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3.6.사순 제3주간 수요일 신명4,1.5-9 마태5,17-19
사랑이 답이다
-사랑은 율법의 완성, 분별의 잣대-
"주님, 내 마음이 당신을 향하여 있사오니,
주여 이 종의 영혼에게 기쁨을 주소서."(시편86,4)
저에게 공부는 단 둘 뿐입니다. 하나는 “참사람되기위한”공부, 하나는 “잘 죽기위한” 공부입니다. 남은 동안의 평생공부도 둘 뿐입니다. 제가 매일 강론 쓰는 목적도 실은 여기에 있습니다. 제가 자주 소개했던 기도이자 사랑의 표현이었던 만세육창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기상하여 하루가 시작되기전 양손을 활짝 펴들고 예수님의 십자가와 태극기 앞에서 날마다 부르는 “만세육창-하느님 만세, 예수님 만세, 대한민국:한반도 만세, 가톨릭교회 만세, 성모님 만세, 요셉수도원 만세-”입니다. 그런데 어제 반가운 카톡 메시지를 받았습니다. ‘만세를 부르자’ 라는 글이었습니다.
“두 팔을 하늘 높이 쳐들고 만세를 부르자.
만세를 부르면 회색빛 심장이 뚝 떨어져 나간다.
어떤 치욕이 우리를 짓누를지라도 우리는 벌떡 일어서 만세를 부르자.
온몸의 힘이 다 빠져나가도 힘들다고 징징 울지 말자.
일어나서 만세를 부르자.
몸에서 툭 소리를 내며 고통이 떨어져 나간다.
만세를 부르면 힘이 난다.
치욕도 살비듬처럼 가볍게 떨어져 나간다.
아무데서나 벌떡 일어나 만세를 부르자”
-<10cm 예술> 김점선-
만세부르기는 참 좋은 기도이자 운동으로 뇌졸증 예방에도 좋다합니다. 사실 몸과 마음을 다한 만세보다 절박한 기도도, 사랑도 없을 것입니다. 호기심에 "김점선" 이름을 검색해 봤더니, 1946년 출생, 2009년 3월22일 별세. 홍익대 대학원 서양학과 졸업. 1년 365일, 하루 24시간 내내 그림을 그리고 싶어 잠자는 시간도 아까워했던 화가로 소개되어있었습니다. 만63세로 타계하기 전까지 참으로 치열하게, 가열차게 살았던 화가이자 시인이었습니다.
사랑이 답입니다. 사랑밖엔 답이 없습니다. 사랑밖엔 길이 없습니다.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 사랑은 분별의 잣대입니다. 삶은 싸움이자 전쟁입니다. 젊었을 때에는 공부와 싸우고, 중년에는 일과 싸우고 노년에는 병마와의 싸움입니다. 그러나 우리 신자들의 싸움은 믿음의 싸움, 희망의 싸움, 사랑의 싸움, 인내의 싸움입니다. 특히 노년에 병고를 겪는 분들을 보면 고통의 삶자체가 “십자가의 길”임을 봅니다.
새삼 습관의 중요성을 깨닫습니다. 영성은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구체적 습관입니다. 노년에는 마음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습관으로 삽니다. 몸에 밴 습관이 얼마나 중요한지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합니다. 무엇보다 일찍부터 하느님 믿음을, 희망을, 사랑을 선택하고 훈련하여 습관화하는 것입니다. 믿음도 희망도 사랑도 선택이요 훈련이요 습관임을 깨닫습니다. 노년의 병마와의 싸움에 승리도 이런 신망애(信望愛)의 훈련이 잘 되어 습관화되어 있을 때 가능함을 체험합니다.
제가 근래 참 많이 강조한 “선택-훈련-습관”의 도식입니다. 이런 면에서 수도공동체가 평생 날마다 마음을 담아 바치는 “시편성무일도와 미사 공동전례기도”보다 더 좋은 신망애(信望愛)의 훈련은 없을 것입니다. 마침 오늘의 다산 어록과 공자의 말씀도 좋았습니다.
“공부는 사람을 깨닫고 사람을 사랑하는 과정이다. 그 시작은 나를 알고 나를 사랑하는 것이다.”-다산
“번지가 인(仁)에 대해 묻자 공자가 대답했다.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다.’ 지(知)에 대해 묻자 공자가 답했다. ‘사람을 아는 것이다.’-논어
사랑과 앎은 분리된 것이 아니라 하나입니다. 사랑할 때 알기 때문입니다. 사랑해서 사람이요 공부중의 평생공부가 사랑공부입니다. 인생은 사랑의 학교요, 우리는 죽어야 졸업인 영원한 현역의 평생학인(平生學人)입니다. 저는 이런 자세로 매일 강론을 씁니다. 아무리 공부해도 신망애(信望愛)에는 영원한 초보자같습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과 율법”과의 관계를 나타냅니다.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과 땅이 없어지기 전에는, 모든 것이 이루어질 때까지 율법에서 한 자 한 획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예수님의 율법 사랑은 얼마나 단호하고 결연한지요! 율법이나 예언서야 말로 하느님 사랑의 총화라 할 수 있습니다. 참으로 이들의 완성은 사랑뿐임을 깨닫게 되며, 이어 예수님의 복음은 사랑의 구체적 실천을 알려주는 내용들이 소개됩니다. 예수님의 하느님 사랑은 계명들에 대한 사랑으로 표현됩니다.
“그러므로 이 계명들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것 하나라도 어기고, 또 사람들을 그렇게 가르치는 자는 하늘 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라고 불릴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하늘 나라에서 큰 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
하느님을 사랑하듯 계명들을 사랑한 예수님이요, 율법 하나하나가 하느님 사랑의 표현이기에 그토록 소중한 것입니다. 그러니 율법의 어떠한 세부조항도 소홀히 다뤄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사랑은 추상적이 아니라 율법의 준수를 통해 구체성을 띄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본능적으로 표현을 찾습니다. 사실 모든 율법준수나 수행은 사랑의 표현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자연을 사랑하고, 기도를 사랑하고, 노동을 사랑하고, 공부를 사랑하고, 정결을 사랑하고, 성독을 사랑하고, 단식을 사랑하고, 순종을 사랑하고, 가난을 사랑하고, 수도생활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랑의 수행과 더불어 마음의 순수에 내적자유요 하느님 나라의 실현입니다. 그러다 보면 저절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요 분별의 잣대임을 깨닫게 됩니다. 제1독서 신명기 모세를 통한 주님 말씀은 이런 사랑의 수행에 한결같이 충실한 우리들에게 주는 말씀처럼 아주 고무적입니다.
“너희는 그 사랑의 율법들을 잘 지키고 실천하여라. 그리하면 사람들이 너희의 지혜와 슬기를 보게 될 것이다...우리가 부를 때 마다 가까이 계셔 주시는, 주 우리 하느님 같은 신을 모신 위대한 민족이 또 어디에 있느냐? 또한 내가 오늘 너희 앞에 내놓는 이 모든 율법처럼 올바른 규정과 법규를 가진 위대한 민족이 어디 있느냐?”
그대로 오늘 사랑의 계명을 충실히 준행(遵行)하는 위대한 민족, 가톨릭교회 신자들인 우리를 두고 하는 말씀처럼 들리니 용기백배, 사기충천해지는 느낌입니다. 주님은 하루하루 날마다 이 거룩한 미사전례시 보고 들은 사랑을 우리 모두 마음 깊이 새기고 실천하고 전하라 명하십니다.
“너희는 오로지 조심하고 단단히 정신을 차려, 너희가 두 눈으로 본 것들을 잊지 않도록 하여라. 그것들이 평생 너희 마음에서 떠나지 않게 하여라. 또한 자자손손에게 그것들을 알려주어라.”(신명4,9).
오늘날 교육의 결정적 취약점인 ‘신앙과 전통의 전수(傳受)’ 역시 얼마나 중요한지 새삼 깨닫게 됩니다.
"주님, 저에게 생명의 길 가르치시니,
당신 얼굴 뵈오며 기쁨에 넘치리이다."(시편16,11).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