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중심 -중심, 정주, 성숙-2015.8.17. 연중 제20주간 월요일

by 프란치스코 posted Aug 17,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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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8.17. 연중 제20주간 월요일                                                                                  판관2,11-19 마태19,16-22


                                                                                    삶의 중심

                                                                              -중심, 정주, 성숙-


삶의 중심을 잃을 때 만성적인 불안정(chronic instability)입니다. 끊임없는 혼란과 불안이요 정체성의 상실에 신경정신적 질환입니다. 삶이 예측 불가능하고 변덕스러우며 내적일치는 물론 성숙도 요원합니다. 개인은 물론 공동체의 경우도 똑같습니다. 바로 판관기의 이스라엘 백성이 그러합니다. 인간이나 공동체의 부정적 현실이 그대로 드러납니다. 바로 이것이 예나 이제나 중심을 잃었을 때의 적나라한 인간현실입니다. 중심이 없으니 끊임없이 세속의 유혹에 휘둘려 불안정이요 속화되는 사람들입니다. 바로 오늘날 우리의 현실입니다. 예나 이제나 인간의 본질은 똑같습니다.


카리스마적 지도자인 모세와 여호수아 시대까지는 비교적 안정을 이룬 이스라엘 공동체였는데 여호수아가 죽고 판관의 시대가 시작되니 끊임없이 반복되는 분열이요 혼란입니다. 가시적 중심의 인물인 여호수아가 사라짐과 동시에 불가시적 중심의 하느님도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하느님 중심 자리에 바알의 우상이 자리잡았습니다. ‘죄-벌-회개-판관을 통한 구원’으로 완전히 끝난 것이 아니라 판관이 죽으면 다시 ‘죄-벌-회개-구원’의 끊임없는 악순환의 반복입니다. 바로 이것이 내외적 중심을 잃었을 때의 인간현실입니다. 예나 이제나 오늘날의 으뜸 우상은 돈입니다. 오늘 복음의 부자청년의 경우만 봐도 분명합니다.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과연 주님의 이런 명령이 떨어졌을 때 따를 사람은 몇이나 될까요. 부자의 경우라면 더욱 불가능할 것입니다. ‘그러나 젊은이는 이 말씀을 듣고 슬퍼하며 떠나갔다. 그가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부자청년의 하느님 중심 자리에 재물이 자리잡고 있음을 봅니다. 비단 젊은이뿐 아니라 재물 많은 늙은이도 이런 전적인 포기와 더불어 추종은 불가능할 것입니다. 바로 이 말씀을 곧이 곧대로 실행한 분이 사막 수도승의 원조 안토니오 성인입니다.


이것은 말 그대로 부자청년에게 주어진 주님의 극약처방과 같습니다. 주님은 영원한 생명을 추구하는 부자청년의 내적 갈망을 간파하셨습니다. ‘무슨 선한 일을 해야 영원한 생명의 구원을 얻을 수 있겠나?’ 하는 부자청년의 물음에서 근본적 문제를 통찰하신 주님이십니다.


무슨 선한 일을 해서가 아니라 주님의 은총으로 구원받습니다. 무엇보다 삶의 중심인 주님을 만나, 그분을 항구히 따라야 구원입니다. 이웃사랑의 계명들을 충실히 지킨 부자청년은 모범적 좋은 신자임이 분명합니다. 재물도 있고 하느님도 있고 아주 이상적(?)인 신앙생활입니다. 외적으로는 참 완벽한데 내적으로는 공허했음이 분명합니다. 중심인 하느님이 통째로 빠졌기 때문입니다. 


이런 신앙은 액세서리 장식품 신앙입니다. 오늘날도 최소한의 의무만 지키며 돈과 하느님에 양다리 걸치고 액세서리, 장식품 신앙을 사는 이들은 얼마나 많은지요. 그러나 이 정도는 약과입니다. 바알 숭배에 하느님을 떠난 사람들처럼 돈과 일의 우상에 빠져 교회의 하느님을 떠난 냉담자들은 또 얼마나 많습니까? 아니 하느님만 섬기고 주님만을 따른다는 교회의 중심에도 때로는 돈이 하느님 자리에 똬리 틀고 있는 모습을 봅니다. 하느님 중심 자리에 돈의 우상이 자리 잡고 있는 형상입니다. 하여 세상을 성화聖化해야할 교회가, 신자가 하느님 중심을, 정체성을 잃고 세상에 속화俗化되어가는 작금의 현실은 그대로 오늘 판관기의 현실을 닮았습니다. 


하느님은 모두에게 똑같이 전적인 재물포기를 요구하지 않습니다. 부자청년의 내적심각성에 따른 특수 극약 처방입니다. 부자청년의 주객전도, 본말전도의 신앙상태를 바로 잡기 위함입니다. 누구나 하느님을 중심에 모시고 살면서 각자 삶의 자리에서 주님을 따르면 됩니다. 갑작스런 비상한 포기도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는 각자 삶의 자리에서 끊임없는 자기포기가 더불어 주님을 따릅니다. 하느님 중심을 잊고, 주님을 따른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고, 외적 선행에 몰두하는 일은 실로 어리석습니다. 여전히 내적공허는 채울 수 없기 때문입니다.


완전한(perfect) 사람은 성숙한(mature) 사람입니다. 끊임없는 자기포기와 더불어 주님을 따를 때 성숙한 사람입니다. 새삼 ‘성숙의 여정’중에 있는 우리의 삶임을 깨닫습니다. 예측가능한 일관성을 지닌 사람이 신뢰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내적통합의 사람이요 정체성이 또렷한 사람입니다. 바로 하느님 중심에 정주하면서 끊임없이 주님을 따르는 사람입니다. 주님은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우리 모두에게 자기를 버리고 제십자가를 지고 충실히 당신을 따를 힘을 주십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태5,3).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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