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전한, 완전한, 원숙한 삶 -사랑밖엔 길이 없다-2020.6.16.연중 제11주간 화요일

by 프란치스코 posted Jun 16,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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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6.16.연중 제11주간 화요일                                                            1열왕21,17-29 마태5,43-48

 

 

 

온전한, 완전한, 원숙한 삶

-사랑밖엔 길이 없다-

 

 

 

“내 영혼은 밤에도 당신을 사모하오며, 아침에도 내 마음 당신을 그리나이다.”(이사26,9)

 

엊저녁 서편의 저녁 노을은 참 곱고 아름다웠습니다. 세상을 위무慰撫하는 하느님의 사랑은 이렇듯 곱고 아름다운 저녁 노을로 표현됨을 봅니다. 요즘 은은하고 그윽한 밤꽃 향기가 한창입니다. 흡사 존재의 향기, 사랑의 향기같습니다. 그리스도의 향기, 사랑의 향기를 발하는 이들을 만나면 마음이 참 평온해 집니다. 

 

어제는 거의 한달마다 고백성사차 오신 수녀님이 행운목에 새 순이 돋은 분재를 선물했습니다. 말그대로 사랑의 선물입니다. 시를 사랑하고 쓰시는 분이라 선물도 시처럼 품격이 있습니다. 사랑은 생명입니다. 날마다 끊임없이 사랑을 숨쉬며 먹으며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영원히 빛나는 한마디 말은 ‘사랑’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하느님의 정의입니다. 사람의 궁극 목표는 하느님을 닮아 성인이 되는 것이요, 답은 사랑뿐이 없습니다. 사랑하라 선물로 주어진 각자 고유의 유일회적 인생입니다. 결국 영적 성장과 성숙도 사랑의 성장과 성숙을 뜻합니다. 몸은 노쇠해가도 내적 사랑의 마음의 성장과 성숙은 죽을 때까지 계속되어야 할 것입니다.

 

사랑할 때 닮습니다. 사랑할 때 예뻐집니다. 사랑할 때 아름답습니다. 인생 虛無와 무지無知에 대한 답도 사랑뿐입니다. 사랑의 빛이 허무와 무지의 어둠을 몰아냅니다. 텅 빈 허무를 텅 빈 충만으로 바꾸는 사랑입니다. 제 졸저 ‘사랑밖엔 길이 없었네’ 표지 안쪽의 글이 한눈에 들어옵니다. 그대로 옮깁니다.

 

“사랑은 구체적이다.

사랑은 추상명사가 아닌 실행해야 하는 동사다.

우리 몸은 사랑하라고 있는 ‘사랑의 도구’다.

멀리 밖에서가 아니라 지금 여기서 함께 있는

가족과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서로 사랑하라고 주신 선물이다.

작은 행동으로의 사랑이다.

작은 사랑의 실천이 감동을 주어

마음을 치유하고, 정화하고, 충만하게 한다.

사랑은 우리의 모든 것이다.

사랑이 있을 때 빛나는 인생이지만

사랑이 사라지면 어두운 인생이다.

사랑하며 살아갈 때 비로소 사람이다.”

 

지금 읽어도 구구절절 공감이 갑니다. 사랑뿐이 답이 없습니다. 사랑뿐이 길이 없습니다. 오늘 복음은 ‘1.성내지 마라, 2.남의 아내를 탐내지 마라, 3.아내를 소박하지 마라, 4.맹세하지 마라, 5.보복하지 마라는 다섯가지 대당명제에 이은 마지막 6.원수를 사랑하여라’입니다. 여섯 대당명제의 최종 결론 말씀은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평생과제입니다.

 

“그러므로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5,48)

 

참으로 사랑이 익어 성숙成熟해 갈수록 둥글게 익어가는 가을 열매들처럼 원숙圓熟한 사람, 완전完全한 사람, 온전穩全한 사람이 됩니다. 과연 사랑으로 둥글게 익어가고 있는 원숙하고 아름다운 삶인지요.

 

사랑의 절정은 원수를 사랑하는 것이요,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입니다. 나에게 원수요 박해하는 자들이지 나름대로 까닭이 있을 것이며, 하느님 눈엔 사랑스런 자녀들일 수도 있습니다. 자기 무지로 인한 원수짓이요 박해일 수도 있습니다. 자기도 모르게 무지의 죄, 무지의 악, 무지의 병에 휘말려 사는 어리석은 눈먼 중생衆生들은 얼마나 많은지요, 미워할 것은 무지無知의 죄罪이지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니 원수를 사랑할 수 뿐이 없고 박해하는 이들을 위해 기도할 수뿐이 없습니다. 원수를 미워하다보면 원수를 닮아 괴물이 되고 내가 먼저 파괴됩니다. 내 본연의 존엄한 품위를 지키기 위해서도 이 길뿐이 없습니다. 참으로 무지의 악, 무지의 죄의 전형적 인간이 탐욕에 눈먼 제1독서 열왕기 상권의 아합입니다. 무죄한 나봇을 살해한 아합의 죄의 결과는 얼마나 끔찍하고 처절한지요. 엘리야 예언자들 통한 하느님의 준엄한 선고입니다. 

 

“주님이 말한다. 살인을 하고 땅마저 차지하려느냐? 주님이 말한다. 개들이 나봇의 피를 핥던 바로 그 자리에서 개들이 네 피도 핥을 것이다.”

 

“나 이제 너에게 재앙을 내리겠다”에 이어 계속 전개되는 구체적 벌은 상상을 초월합니다. 무지의 죄의 결과가 얼마나 참혹한지 우리에게 주는 충격적 가르침이 이 말씀을 듣는 우리 청자聽者들의 회개를 촉구합니다. 죄는 순간의 쾌락을 줄지 몰라도 괴롭고 아픈 후유증은 평생입니다. 아합의 구체적 죄의 나열입니다. 순전히 하느님을 잊고 나를 잊은 무지로 인한 죄입니다.

 

‘아합처럼 아내 이제벨의 충동질에 넘어가 자신을 팔면서까지 주님의 눈에 거슬리는 악한 짓을 저지른 자는 일찍이 없었다. 아합은 주님께서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서 쫓아내신 아모라인들이 한 그대로 우상들을 따르며 참으로 역겨운 짓을 저질렀다.’

 

역시 오늘날도 많은 무지의 죄인들을 통해 반복되는 악행들입니다. 주님 대신 우상을 따르며 역겨운 짓을 하지는 않는지 늘 ‘주님의 눈’을 의식해야 하겠습니다. 그러니 이런 무지의 원수들이나 박해자들을 사랑하고 기도하며 이들을 하느님의 처분에 맡기는 것입니다. 무지를 무력화無力化하고 원수나 박해자들을 살리는, 또 내 존엄한 품위를 지키는 유일한 길입니다. 이래야 비로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습니다.

 

‘아버지의 자녀답게’사는 삶, 얼마나 품위 있고 아름다운 삶인지요. 그러니 하늘 우리 아버지를 부단히 닮는 것입니다.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주시는 무차별의 대자대비大慈大悲, 공평무사公平無私하신 우리 하늘 아버지의 사랑을 닮으라는 것입니다. 인종, 국적, 종교, 문화, 언어 모두를 초월하여 모두가 아버지 품안에 있는 자녀들임을 깨달으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유유상종類類相從,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하는 끼리끼리 패거리 사랑이라면 무슨 상을 받을 수 있겠는지요? 이는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자기 형제들에게만 인사한다면, 우리가 남보다 잘하는 것이 무엇이겠는지요? 이 또한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참으로 하늘 아버지를 닮아 누구에게나 자비롭고 너그럽고 따뜻하고 부드럽고 겸손, 겸허하라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의 숭고한 평생과제입니다. 

 

참으로 한 번 참사람답게, 하느님의 자녀답게 살라고 주어진 참 고귀한 선물인생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여 사랑의 하느님을 닮아갈 때 비로소 무지와 허무로부터 해방되어 참 자비롭고 지혜로운 삶, 참 자유롭고 행복한 삶, 온전하고 완전한 삶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날로 당신을 닮아 사랑으로 익어가는 원숙하고 온전한 삶으로 이끌어 주시며 우리 모두에게 당신의 유일한 소원을 말씀하십니다.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5,48).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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