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현역現役, 주님의 전사戰士 -기도, 공부, 노동, 깨어있는 삶-2021.3.26.사순 제5주간 금요일

by 프란치스코 posted Mar 26,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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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3.26.사순 제5주간 금요일                                                           예레20,10-13 요한10,31-42

 

 

 

영원한 현역現役, 주님의 전사戰士

-기도, 공부, 노동, 깨어있는 삶-

 

 

 

미세 먼지 가득한 새벽 밤하늘입니다. 별들이 보이지 않습니다. 이건 안개가 아니라 미세 먼지입니다. 탐욕에 사람들이 미쳐가니 기후도 미쳐갑니다. 요즘 기후는 물론 나라 안팎의 상황이 심히 우려됩니다. 말 그대로 총체적인 위기에 내우외환입니다. 지구의 자연이나 나라나 사회나 가정이나 처지가 흡사합니다. 사상누각, 모래위의 집같은 현실같고 악순환의 반복같습니다. 내부의 사정이 정말 치열한 내전 상태를 방불케 합니다.

 

너무나 극단적으로 갈등하고 대결하는 분열상태입니다. 남북분열, 남남분열---끝이 보이지 않는 분열상들이며 이를 즐기는 주변 강대국들입니다. 나라든 사회든 외적 요인보다는 내적 부패나 분열로 망한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참으로 우리가 살길은 남북의, 남남의 화해와 일치뿐이요 이를 바탕한 어느 편에도 기울지 않는 슬기로운 등거리 균형 외교이겠습니다. 

 

요즘 코로나 바이러스와 더불어 미세먼지가 극성입니다. 이렇게 기후위기가 계속되다가는 공생이 아니라 공멸이 될 것입니다. 불암산 기슭이라 공기가 맑을 것 같지만 기후위기의 결과는 공평합니다. 예외없이 여기 수도원도 탁한 공기입니다. 잘 들여다 보면 초목들도 예전 같이 싱싱하지가 않습니다.

 

바로 우리 인간 세계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주변환경입니다. 사람들 마음이 너무 오염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본능적 탐욕의 바이러스가 여전히 맹위를 떨치며 탐욕의 미세먼지가 마음을 탁하게 합니다. 하느님 중심의 자리에 유령같은 헛것들인 탐욕의 우상이, 돈이, 건강에 대한 과도한 관심이 자리 잡고 있는 상황입니다. 수도원 앞 들판이 십년 사이에 신도시가 들어서고 무수히 늘어나는 아파트들을 볼 때마다 참 답답합니다. 1인 가구의 증가와 더불어 1인마다 집한채 씩이라면 국토가 당해내지 못할 것입니다. 

 

아무리 정책이 좋고 위정자들이 노력해도 이런 각자도생의 탐욕의 사회 분위기라면 참 대책이 없겠습니다. 도대체 인간 본질은 예나 이제나 변함이 없는 것 같습니다. 조선시대나 지금이나 여전한 분열상이요 계속 극한적인 대립과 갈등입니다. 외적이 아니라 철천지 원수처럼 싸우는 안의 적이 더 무섭고 잔인합니다.

 

도대체 제정신이 아닌 미칠 광(狂)자가 들어가는 현실입니다. 평상심이 도라 했습니다. 광신, 광란, 광풍, 열광, 발광, 광분, 광기, 광증 등 평상심의 삶이 참으로 절박한 광(狂)의 시대입니다. 도대체 세상에 이런 나라도 없을 것입니다. 외적 성장과 더불어 참으로 내적 성장과 성숙이 함께 가지 않으면 모래위의 집처럼 위태합니다.

 

사순시기 막바지입니다. 참으로 회개를 통해 하느님 중심의 삶을 회복해야 할 때입니다.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참 난감하지만 답은 가까이 있습니다.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기도와 회개, 진리와 정의, 분별과 절제, 가난과 겸손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요즘 상황을 보면 민심이 천심같지도 않습니다. 공해와도 같은 오염된 편파적인 언론이,  무수한 가짜 뉴스들이 민심을, 여론을 왜곡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각자 깨어 부지런히 공부해야 합니다. 하느님 공부로 영성, 지성, 감성이 조화된 하느님 중심의 인성의 삶에다 역사 공부, 사회 공부, 공동체 공부도 하여 올바른 역사 의식, 사회 의식, 공동체 의식을 지녀야 합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과 제1독서의 예레미야의 고립무원, 사면초가의 처지가 흡사합니다. 예나 이제나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는 현실같습니다. 두 하느님의 사람, 주님의 전사이자 의인이요 예언자인 예수님과 예레미야가 받는 박해의 현실이 오늘날도 여전히 계속됩니다. 그러니 이 두 분들 하느님 중심의 견고한 삶이기에 참으로 외롭고 고독한 악의 현실속에서 무너지거나 오염되지 않고 역경을 통과해 갑니다.

 

민심이 천심이 아닐 수 있음은 예레미야를 박해하는 군중을 통해서도 그대로 드러납니다. “저기 마고로 미싸삽이 지나간다! 그를 고발하겠다.” 가까운 친구들마져 가세하여 예언자를 공격하니 제정신이 아닌 광분의 사람들입니다. 이처럼 편견의 확신이, 이념이, 무지가 참 무섭습니다. 하느님 중심의 삶에서 샘솟는 예레미야의 고백과 찬양이 우리에게 크나큰 격려와 힘이 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힘센 용사처럼 제 곁에 계시니, 저를 박해하는 자들이 비틀거리고 우세하지 못하리이다.--- 의로운 이를 시험하시고, 마음과 속을 꿰뚫어 보시는 만군의 주님, 당신께 제 송사를 맡겨 드렸으니, 당신께서 저들에게 복수하는 것을 보게 하소서.”

 

이어 곧장 터져 나오는 하느님 찬양의 승리가입니다. 

 

“주님께 노래 불러라! 주님을 찬양하여라! 그분께서 가난한 이들의 목숨을, 악인들의 손에서 건지셨다.”

 

주님의 전사로서 진리와 정의, 기도와 말씀, 사랑과 찬양의 무기로 완전무장하고 최선을 다해 싸우되 최종의 결과는 하느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참으로 영적전쟁 치열한 현실에서 승리의 길은 하느님 중심의 삶뿐임을 깨닫습니다. 예수님의 적대자들은 대다수 유다인들입니다. 이들의 무지의 편견도 철벽입니다. 

 

마음의 눈만 열리면 너무나 자명한 하느님께서 예수님과 함께 하시는 표징들인데 무지의 편견에 눈먼 이들에게 보일리 없습니다. 그러나 복음에서 고무적인 현실은 민심이 천심처럼 보이는 일부 유다인들입니다. 요르단강 건너편 세례받던 장소에 피신해 하느님 중심을 새롭게 하던 예수님을 찾은 사람들의 고백이 바로 그 좋은 증거입니다.

 

“요한은 표징을 하나도 일으키지 않았지만, 그가 저분에 관하여 한 말은 모두 사실이었다.”

 

하여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 하니 고립무원의 처지에 있던 예수님께는 천군만마를 얻은 기분이었을 것입니다. 새삼 깨어 공부하는 ‘주님의 전사’가 되어 하루하루 날마다 하느님 중심의 삶을 늘 새롭게 하며 사는 일이 얼마나 본질적이요 결정적인지 깨닫습니다. 주님은 매일의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하느님 중심의 삶을 확고히 해주시며 주님의 전사로서 영적전쟁에 승리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저의 힘이신 주님, 당신을 사랑하나이다. 주님은 저의 반석, 저의 산성, 저의 구원자시옵니다.”(시편18,2-3ㄱ)

 

“곤경중에 나 주님 부르고, 하느님께 도움 청하였더니, 당신 성전에서 내 목소릴 들으셨네. 부르짖는 내 소리 그분 귀에 다다랐네.”(시편18,7).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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