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부는 밭을 탓하지 않는다 -절망은 없다-2021.9.18.연중 제24주간 토요일

by 프란치스코 posted Sep 18,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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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9.18.연중 제24주간 토요일                                                           1티모6,13-16 루카8,4-15

 

 

 

농부는 밭을 탓하지 않는다

-절망은 없다-

 

 

 

"좋으니이다 지존하신 님이여, 주님을 기려 높임이, 

그 이름 노래함이 좋으니이다.

아침에는 당신의 사랑, 밤이면 당신의 진실을 알림이 좋으니이다.

 

주님 하시는 일로 날 기쁘게 하시니,

손수 하신 일들이 내 즐거움이니이다.”(시편92,2-3.5)

 

아침 성무일도 시편이 은혜롭고 아름답습니다. 전례영성, 순교영성과 더불어 시편영성 역시 가톨릭 교회의 정통적 영성입니다. 어제는 전형적인 가을 날씨였고 지난 밤 역시 달빛, 별빛 밝았던 청명한 하늘이었습니다. 새삼 코로나로 인한 마스크가 없다면 얼마나 좋은 가을이었겠나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문득 예전 24년전 써놨던 짧은 시가 생각났습니다. 

 

-“산처럼

머물러 정주하면

푸른 하늘

흰 구름

빛나는 별들

아름다운 하느님

배경이 되어 주신다”-1997.8.11.

 

흡사 지난밤 분위기가 그랬습니다. 더불어 떠오른 강론 제목도 반가웠습니다. “농부는 밭을 탓하지 않는다-절망은 없다-”였습니다. 우리 모두 ‘삶의 농부’입니다. 삶의 농부들인 우리들은 ‘농부 하느님(요한15,1)’을 닮아 삶의 밭을 탓하지 않습니다. 탓할 것은 다른 무엇도 아닌 자신뿐입니다. 

 

절망은 없습니다. 하느님 사전에 없는 낱말이 ‘절망’입니다. 더불어 생각난 한자 말마디가 ‘최선을 다하고 결과는 하늘님께 맡긴다’는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이었습니다. 새벽, 멀리 독일에서 보내준 수녀님의 진솔하고 아름다운 카톡 편지에 감동했고 감사했습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존경하올 프란치스코 신부님! 안녕하세요. 요즈음 대피정을 하면서 신부님의 저서를 영적독서로 삼아 읽고 있지만 이번에는 더욱 동감이 갑니다. 그래서 침묵 시간을 깨고 신부님께 제 마음과 감사인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피정중에 읽어가는 글 마디마디가 더욱 깊이 마음에 와닿고 있습니다. 신부님! 감사드립니다. 늘 영육으로 건강하시길 기도합니다. 독일의 고즈넉한 수도원에서 기도의 손을 합장하고 토마 수녀 올림-

 

아름다운 글과 말과 환경이 우리를 감동하게 하고 마음을 순수하게 하고 살아갈 힘을 줍니다. 광야曠野인생은 낙원樂園인생으로 변모합니다. 살 줄 몰라 불행이요 살 줄 알면 행복입니다. 코이노니아 자매회 카톡방의 덕담德談들이 마음 훈훈하고 따뜻하게 했습니다. 회원중 한 분이 평화방송에 청중으로 나왔는데 한 회원님이 재치있게 사진에 담은 것입니다.

 

-“축하드립니다.”

“흐미 부끄럽습니다. 가톨릭 청춘 어게인 추석편입니다.”

“아, 예고편이었네요. 노래를 따라하는 모습이 예뻤어요.”

“부끄럽고 감사합니다.”

“참석자들도 예쁘지만 글라라 자매가 박수치며 미소짓는 모습이 너무 예쁘네요.”

“글라라 자매님이 제일 멋지고 품위있어 보입니다!”

“신부님, 몸둘 곳을 모르겠습니다. 감사드립니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답니다. 진심어린 미소와 유머. 덕담과 칭찬등 긍정적 말마디가 참으로 절실한 시절입니다. 절망은 없습니다. 그래도 살만한 세상입니다. 탓할 것은 그 무엇도 아닌 나 자신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그래도(?)’ 라는 섬 이름이 생각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래도 행복하게 사는 것은 우리의 의무이자 책임이고 권리입니다. “들을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루카8,8ㄴ), 바로 오늘 말씀이 주는 가르침이자 깨우침입니다.

 

오늘 복음을 바탕으로 강론하기가 무려 만32년이지만 늘 대할 때 마다 새롭습니다. 오늘 복음은 ‘씨뿌리는 사람의 비유’, ‘비유로 말씀하신 이유’, ‘씨뿌리는 사람의 비유 설명’이라는 세부분으로 이뤄졌습니다. 원래의 씨뿌리는 사람의 비유는 예수님 친히 발설하신 말씀으로 초점은 ‘씨뿌리는 사람’에 있고, 후반부의 비유 설명은 초대교회의 우의적 해설로 초점은 씨가 뿌려지는 ‘토양’에 있습니다만, 예수님의 심중을 그대로 반영했다 싶습니다.

 

씨뿌리는 사람은 바로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씨뿌리는 사람인 예수님 삶의 자세를 배우라는 것입니다. 하느님께 믿음과 희망을 두고 온 사랑으로 최선을 다하는, 신망애信望愛 향주삼덕向主三德이 하나로 어울린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의 자세입니다. 토양에 관계없이, 상황에 일희일비하지 않고, 좌절이나 절망, 실망, 원망함이 없이 한결같이 말씀을 실행하는 삶에 최선을 다하는 모습입니다. 

 

그대로 밭을 탓하지 않는 참된 농부의 모습니다. 얼핏보면 실패의 연속인 듯 했지만 결과는 해피엔딩, 성공입니다. 전투에는 패배한 듯 했지만 전쟁에는 승리입니다. 하느님께서 보시는 바 결과의 업적이 아니라 과정의 충실도요, 사실 진인사대천명 삶자체가 성공입니다. “그러나 어떤 것은 좋은 땅에 떨어져, 자라나서 백배의 열매를 맺었다.”, 전반부 비유의 결론 같은 말씀이 이를 입증합니다.

 

탓할 것은 내 마음밭입니다. 문제는, 바꿔야 할 것은 하느님이 아니라 나의 길바닥같은 얕고 엷은 천박淺薄한 마음이, 돌바닥같은 완고한 마음이, 가시덤불같은 세상 걱정과 탐욕과 쾌락으로 혼란스런 마음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하느님 말씀의 씨앗들이 좋아도 이런 마음밭이라면 별무소득別無所得입니다. 이래서 끊임없는 회개입니다.

 

타고난 나쁜 밭은 없습니다. 이래서 부단한 수행을 말하는 것입니다. 지성이면 감천입니다. 하느님께서 보시는 바, 항구한 한결같은 인내와 분투의 노력으로 시종일관 최선을 다하는 우보천리牛步千里 수행생활입니다. 이렇게 한결같이 충실하다보면 하느님께서도 도와 주시어 언젠가 때가 되면 박토는 옥토로 변할 것입니다. 우공이산(愚公移山;오랜 시간이 걸리더라도 꾸준히 노력해 나간다면 결국엔 뜻을 이룰 수 있다는 뜻의 한자성어로서, 열자(列子) 탕문편(湯問篇)에 나오는 말)이란 중국의 고사성어도 이를 입증합니다.

 

반대의 경우 역시 진리입니다. ‘한가함은 영혼의 원수’라고 사부 베네딕도 성인은 말씀하셨습니다. 아무리 좋은 옥토沃土의 마음밭도 가꾸고 돌보지 않고 방심하여 방치하면 가시덤불 우거진 박토薄土로 변하는 것은 순간입니다. 그러니 적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안에 있는 내가 적입니다. 이래서 삶은 죽어야 끝나는 영적전쟁이요, 우리는 죽어야 제대인 영원한 현역의 평생 주님의 전사가 됩니다. 바오로 사도가 티모데오는 물론 우리 모두에게 신신당부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만물에게 생명을 주시는 하느님, 본시오 빌라도 앞에서 훌륭하게 신앙을 고백하신 그리스도 예수님 앞에서 여러분에게 지시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까지 흠 없고 나무랄데 없이 계명을 지키십시오.”

 

바로 이렇게 주님의 계명을 지키는 수행에 하루하루 최선을 다할 때 오늘 복음의 마지막 말씀처럼 풍성한 수확의 인생이 될 것입니다. 바야흐로 배밭의 가을 수확철이라 더욱 실감나게 와닿는 말씀입니다. 과연 잘 익어가고 있는 내 삶의 신망애信望愛 열매들인지 잘 살펴봐야 하겠습니다.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한 것이 인내의 덕입니다. 

 

“좋은 땅에 떨어진 것은, 바르고 착한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간직하여 인내로써 열매를 맺는 사람들이다.”(루카8,15)

 

이 모두를 제때에 이루실 분은, 

‘복되시며 한 분뿐이신 통치자, 임금들의 임금이시며 주님들의 주님이신 분, 홀로 불사불멸하시며, 다가갈 수 없는 빛 속에 사시는 분, 어떠한 인간도 뵌 일이 없고 뵐 수도 없는 분이십니다.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그분께 영예와 영원한 권능이 있기를 빕니다. 아멘.’(1티모6,1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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