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으로 삽시다 -사랑하라, 새로워져라, 겸손하라-2020.8.30.연중 제22주일

by 프란치스코 posted Aug 30,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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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8.30.연중 제22주일                                                     예레20,7-9 로마12,1-2 마태16,21-27

 

 

 

참으로 삽시다

-사랑하라, 새로워져라, 겸손하라-

 

 

 

어떻게 살아야 하나? 어떻게 참으로 살 수 있나? 요즈음 누구나 묻게 되는 질문일 것입니다. 코로나19 팬데믹에 대해 구구절절 처방도 많습니다만 딱 부러진 처방은 없습니다. 참으로 불확실하고 예측할 수 없는 미래입니다. ‘탐욕-기후위기-팬데믹19-홍수’라는 일련의 관계를 봅니다. 버려지는 무수한 쓰레기들을 볼 때 마다 정말 이래도 되는가 싶습니다. 뿌리에는 무지의 탐욕이 자리하고 있음을 봅니다. 

 

어제 읽은 ‘사제생활 십요司祭生活 十要’(산위의 마을; 박기호 신부)라는 글이 생각납니다. 사제만이 아니라 믿는 모든 이들이 명심해야할 내용도 있습니다. 아주 잊고 지내기 쉬운 일상적이자 본질적인 요소들입니다.

 

-1.오늘 미사를 나의 첫 미사처럼, 마지막 미사처럼, 오직 한 번뿐인 미사처럼 봉헌하자.

2.미사 30분전 반드시 제대 앞에 앉아 기도하자.

3.모든 사목에서 주님과 동업하고 동료들과 협력하자.

4.복음과 인문학 서적을 늘 가까이 하며 시대의 징표를 주시하자.

5.매일 한 시간 이상 육신 노동으로 건강과 창조성을 일깨우자.

6.매사에 옳음을 따르되 ‘내 생각이 반드시 옳다’고 믿지 말자.

7.화났을 때 결정하지 말고,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을 구별하자.

8.경어와 친절과 예의를 습관되게 하고, 선물은 감사히 받되 즉시 나누자.

9.‘부러워할 것’과 ‘부끄러워할 것’을 가려 알자.

10.게걸스럽게 먹지 말며, 명품과 유락을 밝히지 말자.-

 

한마디로 요약하면 오늘 지금 여기에 충실하라는 말씀입니다. 언제나 제자리에서 제정신으로 제몫을 다하며 제대로 살라는 것입니다. 끊임없는 회개로 늘 새롭게 시작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늙음도 죽음도 아닌 녹슨 삶입니다. 맑게 흐르는 강물같은 삶이 아니라 웅덩이에 썩은 물같은 고인 삶입니다. 삶이 녹슬면, 웅덩이에 고인 썩은 물이 되면 모든 것이 무너지기 마련입니다. 막 살아도 안되지만 흐릿하게 살아도 안됩니다. 오늘 지금 여기 깨어 참으로 맑고 향기롭게, 늘 새롭게 살아야 합니다. 어제 주보에서 읽은 어머니를 그리는 아들이 생전에 주고 받았다는 모자의 대화가 감동적이었습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20일전 1월1일 새해 인사차 어머니를 찾아 뵈었다. 그때 평소 안 하던 말씀을 하셨다.

“널 내가 낳았다는 게 믿기지 않아.”

평생을 가톨릭 신자로 살아오신 어머니에게는 맞지 않는 질문을 무심코 해봤다.

“어머니는 이 세상 다시 태어나고 싶으세요?”

“너를 아들로 만난다면 또 태어나고 싶지.”-

 

유언과도 같은 이말보다 자식에게 큰 선물도 없을 것입니다. 분명 아들 마음 안에 영원히 살아있을 참 잘 사셨던 어머니임이 분명합니다. ME모임에서 다시 태어나도 부부가 되고 싶은 분은 손들어 보라 했을 때 가만히 눈을 뜨고 보니 자기 부부뿐이었다는 어느 자매의 고백도 생각납니다. 저 역시 다시 살아도 수도사제로 이렇게 뿐이 살 수 없다는 생각이 들곤 합니다. 

 

요즘 산책때 자주 즐겨 부르는 ‘늙은 군인의 노래’(김민기)가 있습니다. ‘이강산’ 대신에 ‘수도원’을, ‘군인’대신 ‘수도자’를, '어언 30년' 대신 '어언 40년'을, ‘푸른옷’ 대신 수도복 ‘검은옷’을 넣어 불러 보며 영원한 현역, 주님의 전사로서의 신원과 영적 전의戰意를 새로이 하곤 합니다.

 

-“나태어나 수도원에 수도자 되어/꽃피고 눈내리길 어언 40년

무엇을 하였느냐/무엇을 바라느냐/나 죽어 수도원에 묻히면 그만이지

아, 다시 못올 흘러간 내 청춘/검은옷에 실려간 꽃다운 이 내청춘”-

 

정말 하루하루 살아온 전혀 회한도 아쉬움도 없는 수도생활입니다. 그래도 저절로 후반부 “꽃다운 이 내 청춘”을 되뇌며 때로 거울을 보곤 합니다. 퇴영적이 아니라 오히려 저에겐 영적 전의를 새롭게 하는 노래입니다. 저절로 자문해 보는 질문입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나? 참으로 진짜 살고 싶은 것입니다. 셋으로 요약됩니다.

 

첫째, “사랑하라!”입니다.

말씀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주님, 저의 하느님, 제 영혼 당신을 목말라 하나이다.” 화답송 후렴처럼 늘 하느님을 목말라하는 것입니다. 이런 하느님 사랑은, 예수님 사랑은 말씀 사랑으로 표현됩니다. 말씀은 주님의 현존입니다. 말씀은 영혼의 식食이자 약藥입니다. 말씀은 생명이자 빛이자 영입니다. 예언자들은 한결같이 깨어 늘 말씀에 귀기울였던 말씀의 사람이자 말씀을 사랑하고 살았던 말씀의 선포자였습니다. 

 

오늘 제1독서는 예레미야 예언자의 다섯 번째 감동적인 고백입니다. 예언직의 비극에 대한 원초적 고백입니다. 평생 매일 강론을 써야 살아갈 수 있는 저에게도 공감이 가는 고백입니다. 얼마나 하느님을, 말씀을 사랑했던 예레미야인지 깨닫습니다. 

 

“‘그분을 기억하지 않고, 더 이상 그분의 이름으로 말하지 않으리라.’ 작정하여도, 뼛속에 가두어 둔 주님 말씀이, 심장 속에서 불처럼 타오르니, 제가 그것을 간직하기에 지쳐, 더 이상 견뎌내지 못하겠습니다.”

 

주님은 불입니다. 사랑의 불, 말씀의 불입니다. 무지의 쓰레기를 태워버리는, 무지의 어둠을 밝히는 말씀의 불, 사랑의 불입니다. 사랑의 불이, 말씀의 불이 불붙어 정화되고 성화된 영혼은 말씀을, 하느님을, 이웃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둘째, “새로워져라!”입니다.

몸은 노쇠해가도 마음은 늘 새로워져야 합니다. 깊어져야 합니다. 육신의 탄력은 떨어져도 영혼의 탄력이 떨어져선 안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늘 새롭게 시작하는 파스카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결코 무감각, 무기력, 무의욕, 무의미, 무감정, 무의식이 되어선 안됩니다. 하여 끊임없는 하느님 찬미와 감사의 삶과 기도를 강조하는 것입니다. 

 

바로 오늘 제2독서 바오로 사도가 가르쳐 주는 진리입니다. 바로 오늘 ‘그리스도인의 새로운 생활’에 앞서 나온 ‘하느님 찬미가’입니다. 끊임없는 하느님 찬미가 새로운 삶을 위한 마르지 않는 샘임을 깨닫습니다. 바오로의 권고를 통째로 인용합니다. 

 

“여러분의 몸을 하느님 마음에 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치십시오. 이것이 바로 여러분이 드려야 하는 합당한 예배입니다. 여러분은 현세에 동화되지 말고 정신을 새롭게 하여 여러분 자신이 변화되게 하십시오. 그리하여 무엇이 하느님의 뜻인지,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하느님 마음에 들며 무엇이 완전한 것인지 분별할 수 있게 하십시오.”

 

참으로 말씀을 사랑할 때, 하루하루 찬미와 감사의 삶과 기도에 충실할 때, 저절로 정화와 성화의 은총이요 분별력의 지혜임을 깨닫습니다. 그러니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 늘 새롭게 사는 것입니다. 늘 맑게 흐르는 강같은 영혼으로, 늘 녹슬지 않고 반짝이는 영혼으로 늘 깨어 사는 것입니다.

 

셋째, “겸손하라!”입니다.

겸손해야 비로소 사람입니다. 삶은 날로 주님을 닮아가는 겸손의 여정입니다. 삶의 깊이를 반영하는 겸손입니다. 그러니 삶의 모든 부정적 일들은 겸손의 계기로 삼는 것입니다. 그냥 두면 상처지만 겸손의 계기로 활용하면 치유와 더불어 영적성장에 성숙입니다. 

 

섰다 하면 넘어집니다. 예수님의 인정과 축복에 잠시 방심했던 베드로 큰 유혹에 빠져 반석같은 존재가 걸림돌같은 존재로 전락하는 순간 예수님의 충격적인 처방입니다. 말그대로 겸손의 수련입니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타고난 믿음도, 겸손도 없습니다. 겸손할 때 배웁니다. 이런 사건을 통해 베드로는 자기의 한계와 약함을 깊이 체험하면서 겸손을 배웠을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배움의 여정, 겸손의 여정입니다. 겸손을 배워가면서 날로 주님을 닮아가는 우리들입니다. 주님은 겸손의 여정에 결정적 처방을 주십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나?’ 라는 물음은 ‘어떻게 예수님을 따라야 하나?’로 구체화됩니다. 답은 다음 말씀 하나입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그대로 십자가의 길은 겸손의 여정, 비움의 여정임을 깨닫습니다. 예수님을 닮아 참 내가 실현되는 예닮의 여정, 구원의 여정임을 깨닫습니다. 바로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사랑과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날이 갈수록 새로워짐), 겸손의 삶을 살 수 있도록 도와 주십니다. 끝으로 제 자작 좌우명 기도시로 강론을 마칩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일일일생(一日一生), 하루를 평생처럼, 처음처럼, 마지막처럼 살았습니다.

저에겐 하루하루가 영원이었습니다.

어제도 오늘도 이렇게 살았고 내일도 이렇게 살 것입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 받으소서.”-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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