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의 연인戀人'으로 삽시다 -무지無知에 대한 답은 지혜智慧뿐입니다-2019.11.27.연중 제34주간 수요일

by 프란치스코 posted Nov 27,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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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1.27.연중 제34주간 수요일 

다니5,1-6.13-14.16-17.23-28 루카21,12-19

 

 

 

'지혜의 연인戀人'으로 삽시다

-무지無知에 대한 답은 지혜智慧뿐입니다-

 

 

 

지혜에 대한 사랑, ‘필로소피아philosophia’가 철학입니다. 지혜를 사랑하는 ‘지혜의 연인’, 얼마나 멋지고 아름다운 강론 제목인지요. 이런 지혜만이 무지에 대한 답임을 깨닫습니다.

 

전 세계인으로부터 사랑과 존경을 한몸에 받고 있는 세기의 성자, 세기의 현인, 지혜의 연인, 가톨릭 교회의 자랑 프란치스코 교황입니다. 타일란드와 일본 사목  방문후 귀국 즉시 떠날 때와 똑같인 로마 마리아 성당에서 감사기도를 드리는 모습은 얼마나 거룩하고 아름다운지요!

 

일본 국민들에게는 ‘따뜻한 환영과 너그러운 환대’에 감사하는 텔레그램 메시지를 보냈고 귀국하는 도중 상공을 통과했던 나라들-러시아, 필란드,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폴란드, 체츠 공화국, 오스트리아,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이탈리-에서는 ‘기쁨과 평화의 축복’을 간청했다 합니다. 

 

저 역시 2014년 산티아고 순례 여정을 마친 후, 마드리드에서 인천 영종도 국제공항에 귀국 도중 상공의 기내안에서 온 세상에 주님의 축복을 청하며 썼던 강론의 기억이, 또 미국 뉴튼 수도원에서 잠시 동안의 여정을 마친후 2015년 2월초 귀국 도중 태평양 상공에서 온 세상에 주님의 축복을 청하며 썼던 강론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교황님은 일본을 떠나기전 예수회 상지(sophia;지혜) 대학에서는 신적 지혜를 찾고 발견하고 확산시킬 것을 역설했습니다. 일본의 가톨릭 교회는 500년 정도의 역사를 지녔지만 현재 가톨릭 인구는 전 인구의 0,42%로 50만에 불과합니다. 그런까닭인지 교황님의 강론이니 메시지에는 ‘하느님(God)’이란 말마디는 거의 찾아볼 수 없었지만 지혜로운 교황님은 하실 말씀은 에둘러 다 하셨습니다.

 

“한국, 인간이 벌레가 된 나라”, 일간신문 컬럼의 자극적 기사 제목이 한 눈에 들어왔습니다. ‘기생충’이란 영화가 이런 사실을 보여줍니다. 그래도 이건 아닙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믿는 이들이 희구할 바 진리의 연인, 지혜의 연인입니다.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된 인간의 너무 당연하고 자연스런 귀결입니다. 얼마전 써놓고 내심 다짐한 글입니다.

 

-“진리를 사랑하는/진리의 연인

지혜를 사랑하는/지혜의 연인으로 살고 싶다

날마다의/미사와 강론은/내 운명이요 사랑/내 삶의 중심/삶의 의미

세상 떠나는/마지막 그날까지/새벽마다

주님께 사랑의 고백 편지 쓰고(강론)/함께 걸으며(산책)

대화 나누고 싶다(기도)

내/하나의/소원은 이것뿐이다.”-

 

무지에 대한 답은 지혜 하나뿐입니다. 무지의 어둠을 밝히는 지혜의 빛입니다. 참으로 하느님은 지혜의 원천입니다. 바로 예수님은 하느님의 지혜입니다. 우리 역시 하느님을 참으로 사랑하여 하느님을 알고 나를 알아갈수록 겸손과 지혜요, 무지로부터의 해방입니다. 

 

그러니 하느님을 알고 나를 알아가는 겸손과 지혜 공부보다 더 중요한 평생 공부는 없습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과 제1독서의 다니엘이 참으로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마치 예수님의 예표처럼 생각되는 다니엘입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사랑할 때 하사되는 지혜와 겸손, 그리고 용기입니다. 

 

예수님은 박해에 직면한 제자들에게 참으로 담대할 것을 가르치십니다. 이 모두가 주님을 증언할 기회가 될 것이고, 변론할 말도 미리 준비하지 마라 하십니다. 어떠한 적대자도 맞서거나 반박할 수 없는 언변과 지혜를 내가 주겠다 말씀하십니다. 참으로 무지에 대한 답은 하느님의 지혜이신 예수님뿐임을 깨닫습니다. 마지막 예수님 말씀은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복음의 핵심이자 지혜의 절정입니다.

 

“그러나 너희는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을 것이다. 너희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을 것이다.”

 

참으로 주님만을 믿고 희망하고 사랑하는 자의 영혼은 하느님 안에 있기에 아무도 손대거나 해칠 수 없다는 주님의 선언입니다. 끝까지 인내하는 자가 구원의 생명을 얻을 것이니 바로 순교성인들은 물론 순교적 삶을 살아가는 모든 이들이 그의 생생한 증거입니다.

 

오늘 제1독서의 다니엘은 얼마나 지혜롭고 용기가 출중한지요! 앞서의 네부카드네르 임금에 이어 그 아들 벨사차르 임금을 대하는 데도 전혀 두려움이 없습니다. 무지몽매한 벨사차르 임금의 왕궁 벽에 저절로 쓰여졌던 글자를 해독하는 하느님의 현자, 다니엘입니다. 흡사 창세기의 요셉을, 오늘 복음의 예수님을 보는 듯합니다. 

 

“임금님의 선물을 거두시고 임금님의 상도 다른 이에게 내리십시오.---임금님께서는 하늘의 주님을 거슬러 자신을 들어 높이셨습니다. 주님의 집에 있던 기물들로 술을 드셨습니다. 보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하며 알지도 못하는 신들을 찬양하셨습니다. 임금님의 목숨을 손에 잡고 계시며 임금님의 모든 길을 쥐고 계신 하느님을 찬송하지 않으셨습니다.”

 

무사無私, 무욕無慾의 사랑에서 나오는 다니엘의 지혜임을 깨닫습니다. 조모조목 논리정연하니 반박할 길이 없습니다. 벨사차르 임금처럼 모든 것을 다 갖췄어도 삶의 중심에 하느님이 없어 완전 무지와 허무의 헛된 삶을 살아가는 이들도 많을 것입니다. 다니엘의 ‘므네 므네 트켈 파르신(프레스의 복수)’ 뜻 풀이도 참 재미있습니다.

 

“‘므네’는 하느님께서 임금님 나라의 날수를 헤아리시어 이 나라를 끝내셨다는 뜻입니다. ‘트켈’은 임금님을 저울에 달아 보니 무게가 모자랐다는 뜻입니다. ‘프레스’는 임금님의 나라가 둘로 갈라져서, 메디안이들과 페르시아인들에게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나라든 개인이든 그 흥망성쇠가 하느님 손안에 있음을 봅니다. 하느님 중심의 삶에서 벗어날 때 재앙이요 불행임을 깨닫습니다. 인명은 재천입니다. 과연 하느님께서 보실 때 우리의 날 수는 얼마나 남았겠는지요. 하느님께서 우리를 저울에 달아 본다면 무게는 모자라지는 않겠는지요.

 

참으로 하루하루 깨어 죽음을 날마다 눈앞에 환히 두고 살면서, 다니엘처럼 하느님을 영원히 찬송 찬양하는 삶에 충실하고 항구해야 함을 깨닫습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회개한 우리 모두에게 지혜와 겸손을 선사하시며 말씀하십니다.

 

“너는 죽을 때까지 충실하여라. 내가 생명의 화관을 너에게 주리라.”(묵시2,10).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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