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하느님 중심의 삶과 기도, 그리고 지혜와 사랑-2022.9.18.연중 제25주일

by 프란치스코 posted Sep 18,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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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9.18.연중 제25주일                                                              아모8,4-7 1티모2,1-8 루카16,1-13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하느님 중심의 삶과 기도, 그리고 지혜와 사랑-

 

 

 

지난 9월4일 주일, 제266대 교황 프란치스코 성하聖下에게 시복된 제263대 교황 복자 요한 바오로 1세를 기억하시는 지요? 너무 감동적이라 오늘 새벽 기사를 자세히 읽고 소개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재위기간은 놀랍게도 1978년  8월26일-1978년 9월 28일, 겨우 33일이었지만 감동적인 일화는 차고 넘칩니다.

 

‘미소의 교황’이라 불리는 요한 바오로 1세 교황님의 사목표어는 ‘겸손(Humilitas)’이고, 고 김수환 추기경은 “바오로 6세가 사람들을 위해 혼자 운 교황이었다면, 요한 바오로 1세는 사람들을 많이 울린 교황이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교황님의 마음을 그대로 담은 자기 고백적 내용의 편지(가톨릭평화신문, 9.18일 15면)가 길다 싶지만 그대로 인용합니다.

 

“드디어 간절히 원하던 사제품을 1935년 7월7일, 제 나이 23세에 받았습니다. ”앗숨!(Ad sum, 예, 여기 있습니다)“ 힘차게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했습니다. 온전히 저를 하느님께 바치며 첫째도 겸손, 둘째도 겸손, 항상 제 사제직의 중심 모토로 삼았습니다. 아 나중에 주교, 추기경, 교황이 되었을 때까지 저는 사목표어를 겸손이란 한 단어만 선택했습니다.

 

바오로 6세 교황님이 선종하시고 콘클라베에서 제가 263대 로마 가톨릭교회의 교황으로 선출되었습니다. 당시 저는 요한 23세 교황님처럼 현명한 마음도, 바오로 6세 교황님처럼 준비된 사람도 아닙니다. 그러나 지금 저는 그분들의 자리에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기도와 함께 저를 도와주십시오.

 

저는 두 분 교황님의 이름을 제 교황명으로 선택했습니다. 요한 바오로 1세로요. 아, 교황직 33일 동안, 저는 수요 일반 알현을 매주 4번을 했습니다. 겸손, 믿음, 희망, 그리고 사랑을 주제로 여러분을 만났습니다. 누군가는 저를 ‘하느님의 미소’ 혹은 ‘교회의 미소’, ‘9월의 교황’이라고 말합니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후의 혼란속에서도 교회는 의연하게 세상을 향해 두 팔을 벌리며 미소와 희망을 잃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지를 알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도 미소를 잃지 마세요. 2022년 9월4일 주일, 프란치스코 교황님 주례로 저의 시복이 있었습니다. 부족했지만, 저는 평생 제 가슴에 그리스도를 품고 살았습니다. 그 힘으로 여러분을 위해, 우리 성교회를 위해 기도하겠습니다.

 

1978년 9월27일 수요 일반 알현 때, 저의 마지막 지상의 삶에서 여러분을 만나며 했던 기도가 생각나나요? 저는 지금도 이 기도를 바칩니다. 성경의 모든 진리가 담긴 이 기도는 제가 어렸을 적부터 가르쳐 주신 제 어머니의 기도이기도 합니다.

 

‘나의 하느님, 온 마음을 다하여 사랑합니다. 당신은 영원한 선이시고, 우리의 영원한 행복이십니다. 당신의 사랑을 위해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고, 제 잘못을 용서해 주십시오. 오 주님, 제가 더 당신을 사랑하게 해 주십시오.“

 

가상적이지만 정말 감동으로 와닿는 교황 요한 바오로 1세의 자기고백적 편지입니다. 얼마나 철저히 완벽히 하느님 중심의 삶이었는지 깨닫습니다. 어제 40대 초반의 자매로부터 받은 편지도 충격으로 마음을 서늘하게 했습니다. 받은 글과 답신을 소개합니다.

 

“신부님, 저 안나예요. 

앞으로 살아갈 날이 더 척박할 것 같아 절망이 찾아왔어요. 

어쩌죠. 

신부님 더 외롭고, 

더 가난하고, 

더 아프고, 

피려다가 활짝 피어 보지도 못하고, 

시들어 버린 꽃처럼---

모든 게 끝나나보다

지금도 시시한데 

지금보다 좋을 날이 없겠구나 싶어서 슬퍼요.”

 

아마 꿈과 희망을 잃고 절망하는 이런 심정의 젊은이들이 참 많을 것입니다. 마침 위의 내용을 비슷한 나이의 자매에게 보여 줬드니 바로 자기 심정도 그러하다 했습니다. 제가 즉시 드린 답신입니다.

 

“사랑하는 안나 자매님!

내일 걱정은 내일 하고

오늘 지금 여기서 하느님께 신뢰와 희망, 사랑을 두고

최선을 다해 겸손히 힘차게 사시면

내일은 내일대로 잘 될 것입니다!

내일이 아닌 오늘부터 웃으며

활짝 핀 꽃처럼 행복한, 아름다운 삶을 사세요!

행복도 선택입니다. 

사랑하는 안나 자매님! 화이팅!

오늘 사랑하는 안나 자매님 위해 생미사 봉헌합니다.“

 

참으로 하느님 중심의 삶이 절실, 절박한 작금의 시대입니다. 어제 오늘 공동전례중 내용 역시 하느님 중심의 삶을 새롭게 하는 말마디들입니다.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아울러 섬길수 없도다.”-주일 성모 후렴

“어서와 하느님께 노래 부르세, 구원의 바위 앞에 목청 돋우세. 알렐루야.”-아침 초대송 후렴

“가난한 이들, 일으키시는 하느님을 모두들 찬양하라.”-오늘 미사중 화답송 후렴

 

벌써 30년전 1992년 왜관 수도원에서 피정지도후 종신서원 미사때 한 강론 제목을 잊지 못합니다.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3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살아 있는 절실한 물음입니다. 답은 단 하나 하느님 중심의 삶을 사는 것이요 그 방법을 소개합니다.

 

첫째, 하느님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하느님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생명이십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사랑이십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희망이십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기쁨이십니다. 하느님의 우리의 감사이십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구원이십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위로이십니다.  

 

하느님 대신 그리스도 예수님을 넣어도 무방합니다. 바로 이 하느님 중심 자리에, 그리스도 예수님 중심 자리에 그 누구를, 그 무엇을 놓을 수 있겠는지요? 바로 이런 하느님을, 그리스도 예수님을 선택하여 살려고 이 거룩한 미사에 참석한 우리들입니다. 

 

그러니 하루하루 날마다 하느님을 선택한다는 말은 생명을, 사랑을, 희망을, 평화를, 기쁨을, 감사를 선택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내 탓없이 타고난 것들, 바꿀수 없는 것들에 집착하여 절망하기로 하면 끝이 없고 바로 이것이 우리가 현실에서 겪는 지옥체험입니다. 바로 하느님을 선택하여 지옥과도 같은 세상 우상의 노예살이로부터 탈출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 말미에서 주님은 이점을 강조합니다.

 

“어떠한 종도 두 주인을 섬길수는 없다. 한쪽은 미워하고 다른 쪽은 사랑하며, 한쪽은 떠 받들고 다른 쪽은 업신여기게 된다.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선택할 때 행복에로의 천국문이, 재물을 선택할 때 불행으로의 지옥문이 활짝 열릴 것입니다. 재물로 인해 부자지간, 부부지간, 형제지간이 풍비박산 원수가 되는 경우, 주변에서 많이 목격하지 않습니까? 자녀에게 물려줄 최고의 유산은 하느님 믿음임을, 하느님 중심의 삶임을 절감합니다.

 

둘째, 기도의 선택과 훈련, 그리고 습관화입니다. 

기도와 삶의 일치가 바로 답입니다. 하느님과 생명과 사랑의 소통의 기도가 날로 주님을 닮게 합니다. 바로 여기 수도자들의 삶을 보면 단박에 드러납니다. 기도로 시작해서 기도로 끝나는, 하느님으로 시작하여 하느님으로 끝나는 기도와 하느님은 수도자는 물론 모든 믿는 이들의 존재이유입니다.

 

기도없는 삶은 눈먼 맹목의 무지의 삶이고, 삶이 없는 기도는 공허할 뿐입니다. 기도와 삶은 함께 갑니다. 기도하는 대로 살고 사는대로 기도합니다. 나중에 남는 얼굴도 둘중 하나입니다. 주님을 닮은 기도한 얼굴인가, 주님을 닮지 않은, 기도하지 않은 얼굴인가 둘중 하나일 것이며 그대로 그 얼굴로 심판과 구원이 결정될 것입니다. 오늘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의 권고도 온통 기도에 집중됩니다. 그대로 미사에 참석한 우리 하나하나를 향한 당부처럼 들립니다.

 

“사랑하는 그대여, 나는 무엇보다도 먼저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청과 기도와 전구와 감사를 드리라고 권고합니다. 모든 사람을 위해서도 기도하여, 우리가 아주 신심 깊고 품위 있게, 평온하고 조용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하십시오.

 

그렇게 하는 것이 우리의 구원자이신 하느님께서 좋아하시고 마음에 들어 하시는 일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깨닫게 되기를 원합니다. 그러므로 나는 남자들이 성을 내거나 말다툼을 하는 일 없이, 어디서에서나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기를 바랍니다.“

 

매일, 평생 저녁성무일도시 독서후 응송 다음 아름다운 계응송이 생각납니다.

 

“주님께 올리는 나의 기도 분향같게 하옵시고,

 쳐든 손 저녁제사같게 하옵소서,“

 

끊임없이 하느님께 바치는 기도가 참으로 향기롭고 아름다운 분향같은 삶으로, 저녁제사같은 삶으로 변모시켜주십니다.

 

셋째, 지혜로운 삶입니다.

기도의 열매가 사랑과 회개요 지혜와 겸손입니다. 기도할 때 탐욕에서 해방되니 무욕의 지혜입니다. 오늘 복음의 약은 집사의 비유가 좋은 가르침과 깨우침이 됩니다. 그의 사기수법을 배우라는 것이 아니라 위기에 처했을 때 민첩하고 신속하게 처리하는 지혜를 배우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회개에도 신속 민첩하라는 것입니다. 영적일수록 현실적 지혜도 빛납니다.

 

삶의 위기에 처한 그의 미래에 대한 대책에 주인도 내심 묵인하며 흡족해 했을 것입니다. 이렇게 하라고 할 수는 없고, 약은 집사는 스스로 알아서 눈치 빠르게 살길을 타개하여 주인인 자신의 부담을 덜어줬으니 내심 고마운 마음도 들었을 것입니다. 만일 이 불의한 집사가 미련하여 해고당한 후의 미래 대책이 없었다면 주인의 마음도 몹시 불편했을 것입니다. 묵상하건데 이 약은 집사는 하느님으로 상징되는 주인의 너그럽고 자비로운 마음을 깊이 알고 믿었을 것입니다. 

 

주님을 상징하는 주인은 그 불의한 집사를 칭찬했으니 그가 영리하게 대처했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자녀들이 저희끼리 거래하는 데는 빛의 자녀들보다 영리하니, 빛의 자녀들인 우리 모두의 분발을 촉구하는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재물을 지혜롭게 관리할 것을 조언하십니다.

 

“아주 작은 일에 성실한 사람은 큰일에도 성실하고, 아주 작은 일에 불의한 사람은 큰일에도 불의하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불의한 재물로 친구들을 만들어라, 그래서 재물이 없어질 때에 그들이 너희를 영원한 거처로 맞아들에게 하여라. 너희가 불의한 재물을 다루는 데에 성실하지 못하면, 누가 너희에게 참된 것을 맡기겠느냐?”

 

불의한 재물을 잘 관리하여 가난한 이들이나 불우한 이들과 자선의 나눔으로 하늘에 보물을 쌓으라는 충고며, 바로 이것이 참 지혜로운 사랑의 길임을 깨닫습니다. 이런 부자라면 구원의 천국문은 자연스럽게 통과할 것입니다. 바로 1독서에서 정의의 예언자 아모스가 개탄하는 부자들, 탐욕에 눈먼 참 회개가 절박한 어리석은 사람들입니다. 

 

“빈곤한 이를 짓밟고, 이 땅의 가난한 이를 망하게 하는 자들아, 이 말을 들어라.”

이어 주님은 부자들의 만행을 지적한 후. 이들의 자만을 두고 맹세하십니다. 

“나는 그들의 모든 행동을 결코 잊지 않으리라.”

 

예나 이제나 우리의 절박한 물음은 동일합니다.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답은 분명합니다. 하느님 중심의 삶과 기도, 그리고 지혜와 사랑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특히 없는 이들, 가난한 이들과 나누는 사랑입니다. 바로 날마다 바치는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이렇게 살도록 결정적 도움을 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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