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신자信者의 삶 -만남, 증언, 추구-2021.4.4.주님 부활 대축일

by 프란치스코 posted Apr 04,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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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4.4.주님 부활 대축일                                               사도10,34ㄱ.37ㄴ-43 콜로3,1-4 요한20.1-9

 

 

 

진짜 신자信者의 삶

-만남, 증언, 추구-

 

 

 

오늘은 주님 부활 대축일입니다. 작년에 이어 이렇게 마스크 하고 노래 부르지 못하기는 처음입니다. 부활의 기쁨을 맘껏 노래할 수 있었던 예전의 부활 축일이 그립습니다. 예전, 오늘 부활 대축일에 함께 불렀던 시편 화답송은 얼마나 흥겨웠던지요. 

 

“이날이 주께서 마련하신날 이 날을 기뻐하자 춤들을 추자.”

 

함께는 못해도 오늘 혼자 거닐 때 노래 기도로 바치시기 바랍니다. 어제에 이어 장마같은 비오는 날씨 역시 기후변화의 탓 아닌가 생각됩니다. 파스카의 봄꽃들은 활짝 만개했지만 웬지 모르게 우울하게 쓸쓸하게 느껴지는 올해의 부활 대축일입니다. 이태리 로마에 있는 수녀님의 편지 역시 어둡고 힘든 분위기였습니다.

 

“신부님, 

주님 부활 축하드립니다. 지금쯤은 성야 미사준비하시겠군요.

저는 현재 공동체에 코로나 환자가 13명 발생하여 격리중에 있습니다. 2주간을 갇혀 있으니 신경만 곤두섭니다. 모든 전례도 TV로 하고 사순시기를 어떻게 보내고 있는지 모르게 지나고 있습니다. 아무쪼록 조심하시고 건강한 모습으로 뵐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전세계적으로 코로나로 인한 전무후무한 재앙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다시 새롭게 시작해야 합니다. 주님 부활 찬미의 기쁨이 재앙을 축복으로 바꿉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스카의 기쁨을 살아야 합니다. 만개하기 시작한 온갖 봄꽃들 주님 부활의 기쁨을, 파스카의 기쁨을 살라고 우리를 위로하고 격려합니다.

 

요즘 피어나기 시작한 예쁜 튤립은 꽃말이 ‘영원한 사랑’이고, 활짝 피기 시작한 진달래꽃의 꽃말은 ‘사랑의 기쁨’이라 합니다. 이들 꽃말처럼 영원한 사랑을, 사랑의 기쁨을, 파스카의 주님을 노래하면서 오늘 부활 대축일을 맘껏 즐기시기 바랍니다. 방금 들은 파스카의 부속가와 알렐루야가 우리에겐 큰 위로와 힘이 됩니다. 후반부 내용 그대로 인용합니다.

 

“내 희망 그리스도 살아계시니 그 제자들 앞에서 갈릴래아로 가시리라. 

그리스도 죽은이들 가운데서 정녕 부활하심을 우리는 아노니

승리자 임금이시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알렐루야, 알렐루야, 알렐루야

그리스도 우리의 빠스카 제물로 희생 되셨도다.”

 

부활하신 그리스도 예수님은 우리 삶의 현장인 갈릴래아에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예수님과 함께 어둠에서 빛으로, 죽음에서 생명으로, 절망에서 희망으로 부활한 우리들입니다. ‘알렐루야!’, 우리의 영원한 화두입니다. ‘알렐루야’로 살다가 ‘아멘’으로, 즉 ‘찬미’로 살다가 ‘감사’로 인생 마칠 수 있도록 주님의 축복을 청해야 하겠습니다.

 

부활하신 파스카의 예수님 계시기에 살맛나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이런 부활하신 주님이 계시지 않는다면 이 어둡고 힘든 무지와 허무의 광야인생 어떻게 살아낼 수 있을런지요. 파스카의 예수님 계시기에 괴물怪物이나 폐인廢人이 되지 않고 하느님의 자녀가, 빛의 자녀가 되어 파스카의 신비를, 파스카의 기쁨을, 파스카의 행복을 살게 된 우리들입니다. 어떻게 이렇게 진짜 신자로서 살아갈 수 있겠는지 그 방법을 나눕니다.

 

첫째, 주님을 만나십시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파스카의 만개한 봄꽃들이 상징하는 바 주님과의 만남입니다. 파스카의 주님을 만날 때 꽃처럼 환히 피어나는 꽃같은 마음에, 꽃같은 얼굴입니다. 언젠가의 활짝 웃는 분을 보며 던진  “꽃인지 얼굴인지 구분이 안됩니다”란 덕담이 생각납니다. 꽃 한송이를 선물로 가져온 분에게 드린, “꽃이 꽃을 가져오다니요. 그냥 오세요. 당신은 꽃보다 더 예뻐요!” 짧은 덕담같은 시도 생각납니다.

 

파스카의 주님을 만날 때 꽃처럼 피어나는 마음이요 얼굴입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시간입니다. 만남에 앞서 필히 전제되는 바 사랑의 갈망입니다. 간절한 주님 사랑이 있을 때 주님을 만납니다. 바로 오늘 복음중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다른 제자가 이런 사랑의 모범입니다. 흡사 다음 장면은 수제자 베드로와 애제자 요한의 사랑의 경주같습니다.

 

‘베드로와 다른 제자는 밖으로 나와 무덤으로 갔다. 두 사람이 함께 달렸는데, 다른 제자가 베드로보다 빨리 달려 무덤에 먼저 다다랐다.’

 

사랑의 승리를 상징합니다. 베드로보다 앞선 요한의 사랑입니다. 다음 대목에서도 요한의 겸손한 사랑이 빛을 발합니다. ‘그는 몸을 굽혀 아마포가 놓여 있는 것을 보기는 하였지만, 안으로 들어가지는 않았다.’ 수제자 베드로에 대한 사랑의 배려가 참 아름답습니다. 이어지는 대목에서 애제자의 진면목이 잘 드러납니다.

 

“그제야 무덤에 먼저 다다른 제자도 들어갔다. 그리고 보고 믿었다.”

 

참으로 영적으로 깨어 있던 관상가 요한은 직감적으로 주님의 부활을 믿었고 주님을 만났던 것입니다. ‘보고 믿었다.’ 짧은 말마디가 강렬한 느낌을 줍니다. 빈무덤을 보는 순간, 전광석화 믿었으니 애제자이자 관상가인 요한에게 빈무덤은 그대로 주님 부활의 표징이었던 것입니다. 

 

참으로 사랑으로 마음의 눈이 활짝 열린 요한에게 무덤은 텅 빈 공허가 아닌 텅 빈 충만, 파스카 주님의 현존이었던 것입니다. 눈먼 이에게는 삶은 ‘텅빈 공허’에 고해인생이겠지만 눈이 열린 이에게는 텅빈 충만에 축제인생이 될 것이며 바로 이때 외로움도 그리움도 눈녹듯이 사라질 것입니다.

 

둘째, 주님을 증언하십시오.

대기만성입니다. 수제자 베드로에게 딱 드러맞는 말씀입니다. 세 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했던 베드로였지만 날로 주님께 대한 사랑은 누구보다 앞섰습니다. 이어 주님 부활을 체험한 베드로는 주님의 용사로 돌변하여 주님을 선포하고 증언하는 일에 모두를 바칩니다. 옛날의 베드로가 아닙니다. 정말 파스카의 주님을 만날 때 회개로 인한 참된 변화입니다. 그러니 주님과 만남의 여정은 그대로 회개의 여정임을 깨닫습니다.

 

참으로 주님을 만난 관상가는 결코 자기도취의 관상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주님의 활동가가, 주님의 전사가 되어 주님을 선포하고 증언하는 삶에 몰두합니다. 바로 오늘 제1독서 사도행전의 베드로가 그 모범입니다. 오늘 제1독서 사도행전은 베드로가 코르넬리우스의 집에서 설교하는 장면입니다. 베드로의 생생한 증언을 들어보십시오.

 

“그분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신 뒤에 우리는 그분과 함께 먹기도 하고 마시기도 하였습니다. 그분께서는 하느님께서 당신을 산 이들과 죽은 이들의 심판관으로 임명하셨다는 것을 백성에게 선포하고 증언하라고 우리에게 분부하셨습니다. 이 예수님을 모든 예언자가 증언합니다. 그분을 믿는 사람은 누구나 그분의 이름으로 죄를 용서받는 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선포자와 증언자, 바로 우리의 신원입니다. 비상한 복음 선포나 주님 증언이 아니라 우리 평범한 일상의 삶을 통한 선포요 증언입니다. 참으로 평생 끊임없이 사랑으로 주님을 만나 회개할 때 주님을 닮아 관상가에 이어 복음의 선포자와 주님의 증언자가 되어 살 수 있습니다. 

 

셋째, 천상의 것들을 추구하십시오.

지상에만 머무르는 관상가와 증언자가 되는 것으로는 부족합니다. 눈들어 항상 하늘을 바라봐야 합니다. 하늘을 잊으면 길을 잃을뿐 아니라 멀리 내다보는 깊고 넓은 시야를 지닐 수도 없습니다. ‘마음의 근시’보다 영성생활에 큰 손실은 없습니다. 

 

하늘이 상징하는 하느님은 우리의 영원한 꿈이자 희망이자 비전입니다. 바로 그 꿈의 사람이, 희망의 사람이, 비전의 사람이 바오로 사도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권고가 참 적절합니다. 관상가와 증언자에 이어 천상의 것을 추구하는 구도자로, 신비가로 살 것을 촉구합니다. 콜로새서 2독서 전문을 그대로 인용합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현재의 우리에게도 영원한 진리가 됩니다.

 

“형제 여러분!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으니, 저 위에 있는 천상의 것을 추구하십시오. 거기에는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의 오른쪽에 앉아 계십니다. 위에 있는 것을 생각하고 땅에 있는 것은 생각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이미 죽었고, 여러분의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 안에 숨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땅의 현실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초연하라는, 집착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상주의적 현실주의자로 살라는 것입니다. 탐욕의 무지의 병에 대한 치유의 처방도 이것 하나뿐입니다. 이래야 눈먼 사랑이 아니라 눈밝은 사랑입니다. 기후변화. 기후위기에 대한 근원적 답도 여기있습니다. 참으로 파스카의 예수님을 사랑할수록 하느님 안에 숨겨져 있는 참 생명을 살 수 있습니다. 마지막 말씀도 은혜롭습니다. 

 

“여러분의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 여러분도 그분과 함께 영광 속에 나타날 것입니다.”

 

바로 이 모습이 우리의 궁극의 미래입니다. 새삼 파스카의 예수 그리스도야 말로 우리의 사랑이자 생명이요, 희망이자 기쁨이요 영광임을 깨닫습니다. 그러니 이런 파스카의 예수님은 우리의 모두라 할 수 있습니다. 파스카의 예수님을 잊을 때, 잃을 때 그대로 무지와 허무의 늪에 빠질 것이며, 얼빠진 유령같은 헛것같은 삶이 될 것입니다. 살아있다고 다 살아있는 것이 아니라 파스카의 주님과 일치될수록 참나의 실현이며, 하여 우리 삶은 ‘예닮의 여정’뿐임을 확인하게 됩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부활 대축일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파스카의 신비, 파스카의 기쁨, 파스카의 생명 충만한 삶을 살게 하십니다. 우리 모두 당신의 관상가와 증언자, 신비가로 살게 하십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축복이 여러분 모두에게 충만하시길 빕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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