살아야 하나?’입니다.


첫째, 하느님을 꿈꾸십시오.

우선 하느님을 꿈꾸는 이상주의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진정 이상주의자만이 현실주의자가 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이 구원의 출구입니다. 하느님께로 탈출이 구원입니다. 하느님만이 우리 궁극의 미래요 희망입니다. 희망과 꿈, 비전이 없는 곳이 지옥입니다. 희망과 꿈을 잃으면 힘든 삶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악마의 가장 집요한 유혹이 꿈을, 희망을 포기시키는 것입니다. 살기위해 부단히 하느님을 꿈꿔야하고 하느님 희망을 가꾸고 돌봐야 합니다. 기도해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께 찬미와 감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바로 예언자가 보여준 길이며 오늘날도 지옥같은 세상에서 천국을 사는 이들이 보여주는 길입니다. 현실에 투신할수록 간절한 기도는, 하느님 찬미와 감사는 함께 해야 합니다. ‘그래서’ 찬미가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찬미와 감사가 운명을 바꿉니다. 화답송 후렴처럼 이사야를 통해 보여주는 하느님 꿈은 얼마나 눈부시고 고무적인지요.


“그때에 눈먼 이들은 눈이 열리고, 귀먹은 이들은 귀가 열리리라. 그때에 다리저는 이는 사슴처럼 뛰고, 말못하는 이의 혀는 환성을 터뜨리리라. 광야에서는 물이 터져 나오고, 사막에서는 냇물이 흐르리라. 뜨겁게 타오르던 땅은 늪이 되고 바싹 마른 땅은 샘터가 되리라.”


그때가 바로 오늘 지금 여기입니다. 바로 미사은총을 통한 내적변화를 상징합니다. 하느님 꿈의 현실화입니다. 절망은 희망으로, 지옥은 천국으로 변합니다. 이처럼 동토의 절망의 땅에서 하느님을 꿈꿨던 예언자요 무수한 성인 선배들이었습니다. 바로 이런 예언자와 성인들이 우리의 '오래된 미래'요 희망입니다. 


둘째,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요즘처럼 불안하고 두려울 때는 없었습니다. 인간의 근원적 정서가, 알수 없는 심연의 블랙홀이 두려움과 불안입니다. 오죽했으면 수도원 십자로 예수부활상 받침의 바위판에 새겨진 글귀가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였겠습니까? 정도나 양상의 차이일 뿐 대한민국 사람들 모두가 두려움과 불안속에 살아갑니다. 


미래는 물론 현재가 너무나 불확실하기 때문입니다. 곳곳에 함정이요 유혹이요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안전입니다. 두려워하기로 하면, 불안하기로 하면 끝이 없습니다. 두려움과 불안을 증폭시키는 것 역시 악마의 유혹입니다. 하느님 꿈의 빛을 잃는 그 자리에 저절로 채워지는 두려움과 불안의 어둠입니다. 이래서 끊임없이 찬미와 감사로 하느님 꿈을 노래해야 합니다. 마음이 불안한 우리 모두에게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이사야 예언자입니다.


“굳세어져라. 두려워하지 마라. 보라, 너희의 하느님을! 그분께서 오시어 너희를 구원하신다.”


미사를 통해 실현되는 이사야의 예언입니다. 미사를 통해 오시는 주님께서 우리를 위로하시고 격려하시며 우리 모두 굳세게 하십니다. 온갖 두려움과 불안의 어둠을 몰아내십니다. ‘기쁨과 평화’라는 구원의 선물을 주십니다.



셋째, 차별하지 마십시오.

하느님은 차별하지 않는 분이십니다. 하나하나 모두가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차별보다 더 큰 죄도 없습니다. 이웃에 대한 차별은 바로 하느님을 몹시 아프게 하는 것입니다. 인종, 남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모두에게 평등해야 합니다. 공존공생, 더불어 숲을 이루어 사는 삶이 구원의 길입니다. 추상적 사랑이 아니라 차별하지 않는 사랑이 진정한 사랑입니다. 차별로 인한 무시보다 더 큰 아픔은 없습니다. 


하느님을 만난 겸손한 사람들의 우선적 특징이 차별없는 사랑입니다. 구별이나 분별은 필요하지만 차별은 무조건 거부해야 합니다. 차별 또한 악마의 유혹입니다. 영광스러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서, 사람을 차별해서는 안됩니다. 스스로의 인격을 더럽히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세상의 가난한 사람들을 골라 믿음의 부자가 되게 하시고,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약속하신 나라의 상속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정말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사람을 차별하지 않습니다. 평범해보이나 차별없는 사랑이 제일입니다. 이제 갓 열일곱 언저리. 어린 고등학생의 입에서 나왔다는 말에 가슴 아픈 적이 있습니다.

"우리는 쓰레기예요"
오로지 성적 올리는 데에만 급급해서 아이들에게 그 어떤 자존감도 심어주지 않았던 어른들에 대한 원망의 외침이었을 것입니다. 차별 없는 모두에 대한 사랑과 신뢰가 자존감을 높여줍니다.


넷째, 마음의 귀를 여십시오.

마음의 귀가 열려야 저절로 입도 열려 생명의 말을 나눕니다. 하느님과의 소통에 이어 이웃과도 원활한 소통입니다. 마침내 오늘 복음의 예수님을 통해 이사야 예언이 실현됩니다. ‘그때에 귀먹은 이들은 귀가 열리고, 말못하는 이의 혀는 환성을 터뜨리리라.’ 얼마나 신명나는 예언의 실현인지요. 똑같은 파스카의 주님께서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서 하시는 일입니다. 예수님의 전인적 치유동작이 놀랍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손가락을 그의 두 귀에 넣으셨다가 침을 발라 그의 혀에 대셨다. 그러고 나서 하늘을 우러러 한숨을 내쉬신 다음, 그에게 “에파타!” 곧 “열려라!”하고 말씀하셨다.-


이또한 극진한 하느님 사랑의 표현입니다. 사랑의 마음, 따뜻한 스킨십, 말씀의 능력이 삼위일체가 되어 이뤄진 기적입니다. 마음이 열리니 귀가 열리고 이어 입이 열립니다. 정작 열려야할 것은, 치유받아야 할 것은 닫힌 마음, 완고해진 마음입니다. 편견과 선입견, 고정관념으로 완고해진 굳어지고 거칠어지고 사나워진 마음입니다. 마음따라 보고, 마음따라 듣고, 마음따라 말하기 때문입니다. 이 거룩한 주님의 미사은총이 우리 마음의 귀를, 마음의 눈을, 마음의 입을 열어줍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이 계시기에, 늘 파스카의 주님이 함께 계시기에 살만한 세상입니다. 주님만이 우리의 미래이자 희망입니다. 진정 하느님께 희망을 둔 이들은 사람을, 자연을 아끼고, 보호하는 일에 앞장섭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오늘 구체적으로 구원의 길을 제시해주셨습니다.


1.하느님을 꿈꾸십시오.

2.두려워하지 마십시오.

3.차별하지 마십시오.

4.마음의 귀를 여십시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마음의 귀를 열어주시고, 두려움의 마음 자리에 당신의 빛나는 꿈과 사랑으로 가득채워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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