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0.9. 연중 제27주간 금요일                                                                        요엘1,13-15;2,1-2 루카11,15-26


                                                            부자이면서도 가난하게 살 수는 없는가?

                                                                          -회개, 성령, 일치-


오늘 강론 제목이면서 요즘 제 화두는 ‘부자이면서도 가난하게 살 수는 없는가?’입니다. ‘가난하게’ 대신 ‘소박하게’ ‘품위있게’ ‘자비롭게’ 넣어도 그대로 통합니다. 분명 외관상 대부분의 교회나 성직자들은 가난하지 않습니다. 부유합니다. 그리스도의 교회나 성직자들이 추종하는 예수님은 분명 가난했습니다. 부자가 아니었습니다. 요즘 대형 교회들을 보면 참 부유한 기업체 같아 보이고 부유한 성직자들을 보면 사업가CEO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참 어려운 세상입니다. 이렇게 어려웠던 때는 없었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합니다. 모든 세대, 대부분의 자영업자들의 하소연이지만 20-30대의 일자리가 없는 젊은이들의 절망감은 하늘을 찌를 듯 합니다. 한 줄로 요약한 헬조선 ‘한국’에 대한 댓글 모음집을 보았습니다.


-젊은이들이 아프면 청춘이 되는 국가

세상 모든 문제와 부조리가 내 마음 가짐에 달린 문제인 국가

열정과 노력 두 단어로 모든 사회 문제가 해결되는 국가

국가의 문제가 생기면 국민성금을 모아야 하는 국가

그러다 정작 국민이 문제가 생기면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국가

평범하게 살고 싶다는 욕심 부리면 안되는 국가

니 목숨은 니가 알아서 챙겨야 하는 국가

어쨌든 괴로우나 즐거우나 나라 사랑해야 하는 국가

삶이 싫으면 중이 떠나야 하는 국가

탈출만이 유일한 국가

그래서 떠나려니 애국심이 부족하다고 바짓가랑이 붙잡는 국가

의무는 산더미인데 권리는 거의 없는 국가

빚지고 토굴같은 단칸방에서 죽지 못해 사는 자들이 재벌의 인생을 걱정해주는 국가

유유값 인상을 핑계로 생필품 값이 오르더니, 자동차 출고가격까지 올라가는 단결된 국가

직접세는 낮은데 간접세가 높아 시민들이 먹고 사는 것만으로도 빚을 져야 하는 국가

돈을 많이 벌수록 세금을 더 적게 내는 국가-


오늘의 적나라한 불편한 사회현실입니다. 이런 현실에 어떤 이들은 ‘이게 국가냐?’며 의문을 제기합니다. 이 또한 우리의 회개를 촉구하는 현실입니다. 이런 세상에 어떻게 부유한 교회가 복음을 선포할 수 있는가가 참 쉽지 않은 숙제입니다.


부자이면서 가난하게, 자비롭게, 품위있게 살 수는 없는가? 답은 있습니다. ‘부자가 하늘나라에 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 구멍을 통과하는 것이 쉽다’는 예수님의 말씀에, ‘그럼 누가 구원을 받을 수 있겠는가?’의문을 제기하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하느님께는 불가능이 없다며 부자의 구원 가능성을 열어 놓았습니다. 바로 회개의 은총을 통한 부자이면서 가난한 삶입니다.


부는 타도의 대상이 아니라 나눔의 대상입니다. 부유하기로 하면 가톨릭의 수장인 프란치스코 교황님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참으로 부유하면서도 가난하게, 소박하게, 자비롭게 살아가는 교황님의 진정성을 의심하는 이는 아무도 없습니다. 아무도 교황님을 위선자라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부자이면서도 가난하게 모든 이들에게 사랑과 신뢰를 받으며 살 수 있겠는 지요?


예언자적 활동에 충실했던 두 수도승 대가에 대한 결론에 전적으로 공감했습니다. ‘생존이냐 예언이냐(survival or prophecy)?’ 둘로 대립적으로 나눌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평자(Michael casey)의 결론같은 언급입니다.


-기구(instititution)가 동시에 장레크레르크(Jean Leclercq)와 토마스 머튼(Thomas Merton)을 예언자로서의 그들의 활동을 떠받쳐줬다. 그와 동시에 기구는 그들에게 비판을 위한 접근할 수 있는 표적(targets)을 마련해 줬다. 수도원들이 오래 존속할수(survive) 있기를! 수도원의 생존은 예언의 기반(matrix)이기에-


아, 바로 이게 현실적 지혜입니다. 공동체가 받쳐줘야 예언자의 역할도 할 수 있고 가난을 구원할 수 있다는 통찰입니다. 부와 가난이 자발적 사랑의 나눔을 통해 공존공생할 수 있는 길을 찾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부유하면서도 가난하고 품위있게 살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모순도, 위선도 아닌 하느님의 회개 은총에 의한 진정한 가능성입니다. 


첫째, 회개悔改입니다.

여기서 제외될 자 아무도 없습니다. 특히 부유한자 교회의 회개가 우선입니다. 오늘 요엘서도 온통 회개에 대한 촉구입니다. 


“너희는 단식을 선포하고 거룩한 집회를 소집하여라. 원로들과 이 땅의 모든 주민을, 주 너희 하느님의 집에 모아 주님께 부르짖어라. 아, 그날! 정녕 주님의 날이 가까웠다.”


오늘이 그날입니다. 심판이 구원의 그날이 되기 위해 바로 오늘 지금 여기 이 자리에서 온공동체가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매일 함께 거행하는 미사역시 공동회개시간입니다.


둘째, 성령聖靈으로 충만한 삶입니다.

회개를 통해 마음이 깨끗이 비워졌으면 마음을 성령으로 충만케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령 충만해야 하느님의 뜻에 따른 회개의 열매, 사랑의 실천입니다. 성령으로 채워지지 않으면 복음에서처럼 쫓겨났던 더러운 영들이 다시 찾아와 자리를 차지합니다. 복음의 마지막 대목 그대로입니다.


“그들은 그 집이 말끔히 치워지고 정돈되어 있는 것을 보게 된다. 그러면 다시 나와, 자기보다 더 악한 영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 자리를 잡는다. 그리하여 그 사람의 끝이 처음보다 더 나빠진다.”


우리 역시 회개로 깨끗해진 마음 공간이 더러운 영이 아닌 하느님의 성령으로 채우고자 매일 함께 성무일도 기도를 끊임없이 바칩니다. 어제 읽은 영어 글귀도 잊지 못합니다.


Nature may abhor a vacuum but the devil loves one!


‘자연은 진공상태를 싫어한다. 그러나 악마는 그것을 좋아한다.’

자연은 빈공간을 그냥 놔두지 않습니다. 부지런히 온갖 잡풀로 채웁니다. 그러나 악마는 우리의 진공상태를 좋아하니 자기가 똬리 틀고 자리 잡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한가함은 영혼의 원수'라는 성 베네딕도의 통찰과 일맥상통합니다. 성령으로 마음의 진공상태를 충만케 해야 더러운 영들이 침입하지 못합니다.


셋째, 내외적 일치一致의 삶을 추구하십시오.

획일적 일치가 아니라 주님 안에서 다양성의 일치입니다. 회개를 통한 하느님 중심의 삶일 때 가능합니다. 오늘 복음의 주님 말씀은 만고불변의 진리입니다.


“어느 나라든지 서로 갈라서면 망하고 집들도 무너진다.”


나라든 공동체든 외적 침입으로 망하지는 않았습니다. 언제나 내적분열이 원인이 되었습니다. 사탄은 영리합니다. 사탄은 서로 싸우면 서로 망한다는 것을 알기에 서로 싸우지 않습니다. 하여 예수님은 베엘제불의 힘을 빌어 마귀들을 쫓아낸다는 적수들의 모함이 잘 못 되었음을 밝힙니다. 벙어리 마귀를 쫓아낸 자체가 하늘에서 내려오는 표징인데 눈이 멀어 새삼 하늘의 표징을 요구하는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 또한 회개의 대상입니다.


“그러나 내가 하느님의 손가락으로 마귀들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와 있는 것이다.”


주님이 우리 마음 중심에 자리잡을 때 마귀는 쫓겨나 하느님 나라의 실현이요 내외적 일치의 삶입니다. 하느님이 하시는 일이 일치의 삶이라면 마귀가 즐겨하는 일은 분열입니다. 마귀의 유혹에 빠져 분열을 조장하는 것이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자 대죄임을 깨닫습니다. 오늘날 현 사회는 얼마나 많이 분열되어 있고 그 벽은 얼마나 두텁고 그 골은 얼마나 깊은지요. 바로 마귀의 분열의 유혹에 빠진 결과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우리 안의 어둠의 세력을 몰아내시고 성령으로 충만케 하시며 내외적 일치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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