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2.19.사순 제1주간 월요일 레위19,1-2.11-18 마태25,31-46
최후심판
-나는 오른쪽인가 왼쪽인가?-
“우리 모두가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에 ‘한 사람’이다”
"주께서는 의인에게 복주시고,
사랑으로 방패삼아 감싸 주시나이다."(시편5,13)
밤의 어둠을 밝히는 등불처럼, 날마다 무지의 어둠을 밝히는 등불같은 강론 쓰기를 소망합니다. 오늘 다산의 말씀과 공자의 말씀도 귀한 깨우침이 됩니다.
“배움에도 용기가 필요하듯, 용기에도 배움이 필요하다. 무모한 용기를 앞세우는 사람은 주변 사람들을 어지럽힌다.”-다산
무지, 무식하고 용감하면 답이 없습니다. 그 폐해는 상상을 초월합니다. 자기를 아는 것이 지혜요 겸손입니다. 끊임없이 배우고 공부하는 겸손한 자세가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맨몸으로 범을 잡고 강을 건너려다 죽어도 후회하지 않는다는 자와는 함께하지 않겠다. 신중하게 계획을 세워 일을 이루는 사람과 함께 하겠다.”-논어
다산은 물론 공자역시 얼마나 신중하고 합리적인지, 또 겸손하고 지혜로운지 깨닫습니다. 무모하고 용감한 어리석은 이들과는 거리가 먼 분들입니다. 무모(無謀)하고 용감하면 답이 없습니다. 새벽 일어나 열심하고 한결같은 사제도반들의 매일 말씀을 바탕한 묵상글을 몇편 대략 읽어봤습니다. 정말 다양하면서도 많은 것을 배우고 깨닫게 됩니다. 똑같은 복음과 독서 말씀을 기본으로한 묵상글이지만 사제마다 참 다양합니다. 모두가 진리를 반영하나 진리의 한 부분만 반영할뿐 진리자체라 할 수는 없습니다. 이런 깨달음이 참으로 겸허하게 합니다.
올해 사순시기 교황님 담화문은 얼마나 깊고 풍요로운지 사순시기 동안 독본(讀本)으로 삼고 싶습니다. 유다인들은 물론 초대교회 신자들의 전통적 수행인 기도와 자선과 단식에 대한 설명도 참 명쾌했습니다.
“기도와 자선과 단식은 서로 관계 없는 세가지 행위가 아니라, 우리를 짓누르는 우상들과 우리를 구속하는 집착을 쫓아버리는, ‘개방과 자기비움의 단일한 행위’입니다. 그렇게 할 때 위축되고 외로웠던 마음들은 회복될 것입니다.”
‘개방과 자기비움의 단일한 행위’로 요약되는 겸손과 사랑과 자유의 삶이요, 이래야 비로소 참된 자유인의 삶입니다. 참으로 우리를 겸손과 사랑, 그리고 자유에로 인도하는 죽음에 대한 묵상입니다. 성 베네딕도는 물론 사막교부들의 이구동성의 권고 말씀으로 제가 참 많이 자주 인용했던 말마디입니다
“죽음을 날마다 눈앞에 환히 두라.”
이런 가르침이 하루하루 날마다 처음이자 마지막처럼 거품이나 환상이 걷힌 본질적 깊이의 삶을 살게 합니다. 참으로 겸손히 사랑하며 자유롭게 살게 합니다. 결국 영원히 남는 것은 사랑뿐입니다. 오늘 레위기는 하느님을 닮은 거룩한 삶이 사랑과 분리된 것이 아님을 보여줍니다. 제1독서 레위기에서 주님은 모세를 통해 가르치시고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친히 귀한 가르침을 주십니다.
“나, 주 너희 하느님이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거룩함은 추상적이고 막연한 것이 아니라 구체적 금령을 통한 사랑의 실천을 통해 이뤄짐을 봅니다. 한번 자신의 상태를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1.도둑질해서는 안된다.
2.속여서는 안된다.
3.사기해서는 안된다.
4.거짓맹세를 해서는 안된다.
5.이웃을 억눌러서는 안된다.
6.이웃의 것을 빼앗아서는 안된다.
7.이웃에 줄 품삯을 다음 날 아침까지 가지고 있어서는 안된다.
8.귀먹은 이에게 악담해서는 안된다.
9.눈먼이에게 장애물을 놓아서는 안된다.
10.재판할 때에 불의를 저질러서는 안된다.
11.가난한 이라고 두둔해서도 안되고, 세력있는 이라고 우대해서도 안된다.
12.중상해서는 안된다.
13.이웃의 생명을 걸고 나서서는 안된다.
14.형제를 미워해서는 안된다.
15.앙갚음 하거나 앙심을 품어서는 안된다.
참으로 구체적 금령들로 표현된 섬세하고 자상한 실천해야 할 사랑의 내용들을 공부하는 마음으로 열거해 봤습니다. 새삼 디테일에 강해야 하는 사랑의 실천임을 깨닫습니다. 모두가 시공을 초월하여 오늘날 현실에도 그대로 적용될 사랑의 내용들입니다. 주님 친히 명령하는 다음 두마디 말씀이 이 모두를 요약합니다.
“너희는 하느님을 경외해야 한다. 나는 주님이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나는 주님이다.”
참으로 거룩한 사람은 이런 하느님 경외와 이웃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임을 배웁니다. 오늘 복음의 최후심판의 잣대는 더욱 구체적이고 현실적입니다. 기도나 전례, 계명의 준수도 아닌 사랑 실천이 최후심판의 잣대입니다. 오른쪽의 구원받은 양들과 왼쪽의 심판받은 염소들로 확연히 구분됩니다.
1.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2.너희는 내가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3.너희는 내가 나그네였을 때에,
4.너희는 내가 헐벗을 때에,
5.너희는 내가 병들었을 때에,
6.너희는 내가 감옥에 있을 때에,
아주 구체적 사안에 어떻게 응답했느냐가 최후심판의 잣대라는 것입니다. 국적, 종교, 인종, 남녀노소를 넘어 곤궁한 이들과 자기를 동일시 하는 참으로 놀랍고 충격적인 주님의 말씀입니다. 하느님께는 전인류가 구원의 대상입니다. 구체적 사랑을 실천한 오른쪽 양들에 속하는 사람들에 대한 주님의 응답 말씀에 이어 사랑을 실천하지 못한 왼쪽 염소들에 속하는 사람들에 대한 말씀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주지 않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다.”
과연 나는 어느쪽에 속하겠는지요? 깊이 들여다보면 모두가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이요 어느 누구 하나도 소홀히 해서는 안됨을 배웁니다. 바로 이들 하나하나와 자기를 동일시하는 주님이니, 이들은 그대로 주님의 현존이요 성체이기 때문입니다. 미사중 주님의 성체를 귀히 대하듯 살아있는 주님의 성체인 이웃 하나하나를 귀히 대해야 함을 봅니다. 바로 이런 사랑을 실천한 성녀 마더 데레사요, 성 샤를로 후고입니다. 참으로 우리를 부끄럽게 하는, 사순시기 우리의 회개를 촉구하는 오늘 복음 말씀이요, 마지막 말씀은 오늘 우리에게 주어지는 영원한 화두입니다.
“이렇게 하여 그들은 영원한 벌을 받는 곳으로 가고, 의인들은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곳으로 갈 것이다.”
하루하루가 선물이요 심판과 구원의 날입니다. 살아있을 때, 회개와 사랑이지 죽으면 모두가 끝입니다. 최후심판과 구원은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시작됩니다. 이 거룩한 미사중 주님의 성체를 귀히 모시듯 오늘 하루도 만나는 하나하나 형제를 주님의 성체처럼 귀히 대하며 구원의 삶을 살도록 주님의 은총을 청합시다.
"주께서 당신 백성에게 힘을 주시리라.
주께서 당신 백성에게 평화의 복을 주시리라. 하느님께서."(시편29,11)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