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별의 잣대는 사랑 -사랑의 훈련-2022.2.8.연중 제5주간 화요일

by 프란치스코 posted Feb 08,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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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2.8.연중 제5주간 화요일                                                        1열왕8,22-23.27-30 마르7,1-13

 

 

 

분별의 잣대는 사랑

-사랑의 훈련-

 

 

 

어제는 마침 제 생일이었고 알리지 않고 조용히 지냈는데 알게 된 여러분들이 사랑의 축하메시지를 보내 줬습니다. 저 또한 즉시 감사의 답신과 함께 제 사진도 전송하니 사랑의 빚을 갚은 기분이었습니다. 사랑해서 사람입니다. 이렇게 사랑을 주고 받으며 사랑을 먹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사랑이 답입니다. 사랑밖에는 길이 없습니다. 사랑을 분별의 잣대로 하면 무엇을 행할까 답은 곧 나옵니다. 얼마전 상담전문가 자매에게 드린 ‘환대-경청-위로와 격려-치유의 구원’이란 조언이 생각납니다. 이 또한 사랑의 환대, 사랑의 경청, 사랑의 위로와 격려, 사랑의 치유와 구원으로 사랑 안에 모두 하나로 통합됨을 봅니다.

 

“사랑, 현재, 죽음의 3대 경구로 살라!”

개신교의 월보 ‘그리스도복음신보’ 1면의 첫 머리기사에 공감했습니다. ‘사랑-현재-죽음’을 삶의 잣대로 하면 삶은 더욱 단순하고 본질적이 됩니다. 사랑을 실천할 자리는 여기 오늘 지금의 현재요, 죽음을 늘 눈앞에 두고 살면 현재의 사랑 실천은 절박합니다.

 

“땅의 행복은

밤마다 누워

하늘 바라보며

별들

가득 담아 두었다가

꽃들로

피어내는 것이다”-2001.8.20.

 

잠깨어 밤마다 정원 잔디에 잠시 누워 하늘의 별들을 볼 때 마다 떠오르는 자작시입니다. 바꿔 말해 땅에서 우리의 행복은 하늘의 총애寵愛의 사랑을 담아 두었다가 이웃에게 겸애兼愛의 사랑을 꽃피워 내는 데 있음을 깨닫습니다. 총애의 하늘 사랑은 저절로 겸애의 이웃 사랑으로 표현되기 마련입니다.

 

첫 주간 미사를 주례하고 강론하는 아브라함 새 수도사제의 자세가 신선했습니다. 내용은 차치하고라도 강론에 깃든 정성을 감지할 수 있어 주일에 이어 어제 월요일에도 미사후 격려성 칭찬을 했습니다. 

“수고많았습니다.”

“강론 준비에 애 많이 썼습니다.”

감동하는 것은 최선을 다하는 성실한 자세입니다. 이 또한 사랑의 격려입니다.  미사 10분전에 제의 방에 오는 것도 강론 원고를 정성스럽게 파일에 담아 오는 것도 저를 닮았습니다.  

 

요즘 부쩍 강조하는 것이 선택과 훈련입니다. 선택할 수 없는 것들에 집착하여 마음 아파해 하지 말고 날마다 새롭게 선택하여 연마鍊磨하라는 것입니다. 기도도, 행복도, 감사도, 기쁨도, 희망도, 사랑도 선택하여 집중적으로 훈련하자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한결같은 노력의 사랑의 훈련입니다.

 

바로 성전에서의 끊임없이 바쳐지는 공동전례기도를 통한 찬미와 감사의 하느님 사랑의 훈련입니다. 이래야 알게 모르게 내외적으로 성장, 성숙하는 사랑입니다. 영원한 현재 진행형의 사랑의 성장입니다. 오늘 제1독서 열왕기 상권에서 솔로몬의 성전에서의 찬미 감사기도의 고백이 진정성이 넘칩니다. 얼마나 하느님 사랑으로 충만한지 감지됩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는 하느님의 집인 성전도 사랑합니다.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 위로 하늘이나 아래로 땅 그 어디에도 당신 같은 하느님은 없습니다. 마음을 다하여 당신 앞에서 걷는 종들에게 당신은 계약을 지키시고 자애를 베푸시는 분이십니다. 어찌 하느님께서 땅 위에 계시겠습니까? 저 하늘, 하늘 위의 하늘도 당신을 모시지 못할 터인데, 제가 지은 이 집이야 오죽하겠습니까?”

 

이런 사랑의 기도가, 사랑과 기도의 훈련이 참으로 사람을 겸손하게 합니다. 하느님을 성전에 독점할 수 없음을 깨닫습니다. 하느님은 수도원에만 계신 것이 아니라 어디에나 계시듯 성인도 그러합니다. 무엇보다 하느님은 ‘우리와 함께’ ‘우리 안에’ 계십니다. 우리 하나하나가 하느님 거하시는 거룩한 진짜 성전입니다. 영문 주석이 새로운 깨우침이었습니다.

 

“창세기에서 보다시피 하느님은 남자와 여자를 당신의 거룩한 모상대로 창조했기에, 하느님은 우리와 함께, 우리 안에 계신다. 솔로몬의 성전과 같은 거룩한 장소는, 복음의 바리사이들이 손씻는 것 같은 거룩한 실천은 하느님 계명이 선포와 보호가 목표로 하는 ‘인간의 거룩한 위엄(the sacred dignity of human person)’에 비교하면 모두 빛을 잃는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복음의 이해도 확연해집니다. 하느님 사랑의 계명을 놔두고 조상의 관습에 타성적으로 집착하는 것이 얼마나 생각없는, 부질없는 본말전도, 주객전도의 어리석은 행위인지 깨닫습니다. 하느님 사랑에 정통한 예수님의 이런 바리사이들의 문제점을 이사야의 말씀을 빌어 예리하게 지적합니다. 사랑 부재의 손씻는 관습에, 코르반의 관습에 집착하는 것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 나무는 보면서 숲을 보지 못하는 눈먼 관습의 집착인지 분명히 밝힙니다.

 

“‘이 백성이 나를 입술로는 공경하지만,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나 있다. 그들은 사람의 규정을 교리로 가르치며, 나를 헛되이 섬긴다.’ 너희는 하느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는 것이다.”(마르7,6-7)

 

참으로 구체적 사람을 망각한 사랑 부재의 모든 관습이나 수행이 헛되이 주님을 섬기는 것임을 깨닫습니다. 삶과 전례 역시 둘이 아니라 사랑 안에서 하나로 통합됨을 봅니다. 사랑의 관상, 사랑의 활동이니 관상과 활동의 우열을 논함도 부질없는 일입니다. 참으로 분별의 잣대는 관습도 율법도 아닌 사랑임을 깨닫습니다. 

 

진짜 수행은 모두가 하느님과 이웃사랑의 표현입니다. 참으로 끊임없는 이런 사랑의 수행이 마음을 순수하게 하고 자유롭게 하며 더욱 사랑의 수행에, 사랑의 봉사에, 사랑의 훈련에 전념, 몰두하게 합니다. 바로 이 거룩한 성전에서날마다의 미사은총입니다. 주님 사랑을 닮아가는 '사랑의 훈련'에 마음을 담아 찬미와 감사의 시편기도를 바치는 것보다 더 좋은 수행은 없습니다.

 

“만군의 주님

당신의 거처가 얼마나 사랑스럽습니까!

주님의 뜨락을 그리워하며

이 몸은 여위어가나이다.

행복하옵니다, 당신의 집에 사는 이들!

그들은 영원토록 당신을 찬양하리이다.”(시편84;2-3ㄱ.5).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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