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불어 여정중의 공동체 생활 -사랑, 기도, 교정-2020.9.6.연중 제23주일

by 프란치스코 posted Sep 06,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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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9.6.연중 제23주일                                                        에제33,7-9 로마13,8-10 마태18,15-20

 

 

 

더불어 여정중의 공동체 생활

-사랑, 기도, 교정-

 

 

가장 큰 기적은 무엇일까요?

가장 큰 축복은 무엇일까요? 

가장 큰 은총은 선물이 무엇일까요?

가장 큰 어려움은 무엇일까요?

가장 큰 예술작품은 무엇일까요?

 

바로 내 몸담고 있는 공동체입니다. 오늘 지금 여기 내가 속하고 있는 공동체입니다. 말그대로 은총의 선물 공동체입니다. 내가 택한 것 같지만 하느님께서 불러 주신 공동체입니다. 공동체 생활에서 쉬운 것에서 어려운 순서로 다섯을 생각해 봤습니다.

 

첫째. 판단하거나 비난하는 것입니다. 

하여 가장 쉬운 것이 남판단하는 것이고 가장 힘든 것이 자기를 아는 일이라 했습니다. 사실 첫눈에 발견되는 이웃의 결점들입니다.

 

둘째, 칭찬하는 것입니다.

칭찬하기는 쉽고 서로의 관계에도 도움이 됩니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말도 있습니다. 그러나 값싼 칭찬은 금물입니다.

 

셋째. 감사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까맣게 감사를 잊고 지내는 지요. 하여 진정성이 담긴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말마디의 표현은 참으로 필요합니다. 어느 분이 만날 때 마다 했다는 ‘반갑고 고맙고 기쁘다’라는 인사 말마디가 생각납니다.

 

넷째, 사과하는 것입니다. 

서로의 앙금을 일거에 해소해 주는 사과입니다. 참으로 힘든 게 사과이지만 ‘감사합니다’ 나 ‘고맙습니다’ 보다 일체의 변명이나 핑계없이 ‘죄송합니다’, ‘미안합니다’, ‘잘못했습니다’라는 깨끗한 사과가 백배 낫습니다.

 

다섯째, 교정입니다.

형제들의 잘못이나 죄에 대한 충고요 교정입니다. 정말 가장 힘든 것이, 또 상처주기 쉬운 것이 잘못이나 죄에 대한 지적이요 충고요 교정일 것입니다. 판단하기도 쉽고 칭찬도 감사도 사과도 비교적 쉬운 편이지만 충고나 교정은 정말 어렵습니다. ‘상호 교정이 없는 공동체는 약한 공동체이다’ 예전 장상의 언급을 지금도 잊지 못합니다.

 

오늘 강론 주제는 ‘더불어 여정중의 공동체 생활’입니다. ‘더불어together’ 말마디가 중요합니다. 삶은 여정입니다. 믿는 이들의 삶은 하느님을 향한 홀로와 더불어의 여정입니다. 더불어 안에서의 홀로입니다. 제가 가정공동체 삶이든 수도공동체 삶이든 늘 강조하는 말이 있습니다. 

 

“함께 사는 자체가 가장 힘들고 중요한 수행이자 수도이다. 잘살았든 못살았든 끝까지 함께 살았다는 자체로 구원이다. 부부도 함께 구원받는다. 부부 점수합하여 평균낸후 둘로 나눠 평균 60점 넘어야 둘다 함께 구원이다. 혼자서는 아무리 잘 살아도 구원받지 못한다. 참으로 중요한 평생 공동체 생활의 원리가 홀로와 더불어의 균형과 조화이다.”

 

과한 표현같지만 사실입니다. 어제는 틈틈이 ‘홀로와 더불어’-시인 구모 추모 문집-을 읽었습니다. 다양한 문인들의 글이라 글이 쉽고 아름답고 깊고 향기로워 배우는 마음, 공부하는 마음으로 참 감명깊게 읽었습니다. 이렇게 깊이 글에 빠지기는 처음입니다. ‘홀로와 더불어’라는 구상 시인의 시가 좋았습니다. 구상 시인 친히 홀로와 더불어 삶의 대가요 달인이었습니다. 

 

“나는 홀로다

너와는 넘지 못할 담벽이 있고

너와는 건너지 못할 강이 있고

너와는 헤아릴 바 없는 거리가 있다

 

나는 더불어다

나의 옷에 너희의 일손이 담겨 있고

나의 먹이에 너희의 땀이 배어 있고

나의 거처에 너희의 정성이 스며 있다

 

이렇듯 나는 홀로서

또한 더불어서 산다

 

그래서 우리는 저마다의 삶에

그 평형과 조화를 이뤄야 한다”

 

구구절절 공감이 가는 시입니다. 어떻게 하면 ‘홀로와 더불어’ 균형과 조화속에 공존의 평화를 누리며 잘 살 수 있을까요. 더불어 여정중의 공동체 생활을성공적으로 살아 낼 수 있을까요. 판단이나 비난하지 않고 적절한 칭찬과 감사를 표하면서 즉시 잘못은 사과하면서 그 어렵다는 충고와 교정도 하면서 더불어 공동체 생활을 할 수 있을까요. 답은 셋입니다. 사랑과 기도, 교정입니다.

 

첫째, 사랑입니다.

참으로 사랑할 때 비난이나 판단을 하지 않습니다. 사랑의 칭찬, 사랑의 감사, 사랑의 사과, 사랑의 교정입니다. 사랑밖엔 길이, 답이 없습니다. 사랑은 만민의 공통 보편 언어입니다. 말이 통하지 않아도 사랑하는 마음은 모두에게 통합니다. 사랑의 삶을 살아서 사람입니다. 사랑-삶-사람이 한뿌리임을 말해 줍니다.

 

누구나 선물처럼 주어진, 하느님 친히 심어주신 사랑입니다. 그러니 하느님을, 이웃 형제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랑은 말그대로 책임이자 의무입니다. ‘서로 살기위하여’ 사랑해야 하는 의무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을 통째로 인용합니다. 서로 사랑을 통해 검증되는 하느님 사랑입니다.

 

“아무에게고 빚을지지 마십시오. 그러나 서로 사랑하는 것은 예외입니다. 남을 사랑하는 사람은 율법을 완성한 것입니다. ‘간음해서는 안된다, 살인해서는 안된다, 도둑질을 해서는 안된다, 탐내서는 안된다.’는 계명과 그 밖의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그것들은 모두 이 한마디 곧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말로 요약됩니다.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저지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

 

여기에 무엇을 더 붙일 수 있겠습니까? 오늘은 성녀 마더 데레사의 기념일이기도 합니다. 성녀야 말로 사랑의 대가,사랑의 달인이었습니다. 평생 ‘사랑의 학교’ 배움터에서 평생학인이 되어 배우고 공부해야 할 수행이 사랑입니다. 사랑에는 늘 초보자인 우리들입니다.

 

둘째, 기도입니다.

삶과 기도는 함께 갑니다. 삶이 없는 기도는 맹목의 광신이 되기 쉽고, 기도가 없는 삶은 공허하고 허무합니다. 사는 대로 기도하고 기도하는 대로 삽니다. 나중 남는 얼굴도 기도한 얼굴인가 기도하지 않은 얼굴인가 둘중 하나입니다. 기도는 테크닉, 기술이나 기교가 아니라 사랑입니다. 기도할 때 사랑하게 되고 기도할 때 사랑하게 됩니다. 기도와 사랑 역시 함께 갑니다. 기도는 사랑의 샘입니다. 

 

이렇게 서로 다른 사람이 살아간다는 것은 기적입니다. 사랑의 기적, 기도의 기적입니다. 홀로의 기도보다 더 중요한 것이 함께의 공동기도입니다. 함께 기도하지 않으면 공동생활은 물론 공동체의 다양성 속의 일치도 불가능합니다. 우리 삶의 중심이자 목표요 방향인 주님을 확인하고 강화하는 공동기도 시간입니다. 땅과 하늘, 하느님과 인간을 하나로 소통시키는 기도의 은총입니다. 우리 모두 공동기도의 중요성을 확인시키는 주님이십니다.

 

“내가 또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

 

저 하늘에 계신 주님이 아니라 지금 여기 더불어의 공동체가 주님의 거처입니다. 민심이 천심이요 지성이면 감천입니다. 참으로 우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우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입니다. 바로 매고 푸는 결정적 역할이 공동체 기도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기도와 사랑으로 오늘 지금 여기서 풀고 사는 용서와 화해가 얼마나 중요하고 본질적인 일인지 깨닫습니다. 참으로 주님은 함께 한 마음으로 평생, 매일, 끊임없이 바치는 시편과 미사의 공동전례기도 수행을 통해 땅에서 서로 매인 것을, 맺힌 것을 풀어 하늘과 하나로 소통케 하심으로 우리를 자유롭고 행복하게 하십니다.

 

셋째, 교정입니다.

형제애의 표현이 교정입니다. 참으로 기도할 때 주님은 형제애적 교정의 지혜도 주실 것입니다. 교정의 목적은 벌이 아니라 화해와 치유입니다. 참으로 사랑으로 충고해야 하고 사랑의 귀로 들어야 합니다. 참으로 말 잘하는 것도 중요하고 잘 들어 순종하고 받아들이는 것도 중요합니다. 오늘 에제키엘서 말씀은 사랑의 충고와 교정이 우리 모두의 책임이자 의무임을 깨닫게 합니다. 다음 사람의 아들은 공동체에 몸담고 있는 우리 각자를 뜻합니다.

 

“너 사람의 아들아 나는 너를 이스라엘 집안의 파수꾼으로 세웠다. 너는 나를 대신하여 그들에게 경고해야 한다”

 

경고의 의무를 다했을 때 책임을 묻지 않겠지만 경고의 의무를 하지 않아 형제가 죄로 인해 죽게 되었았을 때 책임을 묻겠다는 참으로 엄중한 말씀입니다. 문득 창세기에서 아벨을 죽인 카인에 대한 주님의 추궁이 생각납니다.

 

“네 아우 아벨은 어디 있느냐?”

“모릅니다. 제가 아우를 지키는 사람입니까?”

 

카인이 아니라도 우리에게 묻는 주님 말씀처럼 생각됩니다. 함께 사는 형제들을 서로 지켜 줘야 할 책임이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형제의 교정에 대한 구체적 처방이 주어집니다. 끝까지 순리에 따른 절차에 따라 형제애적 교정에 최선을 다하고 결과는 주님께 맡기라는 것입니다.

 

“교회의 말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그를 다른 민족 사람이나 세리처럼 여겨라.”

 

이제 해결의 열쇠는 주님께 넘겨졌고 주님께서 알아서 해결해 주실 것입니다. 좌우간 인내와 사랑을 다해 끝까지 화해와 치유를 위해 노력하는 형제애적 교정이 참으로 중요함을 깨닫습니다. 형제애적 교정에 앞서 반드시 염두에 두어야할 성규 92장중, “육체나 품행상의 약점들을 지극한 인내로 참아 견디며”라는 대목도 생각이 납니다. 참으로 이런 인내의 사랑은 너그럽고 자비로운 주님을 닮아갈 때 가능할 것입니다. 

 

주님을 중심으로 홀로와 더불어의 공존과 상생이, 균형과 조화가 절실한 공동체 현실입니다. 더불어 여정중의 공동체 생활은 시작도 끝도 없습니다. 다만 하루하루 진인사대천명의 자세로 사랑과 기도, 형제애적 교정에 분별력의 지혜를 발휘하여 최선의 노력을 기울이는 것 뿐입니다. 참 좋으신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이렇게 살도록 도와 주십니다. 오늘 화답송이 고맙게도 오늘 말씀을 요약합니다.

 

“오늘 주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라. 너희 마음을 무디게 하지 마라.”(시편95,7ㄹ과 8ㄴ).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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