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개(悔改)의 여정, 귀가(歸家)의 여정 -‘하느님의 나라’ 꿈과 실현-

by 프란치스코 posted Jan 21,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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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21.연중 제3주일(하느님의 말씀 주일)

요나3,1-5.10 1코린7,29-31 마르1,14-20

 

 

회개(悔改)의 여정, 귀가(歸家)의 여정

-‘하느님의 나라’ 꿈과 실현-

 

 

오늘은 연중 제3주일이자 “하느님의 말씀 주일”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2019년 9월 20일에 매해 연중 제3주일을 “하느님의 말씀 주일”로 지낼 것을 선포하였고, 교회는 이날 모든 신자들이 하느님의 말씀 중심의 삶을 살 것을 강력히 권고하고 있습니다. 또 지난 1월18일부터 1월25일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까지 우리 가톨릭교회는 일치주간을 지내고 있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일치를 위해 기도하는 일치주간의 중심에 자리잡고 있는 하느님의 말씀 주일이 참 고맙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합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었다” 고백하지 않습니까? 바로 무지도 허무도 탐욕도 가난도 아닌 말씀이 인간의 본질이라는 것입니다. 생명과 빛인, 영원한 말씀이 인간의 본질이라는 것입니다. 참으로 온전한 인간이,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길은 오직 말씀공부와 실천뿐임을, 평생 주님의 학인이, 말씀의 학인이 되어 사는 길뿐임을 깨닫습니다.

 

우리 믿는 이들의 삶의 여정을 정의하면 “회개의 여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한두번의 회개가 아니라 평생 회개의 여정을 살아가는 우리들이요, 오늘 말씀의 주제도 회개가 중심입니다. 끊임없는 회개와 더불어 하느님 나라의 꿈도 실현되며 바로 여기서 결정적 역할을 하는 것이 말씀입니다.  

 

꿈이 있어야 삽니다. 꿈이 없으면 살아있다 해도 살아있는 것이 아닙니다. 꿈이 있어야 힘도 샘솟습니다. 과연 여러분의 꿈은 무엇입니까? 꿈을 희망으로 바꿔도 무방합니다. 꿈중의 꿈이 바로 하느님의 나라 꿈이요, 예수님이 평생 추구했던 바가 하느님의 나라 꿈의 실현이었습니다. 창세기의 요셉이 하느님의 꿈쟁이였던 것처럼 예수님 역시 하느님의 꿈쟁이였습니다. 하느님의 나라 꿈은 예수님의 평생 화두이기도 했습니다. 

 

겨울철 1월이 되면 생각나는 26년전 써놨던 “봄꿈”이란 자작시가 생각납니다. 화장실에 들렸다가 창문밖 하얀 눈덮인 언덕을 보며 떠올라 쓴 글입니다. 이 시를 써놓고 그해 겨울은 참 따뜻한 마음으로 지냈던 기억이 지금도 선명합니다.

 

“창문밖 가난한 언덕

 보랏빛 은은했던 제비꽃 그 자리에

 샛노란 민들레꽃 감동의 그 자리에

 하얀눈 덮여 있다

 흰눈 덮인 하얀땅

 보랏빛, 샛노란 빛 봄꿈을 꾸고 있겠지”-1998.1.22.

 

봄꿈이 상징하는바 파스카의 꿈, 하느님 나라의 꿈입니다. 이와 더불어 24년전 “별꿈”이란 자작시도 생각납니다.

 

“풀잎들 밤새 별꿈꾸며 잠못이루더니

 아침 풀잎마다 맺힌 영롱한 별무리 이슬방울들”-2000.10.1.

 

하느님 나라 꿈의 실현을 상징하는 별꿈입니다. 예수님의 평생화두이자 평생꿈이 하느님의 나라였고 하느님 나라의 꿈의 실현은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회개를 통해 실현됩니다. 바로 다음 말씀이 예수님의 선포를 요약합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언제나 현재성을 띄는 강력한 말씀입니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때가 차서’, 오늘 지금이 바로 하느님의 나라를 살아야 할 때입니다. 바로 예수님 자체가 하느님 나라 꿈의 실현입니다. 참으로 회개를 통해 복음을 믿음으로 예수님과 하나될 때 우리 역시 하느님의 나라 꿈의 실현이 됩니다. 제가 참 좋아하는 “영적일수록 현실적이다(the more spiritual...the more real)”란 말마디입니다. 하늘 높이 나뭇가지들 올라갈수록 땅속 깊이 뿌리내리는 이치와 같습니다. 참으로 진짜 꿈과 희망의 이상주의자일수록 현실주의자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위시한 참된 영성가들은 모두가 이상주의적 현실주의자들입니다. 

 

언젠가의 하느님 나라가, 결코 죽어서 가는 하느님 나라가 아니라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살아가야할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바로 이상주의적 현실주의자로서, 또 하느님 나라의 사람으로서 예수님의 진면목은 오늘 복음에서 보다시피 어부 네 사람을 부르심으로 현실화됩니다. 말그대로 하느님 나라 꿈의 현실화입니다. 

 

복음의 네 제자만 아니라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한 이들의 공동체인 여기 수도공동체도, 우리 신자들이 몸담고 있는 교회공동체도 역시 하느님 나라의 꿈이 실현되고 있는 하느님의 나라 공동체입니다. 갈릴래아 호숫가를 지나가시다가 호수에 그물을 던지고 있는 시몬과 그의 동생 안드레아의 내적갈망을 한눈에 알아채신 주님은 이들 형제를 부르십니다.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

 

그러자 이들은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가 예수님 중심의 제자공동체, 하느님 나라 공동체에 합류합니다. 이어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이 예수님의 부르심에 즉각 응답하여 예수님의 공동체에 합류합니다. 바야흐로 예수님을 중심으로 한 하느님 나라의 꿈을 실현할 하느님 나라의 공동체의 탄생입니다. 

 

이런 예수님의 예표와도 같은 제1독서의 요나입니다. 요나의 회개에 선포에 즉각 응답하여 살아난 니네베 주민들입니다. 이들의 전격적 회개가 회개의 모범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의 어부였다가 부르심을 받아 제자가 된 이들이 전격적으로 주님을 따라나서는 모습이 그대로 니네베 사람들을 연상케합니다. 주님의 부르심에 즉각적인 응답보다 더 좋은 회개의 표현도 없습니다. 

 

부질없는 상상이지만 갈릴레아 호숫가에 살던 네 어부들이, 또 우리가 주님의 부르심을 받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새삼 부르심의 은총은 우연이 아닌 필연임을 깨닫습니다. 그러니 ‘만약 세례로 부르심 받지 못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가정은 정말 부질없는 상상인 것이지요. 우리 믿는 이들의 삶은 회개의 여정이라 했습니다. 회개는 바로 전격적으로 하느님을 향한 방향전환을 뜻합니다. 한두번의 회개가 아니라 날마다 평생 회개의 여정중에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주님을 충실히 한결같이 따를 때 하느님의 나라 꿈도 더욱 현실화되기 마련입니다. 

 

여기서 제가 즐겨 일컫는 회개의 일상화, 회개의 생활화를 위한 회개의 시스템같은 하루 일과표의 중요성 강조입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회개의 시스템 같은 기도와 일이 균형을 이룬 일과표에 충실함이 우리의 성소를 굳건히 하면서 하느님 나라 공동체 형성에 얼마나 결정적 기여를 하는지 요즘 깊이 깨닫습니다. 비단 수도공동체뿐 아니라 하느님 나라 공동체를 꿈꾸는 모든 공동체들에게 권하고 싶은 것이 기도와 일이 균형잡힌 회개의 시스템 같은 일과표의 준수입니다. 참으로 구체적으로 하느님의 나라 꿈의 현실화에 이보다 더 좋은 수행도 없습니다.

 

회개의 여정과 함께 가는 귀가의 여정입니다. 그러니 여기 지상의 장소가 최종 목적지가 아님을 명심해야 합니다. 잠정적으로  지상에 머무르는 순례여정중의 하느님 나라 공동체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어찌보면 회개의 여정이자 아버지 집으로의 귀가의 여정중인 순례자인 우리들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온전한 실현은 아버지의 집으로의 귀가와 더불어 이루어질 것입니다. 

 

다음 바오로 사도의 권고가 참 고맙습니다. 회개의 여정에, 주님을 따름의 여정에 최선을 다하면서도 지상 삶에 집착하지 말고 참으로 초연해야 함을 배웁니다. 이래야 참으로 너그럽고 관대하고 자유로운 삶이겠습니다. “-처럼” 살자는 것입니다. 솔직한 것이 다 좋은 것도 아니니 담아둘 것은 담아둬야 합니다. 이건 위선이 아니라 고귀하고 품위있는 삶의 절정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을 들어보세요.

 

“때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이제부터 아내가 있는 사람은 아내가 없는 사람처럼 살고, 우는 사람은 울지 않는 사람처럼 살고, 기뻐하는 사람은 기뻐하지 않는 사람처럼, 물건을 산 사람은 그것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처럼, 세상을 이용하는 사람은 이용하지 않는 사람처럼 사십시오. 이 세상의 형체가 사라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보일 듯 말 듯, 있는 듯 없는 듯, 아파도 아프지 않은 사람처럼, 힘들어도 힘들지 않은 것처럼, 슬퍼도 슬프지 않은 사람처럼, 적게 먹고 적게 쓰고, 자취없이, 흔적없이, 가볍게, 바람처럼, 구름처럼, 매임없이 자유롭게 무공해의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살면 쓰레기도 훨씬 적게 내고 살것입니다. 바로 현실에 무관심하라는 것도, 현실을 무시하라는 것도 아니라 현실에 집착하지 말고 맑은 의식으로 깨어살라는 것입니다. 이래야 일상의 수렁에, 일상의 늪에 빠지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만한 세상, 아름다운 세상입니다. 그러니 지상의 순례자로서 회개의 여정에, 귀가의 여정에 충실하며 하느님의 나라 공동체를 이루어 하느님 나라의 꿈을 현실화하며 사는 것입니다.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의 하느님 나라 공동체 형성에 결정적 도움이 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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