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3.14.사순 제3주간 화요일 다니3,25.34-43 마태18,21-35
인생은 “자비의 학교”이다
-기도와 회개, 용서와 자비의 사람이 됩시다-
“주님, 당신의 길을 저에게 알려 주시고,
당신의 행로를 제게 가르쳐 주소서.”(시편25,4)
파스카의 봄철입니다. 눈만 열리면 온누리에 가득한 주님의 자비입니다. 주님의 자비는 영원하십니다. 바로 시편 136장은 온통 주님의 자비로 가득한 세상을 노래합니다. 봄이 되면 시도 노래도 많습니다. 예전 써놓고 애송했던 시가 생각나 나눕니다. 이 또한 깊이 보면 주님의 자비를 노래한 시입니다. '예수님은 봄이다'란 시입니다.
“예수님은 봄이다
봄은 사랑이다
봄은 생명이다
봄이 입맞춘 자리마다
환한 꽃들
피어나고
봄의 숨결 닿은 자리마다
푸른 싹
돋아난다
예수님은 봄이다
봄은 사랑이다
봄은 생명이다.”-1999.3.
예수님의 생명과 사랑으로 가득한 파스카의 봄철입니다. 봄비 내린후 확연히 주변 풍경도 달라지기 시작합니다. 봄비란 시도 생각납니다. 봄비란 시를 떠올리면 정말 봄비같은 딸하나 있었으면 좋겠다는 주책없는, 대책없는 생각도 떠오릅니다.
“마음을 촉촉이 적시는
봄비!
하늘 은총
내 딸아이 하나 있다면
이름은 무조건
봄비로 하겠다”-2005.3.
봄비뿐 아니라 봄꽃, 봄길, 봄빛, 봄바람, 봄내음, 봄햇살, 다 예쁜 이름입니다. “봄햇살 붓으로”란 시도 생각납니다. 흡사 자비하신 아버지께서 그림 그리는 장면처럼 생각되어 저절로 솟아난 감흥에 써놨던 시의 추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오, 하느님
바야흐로 그림 그리기 시작하셨네
생명의 화판 대지위에
부드러운 봄햇살 붓으로
연한 초록색 물감
슬며시 칠하니
조용히 솟아나는 무수한
생명의 싹들
오, 하느님
당신의 화판
봄의 대지위에
바야흐로 그림 그리기 시작하셨네”-2007.3.
시는 짜내는 것이 아니라 선물처럼 주어진 것을 줍는 것이라는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습니다. 시가 저절로 와야지 내가 억지로 시를 불러낼수는 없습니다. 말그대로 시는 자비하신 주님 은총의 선물입니다. 시중의 시가 우리 수도형제들이 평생 날마다 7차례 바치는 시편 성무일도입니다.
시편집 대부분의 시가 하느님의 자비를 노래한 찬미와 감사의 시에 속합니다. 마음을 다해 기도하면서 하느님의 자비를 속속들이 체험하는 우리 수도자들입니다. 생명과 빛, 희망으로 가득한 시편들을 통해 하느님께 맛들이다 보면 저절로 세상의 시詩나 세상의 맛은 저절로 잊게 됩니다.
인생은 자비의 학교입니다. 평생학인이 되어 자비의 배움터에서 주님의 자비를 배워가는 우리 믿는 이들입니다. 제대가 없는 영원한 현역의 주님의 평생 전사이듯, 졸업이 없는 영원한 현역의 주님의 평생 학인인 우리들입니다. 역시 자비의 공부요 훈련입니다. 주님의 자비를 선택하여 훈련함으로 습관화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오늘 지금 여기 자비의 훈련장에서 자비의 실천에 의식적 노력을 다해야 하겠습니다.
참으로 주님의 자비를 체험할 때 기도와 회개는, 용서는 저절로 뒤따르기 마련입니다. 주님께서 무한히 용서하시고 사랑하심으로 여기까지 살아온 우리들이기에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 일곱 번까지도 용서가 가능합니다. 밑빠진 독에 물붓듯이 끊임없이 주어지는, 지칠줄 모르는 자비하신 아버지의 아가페 순수한 용서의 사랑입니다.
오늘 복음은 수없이 밥멋듯이 숨쉬듯이 용서하라는 주님의 명령에 이어 무자비한, 매정한 종의 비유가 나옵니다. 자비의 열매가 용서입니다. 주님의 자비를 체험한 마음에서 저절로 나오는 용서입니다. 아, 자비도 훈련이지만 용서도 훈련입니다. 지성이면 감천입니다. 용서의 훈련에 의식적으로 항구히 노력하다 보면 정말 은총으로 자발적 용서가 가능해집니다. 참으로 용서할 때 용서받음으로 내 먼저 치유되고 자유로워질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의 무자비한 종은 정말 무지의 사람입니다. 자기를 모릅니다. 얼마나 하느님께 사랑의 빚을 많이 졌는지 말입니다. 자기를 아는 것이 겸손이요 지혜인데 이 무자비한 종은 자비하신 하느님을 모르니 자기를 알 수 있는 길이 없습니다. 인간이 물음이라면 하느님은 답입니다. 하느님 없이는 내가 누구인지 알길이 없습니다.
하느님이 계시기에 회개와 겸손인데 도대체 하느님 없이 지정 회개와 겸손은 불가능합니다. 똑같은 제2차 세계 대전의 전범국가인 독일과 일본을 비교하면 뚜렷이 드러납니다. 독일은 겸손히 자기의 죄과를 뉘우쳤지만 일본은 여전히 자신의 죄과를 인정하는 회개와 겸손이 없습니다.
자비로운 하느님도, 자기도 모르는 오늘 복음의 무지하고 무자비한 종이기에 그렇게 많은 빚을 탕감받고도 까맣게 잊고 소액의 빚진 자기 빚장이 종에게는 그토록 무자비하고 가혹합니다. 주님의 정의로운 판결이자 우리 모두에게는 경종이 됩니다. 행여나 주위 형제들에게 무자비했다면 즉시 회개하여 용서하라는 깨우침을 줍니다.
“이 악한 종아, 네가 청하기에 나는 너에게 빚을 다 탕감해 주었다.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하지 않느냐? 너희가 저마다 자기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의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
이래서 의식적 용서의 훈련입니다. 용서가 되지 않으면 용서하려는 지향을 던져놓고 의지적으로 용서의 노력을 다하다 보면, 때가 될 때 하느님의 용서의 은총을 주실 것입니다. 끊임없이, 한결같이 성경 말씀 공부와 시편 성무일도를 통해 하느님 자비의 훈련에 항구하다 보면 자비하신 하느님은 때가 되면 ‘용서의 사랑’ 은총을 주실 것입니다.
그러니 자비의 훈련을 소홀히 하지 않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참 좋은 주님의 자비 훈련의 사람이 제1독서 다니엘서의 다니엘의 세 동료들입니다. 느부갓네살 임금의 금신상에 절하기를 거부하자 이들은 불타는 화덕속에 던져졌고 이들은 하느님을 찬송하고 주님을 찬미하며 불길 한가운데를 거닐읍니다. 그리고 아자르야는 불 한가운데 우뚝 서서 입을 열어 주님께 찬미가를 바칩니다.
다니엘4,34-43까지 아자르야의 구구절절 아름답고 감동적인 용서를 청하는 진정성 가득한 겸손한 회개의 기도가, 주님께 대한 신뢰와 사랑 가득한 고백의 기도가 심금을 울립니다. 이 세 유다인 젊은이들이 평소 자비하신 하느님 공부가, 하느님 체험이, 하느님 자비의 훈련이 얼마나 항구하고 깊었는지 깨닫게 됩니다. 때로 불가마 연옥같은 세상에서 우리가 살길은 이런 항구하고도 간절한 기도뿐임을 깨닫게 됩니다. 이들이 거인 신앙에 비하면 우리는 난장이 신앙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정말 하느님의 자비를 공부하고 체험하는데 온갖 노력과 훈련, 정성을 다해야 하겠습니다. 이렇게 주님의 평생 학인으로 진인사대천명의 자세로 자비의 수행에 항구할 때 주님은 당신 자비를 풍성히 체험할 수 있게 해주실 것입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기도 합니다.
“주님, 당신의 진리 위를 걷게 하시고 저를 가르치소서.
당신께서 제 구원의 하느님이시니
날마다 당신께 바랍니다.”(시편25,5).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