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도 선택이다 -열망, 회개, 선행, 행복-2019.10.16. 연중 제28주간 수요일

by 프란치스코 posted Oct 16,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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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0.16. 연중 제28주간 수요일                                                   로마12,1-11 루카11,42-46

 

 

행복도 선택이다

-열망, 회개, 선행, 행복-

 

 

가을은 수확의 계절이자 기도의 계절이요 외로움과 그리움의 계절입니다. 무엇보다 기도의 계절이요 하느님을 찾는 계절입니다. 하느님을 찾아 만날 때 비로소 해소되는 근원적 외로움과 그리움입니다. 9월 순교자 성월, 10월 묵주기도 성월, 11월 위령성월이 기도의 계절, 하느님을 찾아야 하는 계절임을 웅변하고 있습니다. 

 

요즘 제 관심사는 ‘성소’가 아니라 ‘죽음’입니다. 참으로 주변에서 이런저런 많은 죽음과 더불어 끊임없는 연미사 신청을 받아 연미사를 봉헌하다보면 죽음이 바로 눈앞에 있다는 느낌을 갖게 됩니다. 사부 성 베네딕도 역시 “날마다 죽음을 눈앞에 환히 두고 살라” 말씀하셨습니다. 

 

낙엽지듯 들려오는 죽음의 소식을 들을 때 마다 하루하루 충실히 처음이자 마지막처럼 살아야 겠다는 각오를 새로이 하게 됩니다. 참으로 죽음을 눈앞에 환히 두고 살 때 환상이나 허상에서 벗어나 오늘 지금 여기에서 열정을 다해 투명한 본질적 삶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행복하게 살아야 합니다. 행복하게 사는 것은 우리의 의무이자 책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복하게 살아야 합니다. ‘차라리’ 자포자기적 삶이 아니라 ‘그래도’ 행복하게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하느님 앞에 갔을 때 묻는 물음은 단 하나, “너는 행복하게 살았느냐?” 일 것입니다. 

 

행복도 선택입니다. 부단히 하느님을 선택할 때 참 행복입니다. 시편 16장 2절 고백이 생각납니다. “주님께 아룁니다. 당신은 저의 주님, 저의 행복 당신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우리의 온갖 열정과 갈망, 열망 모두 하느님을 향한 열정과 갈망, 열망으로 전환할 때 참 행복입니다. ‘하느님께 대한 갈망과 배움에 대한 사랑’에 항구하고 충실할 때 참 행복입니다.

 

지난 10월15일 예수의 성녀 데레사 대축일 미사시 아름다운 본기도 마지막 말마디를 잊지 못합니다. “저희가 언제나 그의 거룩한 가르침을 따라, 참된 성덕의 열망으로 불타오르게 하소서”. 끊임없이 참된 성덕의 열망으로 불타오를 때 참 행복입니다.

 

참된 성덕을 향한 열정이 열망이 우리를 회개에로 이끕니다. 분도 성인 역시 수도승들이 좋은 열정을 가져야 할 것을 촉구하며 규칙서에서 다음처럼 우리의 실천을 촉구합니다.

 

“하느님께로부터 분리시켜 지옥으로 이끄는 쓰고 나쁜 열정이 있듯이, 악습에서 분리시켜 하느님과 영원한 생명에로 이끄는 좋은 열정이 있다. 그러므로 수도승들은 지극히 열렬한 사랑으로 이런 열정을 실천할 것이다.”

 

이런 열렬한 사랑이 성덕의 잣대입니다. 저절로 회개를 열망하게하고 하느님을 찾게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주님은 세 차례에 걸쳐 일부 바리사이들에게 불행을 선언합니다. 우리의 회개를 촉구하는 말씀입니다. 오늘 불행선언의 대상인 바리사이들은 별종의 사람들이 아니라 우리의 보편적 모습일 수 있습니다. 새삼 회개를 통한 선택이 얼마나 본질적인지 깨닫습니다.

 

첫째, 분별의 지혜를 지닐 때 참 행복입니다. 십일조뿐 아니라 의로움과 사랑의 실천도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양자택일의 문제가 아니라 균형과 조화의 문제입니다. 전례만 있고 삶이 없다면, 기도만 있고 일이 없다면 참 공허하기 짝이 없을 것입니다.

 

둘째, 허영이 아닌 진실한 삶을 살 때 참 행복입니다. 바리사이들처럼 윗자리나 인사받기를 좋아하는 것, 이 또한 알맹이가 아닌 껍데기의 허영을 쫓는 일입니다. 참으로 내적 빈곤을 반영하는 허영입니다. 참으로 진실하고 겸손한 속이 꽉 찬 사람들은 결코 허영에 휘말리지 않습니다.

 

셋째, 위선에서 벗어나 진실한 삶을 살 때 참 행복입니다. 겉과 속이 다른 표리부동의 삶이 아니라, 언행일치의 명실상부한 삶을 뜻합니다. 그 삶이 마치 속은 탐욕과 사악으로 가득한 드러나지 않는 무덤과 같다면 아무리 위장하고 가면을 써도 저절로 드러나기 마련이라 그 부정적인 영향은 분위기를 오염시켜 탁하게 할 것입니다. 

 

넷째, 본연의 책무에 충실할 때 참 행복입니다. 율법학자가 질책듣는 것은 힘겨운 짐을 사람들에게 지워 놓고 자신들은 그 짐에 손가락 하나 대려 하지 않는 무책임한 행위에 있습니다. 솔선수범의 참 행복을 잊어버린 이기적 어리석은 처사입니다.

 

그러고 보니 모든 불행은 무지의 어리석음에서 기인함을 깨닫게 됩니다. 무지에서 기인한, 무분별, 허영, 위선, 무책임한 행위입니다. 이런 무지에 대한 유일한 답이 회개의 열정과 실천임을 깨닫게 됩니다. 끊임없는 회개의 열정과 실천으로 참으로 분별력 좋은 지혜의 삶을, 진실과 겸손의 삶을, 또 솔선수범의 삶을 살 때 비로소 참 행복입니다.

 

제1독서 로마서에서 바오로 사도 역시 남을 심판하는 자들의 회개를 촉구합니다. 바리사이들처럼 자기를 모르는 무지하고 교만한 자들이 남을 심판하지 진정 자기를 아는 지혜롭고 겸손한 사람들은 결코 남을 심판하지 않습니다. 마치 복음의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물론 우리 모두를 향한 주님의 말씀처럼 들립니다. 자의적인 심판이 아니라 진리에 따른 심판입니다.

 

“그대는 하느님의 그 큰 호의와 관용과 인내를 업신여기는 것입니까? 그분의 호의가 그대를 회개에로 이끌려 한다는 것을 모르십니까? 그대는 회개할 줄 모르는 완고한 마음으로, 하느님의 심판의 날에 진노를 쌓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각자에게 그 행실대로 갚으실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십니다. 누구에게나 그 행실대로 공평무사하게 적용되는 각자 스스로 자초한 심판입니다. 화답송 역시 하느님의 공정한 심판을 강조합니다. “주님, 당신은 사람마다 행실대로 갚으시나이다.” 어제 어느 정치가의 다산 정약용 선생의 말을 인용한 연설문 마지막 부분 역시 회개를 촉구하는 말처럼 들렸습니다.

 

"이 나라는 털끝 하나라도 병들지 않은 것이 없다. 지금 당장 개혁하지 않으면 나라가 망하고 나서야 그칠 것이다."

 
그러니 참 좋은 열정으로, 열망으로, 갈망으로 끊임없는 회개와 더불어 행복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항구히 충실히 선행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를 향한 다음 주님의 말씀이 우리를 고무합니다. 복음의 예수님이 문제를 제기하고 독서의 바오로가 답을 줍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우리에게 주어지는 주님의 은총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꾸준히 선행을 하면서 영광과 명예와 불멸을 추구하는 이들에게는 영원한 생명을 주십니다. 참으로 선을 행하는 모든 이들에게는 영광과 명예와 평화가 내릴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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