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12.연중 제1주간 금요일 1사무8,4-7.1-22ㄱ 마르2,1-12
분별력의 지혜
-이상주의적 현실주의자의 삶-
“행복하여라, 축제의 기쁨을 아는 백성!
주님, 그들은 당신 얼굴 그 빛속을 걷나이다.”(시편89,16)
근-현대사 공부를 위해 <서울의 봄> 영화와 더불어 김대중 대통령 탄생 100주년 다큐멘터리 기념영화 <길위에 김대중>을 보라고 권합니다. 예전에는 참 많은 반대파들이 있었지만 지금은 좌우를 막론하고 존경받는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국내보다는 세계적으로 알려진 사상가 반열에 들 수 있는 참 탁월한 위인이요 말그대로 전설적 신화적 인물입니다. ‘서생적 문제의식과 상인적 현실감각’을 강조했고 또 그렇게 정치했던 참으로 분별의 지혜를 지니셨던 분입니다.
이상주의자냐 현실주의자냐? 좌파냐 우파냐? 양자택일의 문제가 아니라 둘을 다 아우르기 위해서는 분별의 지혜가 절대적입니다. 서생적 문제의식이 이상주의적 측면이라면 상인적 현실감각은 현실주의적 측면입니다. 이 둘을 아우를 때 모두가 선망하는 이상주의적 현실주의자라 할 수 있습니다. 좌파도 우파도 아닌 예수님파라 함은 이 둘을 아우른 경지라 할 수 있고, 바로 분별력의 지혜를 강조한 성 베네딕도가 이상주의적 현실주의자라 할 수 있습니다. 강대국 사이에 늘 전쟁의 위기속에 살아가는 남북의 지도자에게 참으로 절실한 분별의 지혜요 이런 양극단을 아우른 통합적 사고이겠습니다.
‘영적일수록 현실적이다(the more spiritual...the more real)’, 수십년이 지난 지금도 명심하고 있는 말마디입니다. 영성과 현실이 분리된 것이 아니라 참으로 영적일수록 현실적이란 말입니다. 신적일수록 인간적이요, 진정 이상주의자라면 현실주의자라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분별의 지혜요 바로 예수님이, 성 베네딕도가 교회의 무수한 성인들이 그 모범이겠습니다. 지도자가 지녀야할 우선적 덕목으로 분별력의 지혜를 강조하는 성 베네딕도입니다.
“이밖에도 모든 덕행들의 어머니인 분별력의 다른 증언들을 거울삼아, 모든 것을 절도있게 하여 강한 사람은 갈구하는 바를 행하게 하고, 약한 사람은 물러나지 않게 할 것이다.”
분별의 지혜의 눈으로 보면 일률적으로 한 잣대를 사용할 것이 아니라 각자의 고유한 잣대를 필히 고려해야 할 것입니다.
구약의 정의와 공정을 외친 예언자들이 한결같이 시인이었음은 바로 이들이 이상주의적 현실주의자였음을 입증합니다. 시인이나 예술가인 대통령이 있다면 그는 참으로 멋진 이상주의적 현실주의자일 것입니다. 바로 가톨릭교회의 아름다운 전례은총이 이상주의적 현실주의자인 신자들이 되게 함을 봅니다. 하느님의 아름다움에 깊이 뿌리내릴수록 분별의 지혜를 지닌 예수님을 닮은 이상주의적 현실주의자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도자일수록 디테일에 강해야 한다는 뜻도 이상주의자이면서 지극한 현실주의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겠습니다. 성 베네딕도 규칙을 보면 성인이 얼마나 디테일에 강한 섬세한 배려의 인물인지 감복하게 됩니다. 예수님 탄생시 하늘로부터 들려온 하느님 찬미도 생각납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평화”
하늘엔 영광, 땅엔 평화, 바로 이상주의적 현실주의자로서의 하느님의 진면목을 대하는 듯 합니다. 참으로 하느님의 영광을 추구하는 이상주의자라면 땅에서의 평화의 현실주의자로 화답해야 할 것입니다.
제가 70대 넘어서면서 집중해 보는 것이 자서전과 평전입니다. 참 감명깊었던 평전중 하나가 병자호란시 나라를 구한 충신, <최명길 평전>입니다. 당시 주전파와 주화파의 대결이 참 치열했던 때입니다. 주전파이자 명분론자 김상헌이 있었다면 주화파이자 실리론자 최명길이 있습니다. 만일 주전파 김상헌의 말을 들었다면 조선은 신흥 강국 청나라에 초토화되어 재기 불능했을 것입니다. 아니 진작 분별의 지혜를 발휘했다면 병자호란의 참화도 막았을 것입니다. 천만다행 늦게나마 인조가 최명길의 편을 들어 나라를 살렸습니다. 지도자의 역할이 나라의 존망에 얼마나 결정적인지 오늘에 주는 교훈이 참 큽니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을 보셔요.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저렇게 할 수 뿐이 없을까 하는 회의도 듭니다. 그렇게 많은 무고한 국민들이 죽었는데... 승패에 관계 없이 모두가 패한 어리석은 전쟁입니다. 물론 추호도 패권국가 러시아를 옹호할 생각은 없습니다. 국가지도자의 우선적 책무는 안보요 전쟁을 방지하는 것입니다. 전쟁나면 일상의 모두가 정지되고 그 상처가 너무 깊고 오래갑니다. 정말 한반도는 역사상 너무 많은 피를 흘렸으니 더 이상 전쟁은 없기를 바라며 기상하자마자 부르는 만세칠창중 세 번째 만세입니다.
“대한민국-한반도 만세!”
<최명길 평전> 겉표지에 말마디가 이상주의적 현실주의자인 그의 업적을 요약합니다. “망국의 벼랑 끝에서 나라를 구한 외교관, 도탄에 빠진 백성을 살린 정치가”, 명분도 좋지만 살아야 명분도 있지 죽으면 명분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요! 제가 이런 묵상을 한 것은 오늘 제1독서 사무엘 상권의 내용 덕분입니다. 하느님을 대변한 이상주의자 사무엘과 주변의 엄중한 상황에 위기 의식을 느낀 현실주의자 이스라엘 원로들의 의견이 첨예한 대립입니다.
“어르신께서는 이미 나이가 많으시고 아드님들은 당신의 길을 따라 걷지 않고 있으니, 이제 다른 모든 민족들처럼 우리를 통치할 임금을 우리에게 세워 주십시오.”
사무엘이 언짢아 마음에 그대로 전달했을 때 주님의 반응입니다.
“백성이 너에게 하는 말을 다 들어 주어라. 그들은 너를 배척한 것이 아니라, 나를 배척하여 더 이상 나를 자기네 임금으로 삼지 않으려는 것이다.”
자식이기는 부모없다고 백성이기는 하느님도 없는 듯 합니다. 왕정제도를 고집하는 원로들의 현실주의를 탓할수만도 없고, 하느님을 섬기고 따르는 이상주의를 고수하기도 힘드니 백성들의 처지가 참으로 진퇴양난입니다. 사무엘은 왕정제도의 폐단을 상세히 열거합니다만 백성들의 결정은 요지부동입니다.
“상관없습니다. 우리에게는 임금이 꼭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다른 민족들처럼, 임금이 우리를 통치하고 우리 앞에 나서서 전쟁을 이끌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들의 말을 들어 그들에게 임금을 세워주어라.”
하느님의 이상주의에 대한 백성들의 현실주의의 승리입니다. 폭군(暴君)이나 암군(暗君), 혼군(昏君)이 아닌 세종대왕 같은 성군(聖君) 만나기는 얼마나 힘든지요! 오늘날 반복되는 역사 현실 아닙니까? 참으로 백성을 사랑했고 백성의 신뢰와 사랑을 온몸에 받았던, 다방면에 천재라 일컬었던 조선의 두 성군인 세종과 정조는 결코 신하들에게 휘둘렸던 문약(文弱)한 인물이 아녔음을 주목해야 할 것입니다.
저는 오늘 복음에서 이상주의와 현실주의의 극복대안을 찾았습니다. 바로 믿음입니다. 참으로 날로 깊어가는 하느님 믿음이 이상주의적 현실주의자의 삶을 살게 한다는 것입니다. 복음의 중풍병자의 믿음 좋은 동료들이 그 좋은 증거입니다. 동료인 중풍병자가 주님을 만나 치유받는 것이 이상이라면 현실은 절망적입니다. 첩첩의 군중을 뚫고 주님께 이를 길이 없음이 현실입니다. 궁즉통(窮則通)! 바로 믿음의 기적입니다. 이상(理想)의 현실화(現實化)를 가능하게 한 믿음의 기적입니다.
네 동료들의 믿음은 얼마나 간절하고 절박했는지, 이들의 믿음의 눈이, 지혜의 눈이 열려 이들은 주님께서 계신 자리의 지붕을 벗기고 구멍을 내어 중풍병자가 누워있는 들것을 달아 내려 보내니 그 믿음을 보시고 감동하신 주님의 2차에 걸친 전인적 치유선언입니다.
“얘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동료들 덕분에 죄를 용서받듯이 교회공동체의 믿음 덕분에 죄를 용서받는 우리들입니다. 죄의 용서를 통한 영혼의 치유에 이은 육신의 치유이니 전인적 치유가 뒤를 잇습니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 들것을 들고 집으로 돌아가거라.”
모두가 크게 놀라 하느님을 찬양하니 해피엔드로 끝나게 하는 믿음의 위력입니다. “이런 일은 일찍이 본 적이 없다.” 군중들의 믿음에도 큰 자극이자 도전이 됐을 것입니다. 참으로 하느님께 대한 간절하고 절실한 믿음이 주님을 닮아 이상주의적 현실주의자가 되어 분별의 지혜를 발휘하며 살게 함을 봅니다. 주님의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의 영적 중풍병을 치유하여 온전한 분별력의 지혜를 지닌 이상주의적 현실주의자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하느님의 자애를 영원토록 노래하리라.
내 입으로 그 진실하심을 대대에 전하리라.”(시편89,2).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