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2.21. 사순 제1주간 수요일 요나3,1-10 루카11,29-32
회개의 여정(旅程)
-무지(無知)에 대한 답은 회개(悔改)뿐이다-
“하느님, 제 마음을 깨끗이 만드시고,
제 안에 굳건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시편51,12)
회개의 여정입니다.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한 것이 회개입니다. 무지에 대한 답은 회개뿐입니다. 회개의 여정을 통해 서서히 걷히는 무지의 어둠입니다. 하느님 앞에서 회개할 때 비로소 자기를 아는 겸손과 지혜입니다. 부패인생을 발효인생으로 바꾸는 것도 회개의 여정뿐입니다. 하루하루가 늘 새로운 선물일 수 있음은 회개를 통한 깨달음입니다. 영성생활의 기초가 회개입니다. 우선적인 순서도 메타노니아(회개), 코이노니아(친교), 디아코니아(봉사)입니다.
사순시기는 회개의 시기입니다. 사순시기를 열던 재의 수요일, 머리에 재를 얹을 때,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라는 사제를 통한 주님의 말씀이 사순시기의 삶을 요약합니다. 베네딕도 성인 역시 그의 규칙서 <제49장 사순절을 지킴에 대하여>에서 다음과 같이 묘사합니다.
“다른 때에 소홀히 한 것을 이 거룩한 시기에 씻어내기를 권하는 바이다. 이것은, 우리가 모든 악습들을 멀리하고, 눈물과 함께 바치는 기도와, 독서와, 마음으로부터 우러나는 통회와 절제에 힘쓸 때, 합당하게 이루어지는 것이다.”(성규49,3-4).
눈만 열리면 곳곳에 회개의 표징들로 가득합니다. 교황님 홈페이지를 열고 어제가 “사회정의의 세계의 날”(World Day of Social Justice)임을 알았습니다. “소비문화(Cultur of waste)”를 개탄한 교황님의 한말씀도 새롭게 와닿았습니다.
특별히, 교황은 끊임없이 기후변화에 의해 위협받는 우리 ‘공동의 집’인 지구의 보호를, 이민자들과 피난민들의 보호와 환영을 호소하면서, ‘무관심의 지구화(the globalization of indifference)’를 경고하면서 부유한 나라들이 가난한 자들을 돕기 위한 구체적 행동에 돌입할 것을 촉구했습니다. “집은 여기다(Home is here)”, 시위자들의 팻말의 말마디도 한눈에 들어왔습니다. 정의의 열매로 표현되는 회개임을 깨닫습니다.
마침 오래전 자작 고백시가 반가워 인용합니다. 18년전 2006년 제 나이 58세 이때쯤 쓴 “나 창밖을 볼 때마다”라는 장시입니다. 이 시또한 제게는 시공을 초월한 회개의 표징이 됩니다.
“창밖 풍경은
살아있는 그림, 살아있는 성경
해마다 창밖을 통해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지나가고
날마다 새벽, 아침, 점심, 저녁, 밤이 지나간다.
때로는 구름도 흘러가고 새들도 날아간다.
창밖을 바라보며 배우는 인생
하루를 평생처럼, 평생을 하루처럼 살아야함을
또 매사 창밖 풍경을 바라보듯 거리를 두고 초연히 바라봐야 함을 배운다.
아, 계절을 볼 수 없어 철없는 부지기수의 사람들,
시간을 볼 수 없어 때를 분별 못하는 부지기수의 사람들,
오늘의 현실은 자연을 떠난 업보다.
저녁기도 시간 짙어가는 어둠,
‘어, 내 인생 몇시이지?’ 불현 듯 떠오른 생각
내 나이 58세, 1949년생
아마 오후 3시, 혹은 3시 30분? 점점 어둠도 고요도 깊어지겠지.
해맑은 아이라면 아침이슬 머금은 아침6시,
십대 사춘기 나이라면 오전 10시,
한창 청년의 나이라면 낮 12시,
삼십대의 무르익은 젊음이라면 오후 1시,
이러니 하루가 평생의 압축이 아닌가?
하루를 평생처럼, 평생을 하루처럼 살아야하지 않겠는가?
맑고 밝기만 하고 깊이가 없는 오전의 나이들이라면
점심지나면서는 고요히 스며드는 어둠과 더불어
깊어지는 오후의 나이들이어야 맞는 거다.
그리고 밤 나이에는 풍요로운 고독과 침묵의 품안에
별빛, 달빛 그윽히 반짝이는 그분 밤의 품안에 머물다 잠같은 죽음을
맞이해야 하는 거다.
이어 새벽 동터오는 아침과 더불어 주님과 함께
찬란한 부활을 맞이하는 거다.
궁극엔 햇빛 찬란한 부활의 아침을 향한 여정이기에
내 나이 시간에 구애됨 없이 아침에는 아침 나이의 순수로
점심에는 점심 나이의 열정으로 살 수 있기에
늘 희망 가득할 수 있는 우리들이다.
‘내 나이 지금 몇시인가?’
나 창밖을 바라볼 때 마다 생각한다.”-2006.2.
18년전 집무실 그대로 오늘 지금 여기 이 자리이니 새삼 ‘정주의 축복’을 깨닫습니다. 지금부터 18년후라면? 아마도 살아있기 힘들 것입니다. 새삼 회개하라 주어지는, 연장되는 선물같은 날들임을 깨닫습니다. 말그대로 절박한 깨달음입니다. 회개의 여정은 동시에 깨달음의 여정이요 깨달음과 더불어 무지의 어둠에서 벗어나 자비롭고 지혜로운 빛나는 인생이 될 것입니다.
오늘 말씀도 온통 회개에 집중되고 있습니다. 요나의 회개의 선포에 즉각적인 거국적, 거족적 회개로 응답하는 니느베 사람들, 시공을 초월 전 인류가 자비로운 하느님의 눈에는 회개의 대상, 구원의 대상임을 깨닫습니다. 마지막 묘사를 통해 환히 드러나는 하느님의 마음,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이 악한 길에서 돌아서는 모습을 보셨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마음을 돌리시어 그들에게 내리겠다고 말씀하신 재앙을 내리지 않으셨다.’
악한 길에서 하느님께로 돌아서는 회개요, 이때 하느님께서도 마음을 돌리시어 우리를 당신 품 안에 맞아들이십니다. 그러니 우리 삶은 살아 있는 그날까지 끊임없는 회개의 여정임을 깨닫습니다. 무지의 악입니다. 무지에 눈먼 악한 세대가 표징을 요구합니다.
오늘 복음 말씀은 시공을 초월, 무지한 중생들에게 회개를 촉구하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요나의 설교를 듣고 회개한 이방의 니느베 사람들처럼, 솔로몬의 지혜를 들으려고 솔로몬을 찾았던 이방의 남방 여왕처럼 신속하게 주님을 찾아 회개하라는 말씀입니다.
“이 세대는 악한 세대다.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지만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보라,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
그러나 보라,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
솔로몬 보다 더 큰, 지혜로운 현자가, 요나보다 더 큰, 예언자가 시공을 초월하여 바로 오늘 지금 여기 우리와 함께 계신 예수님입니다. 무지에 눈이 멀어, 표징들의 표징인 빛나는 회개의 표징, 구원의 표징, 희망의 표징, 자비의 표징, 지혜의 표징인 예수님을 못보고 표징을 찾는,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무지에 눈먼 참 어리석은 사람들입니다.
무엇보다 날마다의 이 거룩한 주님의 미사보다 더 좋은, 은혜로운 회개의 표징도 없을 것입니다. 회개를 통한 주님의 빛이 무지의 어둠을 밝힙니다.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사순시기 회개의 여정에 충실하도록 결정적 도움을 주십니다.
"주님은 내 등불을 밝혀 주시고,
당신은 내 어둠을 비추시나이다."(시편18,29).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