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음(listening)에 대한 묵상-2015.12.11. 대림 제2주간 금요일

by 프란치스코 posted Dec 11,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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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2.11. 대림 제2주간 금요일                                                                이사48,17-19 마태11,16-19


                                                              들음(listening)에 대한 묵상


"주님의 목소리를 오늘 듣게 되거든 너희 마음을 무디게 가지지 마라."


사순시기 아침기도 때 바치는 초대송 후렴이 오늘 말씀을 요약합니다. 오늘은 들음에 대한 묵상을 나눕니다. 독서와 복음의 주제 역시 들음입니다. 들음은 영성생활의 기초입니다. 침묵중에 깨어 잘 들음으로 시작되는 영성생활입니다. 스승이신 주님을 따르는 제자로서 1차적 조건이 잘 듣는 실천적 지혜입니다.  


“들어라(Obsculta, listen!)!”

베네딕도 규칙 역시 ‘들어라!’로 시작합니다. ‘주님을 섬기는 학교(a school of the Lord’s service)’로 정의되는 수도공동체에 아주 적절한 시작말입니다. 잘 듣고 응답해야 주님과는 물론 이웃과의 원활한 소통의 대화입니다. 


불통의 원인은 바로 서로 잘 듣는 경청의 결핍에 있음을 봅니다. 오늘 복음 말씀 전 어제 복음의 마지막 구절도 “귀있는 사람은 들어라.” 였습니다. 내용으로 보면 오늘 복음의 첫 구절에 배치되었으면 좋을 번 했습니다.


침묵은 ‘깨어있음’이자 ‘열려있음’입니다. 잘 듣기위한 침묵입니다. 이런 침묵중에 마음의 귀를 잘 기울여 들어야 마음이 무디어 지거나 거칠어 지거나 완고해지지 않습니다. 잘 들어야 마음도 순수해지고 깨어 열려있게 됩니다. 


편견, 선입견, 고정관념 역시 잘 듣지 않음으로 자초한 마음의 병입니다. 잘 듣지 않을 때 따라오는 무감각, 무기력, 무의욕, 무감동의 삶입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 시대의 군중이 이에 해당됩니다. 예나 이제나 똑같은 인간현실입니다.


“이 세대를 무엇에 비기랴? 장터에 앉아 서로 부르며 이렇게 말하는 아이들과 같다.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가슴을 치지 않았다.”


이런 공감과 배려, 감동이 사라진 무반응의 삶은 살아있다 하나 실상 죽어있는 삶입니다. 흡사 오늘날 세대에게 주시는 말씀 같습니다. 편견으로 무디어진 사람들입니다. 한 번 굳어진 편견은 거의 철벽과 같아 그것을 바꾸기는 거의 불가능할 정도입니다. 잘못된 편견을 조장하는 오늘의 언론현실이 얼마나 잘못됐는지 깨닫습니다. 


하여 요한에 대한 평가나 예수님에 대한 평가도 중구난방입니다. 편견의 색안경을 쓰고 요한이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자 ‘저자는 마귀가 들렸다.’ 몰아대고, 예수님이 먹고 마시자 ‘저자는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이 친구다.’ 몰아 댑니다.


편견의 인간, 인간의 정의 같기도 합니다. 어찌보면 편견은 인간의 숙명같기도 합니다. 하여 깨어 ‘있는 그대로’ 편견 없는 사랑으로 잘 듣는, 잘 보는 영성훈련이 그리도 중요합니다. 하여 주님은 이사야 예언자의 입을 빌어 사람들이 스승이신 당신을 잘 따르지 못함으로 자초한 불행에 안타까움을 호소하십니다. 그대로 오늘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나는 주 너의 하느님, 너에게 유익하도록 너를 가르치고 네가 가야 할 길로 인도하는 이다. 아, 네가 내 계명들에 주의를 기울였다면, 너의 평화가 강물처럼, 너의 의로움이 바다 물결처럼 넘실 거렸을 것을.”


새삼 주님의 말씀을 잘 경청하고 잘 따르는 것이 축복의 길임을 깨닫습니다. 부모의 말을 잘 들으면 자다가도 떡을 얻어 먹는다는 옛 어머니의 말도 생각이 납니다. 오늘 화답송도 오늘 말씀과 잘 어울립니다.


“주님, 당신을 따르는 이는 생명의 빛을 얻으리이다.”


주님의 말씀을 잘 듣고 따를 때 생명의 빛이란 축복의 선물이 따르리라는 확신의 토로입니다. 진복팔단의 한 구절도 생각이 납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


마음 따라 보는 눈이요, 마음 따라 듣는 귀입니다. 마음이 깨끗할 때, 있는 그대로의 실재를, 하느님을 보고 들으니 이런 이들이 진정 행복한 자들입니다. 하여 우리의 모든 수행도 마음의 순수를 목표로 합니다. 


마음의 순수는 그대로 사랑이요 지혜입니다. 죄가 없어서 마음의 순수가 아니라, 사랑할수록 마음의 순수요, 있는 그대로 듣고 보는 지혜의 삶임을 깨닫습니다. 복음의 마지막 말마디가 의미심장합니다.


“그러나 지혜가 옳다는 것은 그 지혜가 이룬 일로 드러났다.”


바로 하느님의 지혜이신 주님의 삶을 일컫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삶 자체가 하느님 지혜의 실현이었음을 깨닫습니다. 삶자체로 입증되는 지혜와 사랑입니다. 주님은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의 편견과 선입견, 고정관념이란 마음의 병을 치유하시어 있는 그대로 듣고, 보게 하십니다.


“주님, 저희가 덧없이 지나가는 현세를 살면서도, 지금부터 천상 양식에 맛들여 영원한 것을 사랑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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