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생寄生이 아닌 상생相生과 공생共生의 사랑 -기도, 회개, 겸손, 자비, 용서, 기억-2020.3.17.사순 제3주간 화요일

by 프란치스코 posted Mar 17,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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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3.17.사순 제3주간 화요일                                                                 다니3,25.34-43 마태18,21-35

 

 

 

기생寄生이 아닌 상생相生과 공생共生의 사랑

-기도, 회개, 겸손, 자비, 용서, 기억-

 

 

 

얼핏 보면 하나이지만 정다운 상생相生의 두 산봉우리로 이루어진 불암산입니다. 아주 예전에 써놓은 시가 생각납니다.

 

-“늘 봐도 늘 좋다/사랑은 저렇게 하는 거다

뿌리는 하나/굽이굽이 크고 작은/정다운 산 형제들

묵묵히/제자리를 지켜내고/거리를 견뎌내며

늘 사이좋게/서로 바라보고 지켜보며

서로의 버팀목이 되어주는/의좋은 산 형제들이다”-2008.

 

작금의 우리 나라 국민의 국난극복의 저력이 눈물나게 감동적이고 고맙습니다. 아마 수천년간 우리나라처럼 외침을 겪은 나라도 없을 것입니다. 망하기로 하면 수백번 망했을 우리나라가 이토록 큰 국력을 지닌 나라로 살아 있다는 자체가 불가사의不可思議의 기적입니다. 

 

코로나 19사태 역시 국난입니다. 국난일뿐 아니라 세계가 코로나19사태로 인해 갈팡질팡, 또는 자포자기 상태지만 한국의 합심합력한 국난극복의 저력이, 분투 노력이 놀랍고 외국에서는 경이의 눈길로 바라보고 있다 합니다. 일부 기사를 인용합니다.

 

-“코로나19와 관련해서 비난하는 건 한국 신문밖에 없다고 한다. CNN, BBC 등 외신들이 객관적으로 한국의 방역 대책을 평가해주는 민족정론지라 한다---코로나19사태로 인해 전쟁 때에도 상상하기 힘들던 국경봉쇄나 국내에서 이동제한이 눈앞에 펼쳐지고 있다. 오일 쇼크 때는 주유소 앞에서만 줄을 섰지만, 코로나 쇼크에서는 모든 생필품 상점 앞에 장사진이다. 선진국들이 더 우왕좌왕하며 을씨년스러운 풍경을 보인다. 

이 위기에서 한국의 방역이 각국과 외신들이 평가하는 롤모델이 되고 있다. <워싱턴 포스트> 등은 한국이 중국이나 이탈리아와는 달리 봉쇄나 격리 조처 없이, 사회와 시민의 합의를 바탕으로 우수한 방역 체계를 가동해 성공하고 있다고 평가한다.”-

 

더불어 어제의 다음 깨달음도 잊지 못합니다. 

 

“혼자서는 못산다. 혼자서는 아무것도 못한다. 기생이 아닌, ‘함께(together)’의, 상생의, 공생의 사랑이다. 지금 수도원내에는 네 분의 수도회 또는 교구 소속의 형제들이 짧게 혹은 길게 기거하고 있다. 수도원의 환대 또한 상생과 공생의 표현이다. 서로 울타리가, 버팀목이 되어 주기에 살 수 있는 거다. 작건 크건 모두가 필요한 귀한 존재들이다. 돌담을 보라. 건물을 보라. 서로 다양한 자리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그 역할을 다하기에 하나의 모습으로 유지 지탱되는 거다. 그러니 함께 하는 형제들에 감사해야 할 거다.”

 

이런 묵상하며 옹졸 편협해지는 자신을 반성하고 회개했고 상생의, 공생의 삶의 원리를 새롭게 확인했습니다. 우리 삶의 여정도 혼자가 아닌 ‘함께(together)’의 여정임을 요즘 많이 강조합니다. 마침 꽃샘 추위처럼 쌀쌀한 날씨에 수도원 안뜨락 잊혀진 땅, 거의 눈길이 가지 않는 낮은 자리에 작게 피어난 수선화 두송이 꽃에 감동하여 써놓은 글입니다.

 

-“매서운 꽃샘 추위에/참 약하고 외로워 보여도

날로 청초淸楚함 더해가는/샛노란 수선화 두송이

참 강하다/기품氣品있고 지조志操있다

존재 자체가/감동이다/위로와 힘이다

하늘 사랑만으로 행복하기에/그러할 거다”-

 

흡사 수선화 두송이가 서로 상생의 버팀목이 되어 주는 듯 했습니다. ‘하늘 사랑만으로 행복하기에 그러할 거다’ 마지막 구절이 핵심입니다. 참으로 기도의 절대성을 상징하는 말입니다. 하느님께 기도할 때 줄줄이 이어지는 은총의 선물들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찾아냈습니다. 기도할 때 회개요, 겸손이요, 용서요, 자비요, 기억입니다. 기생이 아닌 상생과 공생의 사랑을 위해 참으로 기도에 이어지는 이런 은총의 선물들입니다. 무지에 대한 유일한 처방 역시 기도와 회개를 통한 겸손뿐입니다. 

 

참으로 자주 잊는 망각 역시 무지의 병에 속합니다. 기억이 얼마나 중요한지요, 기억하지 못할 때 악행의 반복입니다. 늘 한결같은 삶을 가능하게 하는 것도 기억입니다. 기억을 늘 새롭게 할 때 용서와 자비의 삶입니다. 미래의 꿈을 만드는 것도 과거의 기억입니다. 그러니 오늘부터 좋은 기억을 축적해가야 합니다. 바로 이를 위한 필수 전제 조건이 기도입니다. 마침 생각나는 시편 구절이 있습니다.

 

“내 영혼아, 주님을 찬미하여라. 내 안의 모든 것도 거룩하신 그 이름 찬미하여라. 내 영혼아, 주님을 찬미하여라. 그분의 온갖 은혜 하나도 잊지 마라.”(시편103,1-2)

 

주님의 은혜를 하나도 잊지 않고 기억하기 위해 끊임없이 바치는 하느님 찬미와 감사의 시편전례기도입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의 ‘매정한, 인정머리 없는 종의 비유’에 나오는 종은 그 은혜를 잊었습니다. 기도하지 않았음이 분명합니다. 개구리 올챙이적 생각 못한다고 곤경에 처한 자기가 만 탈렌트 빚을 크게 탕감 받은 은혜를 까맣게 잊고 고작 백 데나리온 빚진 자에게 참 모질게, 무자비하게, 인색하게 대했습니다. 서로가 상생의, 공생의 존재임을 까맣게 잊었습니다. 바로 자기를 모르는 무지의 인간의 전형이자 우리의 모습일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 잘 깊이 들여다 보면 하느님께 만탈렌트 빚을 탕감받고 은총으로 살아가는 존재들임을 깨닫습니다. 얼마나 큰 ‘사랑의 빚’을 지고 은총속에 살아가는지 깨달아야 합니다. 바로 오늘 복음은 이런 면에서 독자들인 우리의 회개를 촉구합니다.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하지 않느냐?---너희가 저마다 자기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의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

 

몰라서 용서하지 않는 것이지, 정말 하느님께 용서받아서 살고 있는 존재임을 깨달아 안다면 용서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너그럽고 자비롭지 않을 수 없습니다. 숨쉬듯이, 밥먹듯이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 무한히 끝없이 용서할 수뿐이 없습니다. 그러니 용서하지 못하는 것은 바로 무지의 병이자 죄인 것입니다. 정말 하느님께 부단히 용서 받아 사는 은총의 존재임을 깨달아 안다면 용서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참으로 내가 살기 위해, 나를 위해 회개하고 용서해야 합니다. 이런 회개의 용서가 바로 지혜요 자비요 겸손입니다. 참으로 이런 끊임없는 회개와 용서가 우리를 치유하고 자유롭게 합니다. 무엇보다 마음의 근원적 병인 무지의 치유입니다. 하여 끊임없는 마음으로 부터의 기도입니다. 

 

바로 제1독서 다니엘서의 불 한가운데에 우뚝 서서 백성을 대표하여 기도하는 아자르야가 그 모범입니다. 혼자를 위한 기도가 아니라 유배중인 자기 백성의 공생의 구원을 위한 구구절절 감동이 넘치는 마음의 기도입니다. 통회와 더불어 용서와 자비를 청하는 정말 가난한 자의 기도입니다. 참으로 기도할 때 하느님을 기억하여 한결같은 삶도 가능합니다. 일부만 인용합니다.

 

“저희의 부서진 영혼과 겸손해진 정신을 보시어, 저희를 숫양과 황소의 번제물로, 수만 마리의 살진 양으로 받아 주소서. 이것이 오늘 저희가 당신께 바치는 희생 제물이 되어, 당신을 온전히 따를 수 있게 하소서. 정녕 당신을 신뢰하는 이들은 수치를 당하지 않습니다. 

이제 저희는 마음을 다하여 당신을 따르렵니다. 당신을 경외하고 당신의 얼굴을 찾으렵니다. 당신의 호의에 따라, 당신의 크신 업적에 따라 저희를 대해 주소서. 당신의 놀라운 업적에 따라 저희를 구하시어 주님, 당신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소서.”

 

그대로 사순시기에 적절한 기도문입니다. 어느 하나 생략할 수 없는 주옥같은 내용의 기도문입니다. 이렇게 회개하여 텅빈 가난한 영혼으로 깨어 기도할 때 하느님 중심의 삶에 저절로 기억이요, 회개와 겸손이요, 자비와 용서요, 상생과 공생의 사랑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회개하고 용서하며 자비로운 주님을 닮아 공생의 사랑을 살게 하십니다.

 

"주님, 예로부터 베풀어 오신, 당신의 자비와 자애 기억하소서. 주님, 당신의 자애에 따라, 당신의 어지심으로 저를 기억하소서."(시편25,6-7ㄴㄷ).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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