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 누리의 임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2020.11.22.주일 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 대축일

by 프란치스코 posted Nov 22, 202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ESC닫기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2020.11.22.주일 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 대축일

에제34,11-12.15-17 1코린15,20-26.28 마태25,31-46

 

 

 

온 누리의 임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

 

 

 

“만왕의 왕, 군주의 군주이신 예수님께 영광과 주권이 세세에 있으소서.”

 

오늘은 연중 마지막 34주일이자 ‘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 대축일입니다. 1925년 교황 비오 11세는 당시 세계에서 날로 확산되어 가는 극단적 민족주의와 세속주의에 대항하는 조치로 교회 회칙 ‘첫째의 것’을 통해 온 세상의 왕인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기리는 축일을 제정하였습니다. 

 

1965년 교황 바오로 6세는 자의 교서 ‘파스카의 신비’를 내면서 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왕’으로 새로 명명합니다. 그는 기념날짜를 대림이 시작되기전 연중 시기의 마지막 주일로 옮겨 기념하게 합니다.  

 

이어 그리스도는 천상 교회와 지상 교회의 구분 없이 모두를 다스리는 왕으로 대림이 되기전 모든 것을 정리한다는 의미로 축일 중 최고 등급인 대축일로 지정합니다. 한국 천주교회는 1985년부터 이 마지막 주간을 성서 주간으로 정해 하느님 말씀에 특별히 맛들일 것을 권장하고 있습니다.

 

축일 제정이 무려 거의 100년이 지났습니다만 어둠의 역사는 반복되는 것 같습니다. 여전히 기승을 부리는 작금의 보편적 현상이 극단주의, 세속주의, 물질주의, 회의주의, 상대주의, 허무주의, 소비주의, 포퓰리즘 등 참으로 어수선하고 혼란스런 모습들입니다. 더구나 하나뿐인, 공동의 집인 지구도 기후변화와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모두가 중심을 잃고 방황중입니다.

 

삶의 중심인 하느님을 떠남으로 자초한 무지한 인류의 업보입니다. 유일한 처방은 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을 삶의 중심에 모시고 삶의 질서를 회복하는 길뿐임을 깨닫습니다. 삶의 목표와 방향, 삶의 중심과 의미는 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뿐이기에 마지막 성서 주간에는 특히 하느님 말씀 공부에 더욱 힘써야 하겠습니다. 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은 어떤 분이십니까? 공부하는 마음으로 살펴봅니다.

 

첫째, 착한 목자이십니다.

예수님의 평생 활동을 통해 드러나는 측면입니다. 똑같은 파스카의 예수님은 지금도 우리를 가르치고, 치유하고, 위로하고, 자유롭게 하시는 분으로 그대로 우리 안에 계신 눈에 보이는 하느님의 현존이십니다. 참으로 평생 가난하고 소외된 병자와 죄인들을 돌보고 섬겼던 착한 목자 예수님이시며 지금도 여전히 교회를 통해 활동하고 계시는 우리의 영원한 착한 목자 파스카 예수님이십니다.

 

“주님은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어라.”

 

바로 오늘 화답송 시편이 고백하는 그대로입니다. 참으로 착한 목자 예수님을 삶의 중심에 모시고 살아가는 것만이 구원의 첩경임을 깨닫습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는 착한 목자 하느님의 결연한 모습이 감동적입니다. 이런 하느님의 모습을 그대로 닮은 착한 목자 예수님이심을 새롭게 확인합니다.

 

“나 이제 내 양떼를 찾아서 보살펴 주겠다. 캄캄한 구름의 날에, 흩어진 그 모든 곳에서 내 양 떼를 구해 내겠다. 잃어버린 양은 찾아 내고 흩어진 양은 도로 데려오며, 부러진 양은 싸매 주고 아픈 것은 원기를 북돋아 주겠다. 나 이렇게 공정으로 양떼를 먹이겠다.”

 

바로 우리가 대축일로 지내는 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의 모습입니다. 우리를 끊임없이 돌보고 섬기며, 위로하고 격려하고 치유하며 가르치고 인도하는 착한 목자 예수님이십니다. 

 

둘째, 승리의 왕이십니다.

아침 성무일도 아침 아름다운 찬미가 역시 승리의 왕이신 주님을 고백했습니다.

“예수님 놀라우신 임금이시여, 우리의 위대하온 승리자시여

말로다 표현못할 감미이시여, 온전히 갈망할수 있는분이여!”

 

우리 주 그리스도왕은 우리의 기쁨이자 희망이요, 죽은 이들 가운데서 되살아 나심으로 죽은 이들의 맏물이 되신 분입니다. 죽음이 한 사람 아담을 통해서 왔듯이 부활도 한 사람, 예수님을 통하여 왔습니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모두가 살아 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승리의 삶을 살아가는 우리들입니다. 종말의 때에는 궁극의 승리가 잘 드러납니다. 바오로의 고백이 큰 위로가 격려가 됩니다.

 

“종말의 때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권세와 모든 권력과 권능을 파멸시키시고 나서 나라를 하느님 아버지께 넘겨 드리실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모든 원수를 그리스도의 발아래 잡아다 놓으실 때까지는 그리스도께서 다스리셔야 합니다.”

 

하여 우리는 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이라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바오로 사도의 고백도 고무적입니다.

 

“마지막으로 파멸되어야 할 원수는 죽음입니다. 아드님께서는 모든 것이 당신께 굴복할 때에는, 당신께 모든 것을 굴복시켜 주신 분께 굴복하실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느님께서는 모든 것 안에서 모든 것이 되실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모든 것 안에서 모든 것이 되시는 것’은 우리의 영원한 꿈이며 희망입니다. 이미 예수님 안에서 하느님의 승리를 앞당겨 승리의 삶을 살고 있는 우리들이요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현실화되기 시작한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죽어야 끝나는 영적전쟁이지만 ‘착한 목자’이자 ‘승리의 전사’이신 예수님께서 함께 하시기에 참으로 용기백백하여 살 수 있는 우리들입니다. 영적 승리의 비결은 ‘예수님을 통하여, 예수님 안에서, 예수님과 함께’ 라는 이 길 하나뿐입니다. 예수님의 다음 격려 말씀을 마음에 새기시기 바랍니다.

 

“너희는 세상에서 고난을 겪을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한16,33)

 

셋째, 심판의 왕이십니다.

오늘 복음의 최후의 심판 일화는 비유라기 보다는 예언적 서술입니다. 늘 읽어도 충격입니다. 예수님이 임금이 되어 심판하십니다. 완전히 우리의 예상을 벗어납니다. 종교적 색채가 전혀 없습니다. 기도도, 전례도, 말씀공부도, 십계명의 준수도 아닌 구체적 사랑 실천이 심판의 잣대입니다. 구체적으로 곤궁중에 있는 이웃이,

 

1.굶주렸을 때 먹을 것을 주었는가? 

2.목말랐을 때 마실 것을 주었는가? 

3.나그네  였을 때에 따뜻이 맞아 주었는가? 

4.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는가? 

5.병들었을 때에 돌보아 주었는가?

6.감옥에 있을 때에 찾아 주었는가?

 

가 최후 심판의 잣대라는 것입니다. 이어 주님은 이런 곤궁중에 있는, 가장 작은 불쌍한 이들을 ‘내 형제들’이라 칭하며 이들을 당신과 동일시합니다. ‘당신을 위해(for you)’ 하신 것이 아니라 바로 ‘당신께(to you)’ 하신 것이라 분명히 못박으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25,40)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 나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다.”(마태25,45)

 

전자의 의인들은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곳으로 가고, 후자의 인정머리 없던 이들은 영원한 벌을 받는 곳으로 갑니다. 과연 나는 어느 쪽에 속하겠는지요? 문득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와 '부자와 나자로의 비유'가 생각납니다. 착한 사마리아 사람이 전자에 해당된다면, 부자는 후자에 해당됩니다. 프랑스 국민의 사랑과 존경을 받았던 피에로 신부는 이렇게 영벌의 지옥 상태를 묘사합니다.

 

“영원하신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그분은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죽음은 바로 하느님과의 눈부신 만납입니다. 만일 영원한 벌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법정의 심판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내가 생각하는 영벌은 우리가 시간의 그림자로부터 빠져나가는 순간, 그동안 세상에서 무엇을 했느냐를 그대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돌아봤는데 평생 저만 알고, 저만 위해 살았던 사람이었음을 알게 되는 순간 들려오는 내면의 목소리가 있을 것입니다. ‘너는 너 자신으로 만족하고 살았으니 영원히 너 자신만으로 만족하며 살아라!’ 이런 목소리가 영벌의 선고일 것입니다. 그동안 자아도취에 빠져 살았으니 앞으로도 거울을 들여다 볼 때마다 그런 자기 모습을 보게 되는 것, 그것이 영원한 고통의 벌이자 지옥일 것입니다.”

 

섬찍하면서도 공감이 가는 설명입니다. 이미 여기서부터 시작된 천국의 삶이자 지옥의 삶임을 깨닫습니다. 어느 쪽을 선택하겠는지요. 그러니 눈에 보이는 이웃은 그대로 그리스도의 현존입니다. 이웃에서 예수님을 만나지 못하면 어디서도 예수님을 못만납니다. 아무리 미사 많이 드리고 주님의 성체를 모셔도 살아있는 주님의 성체인 이웃에게서 주님을 못 만나면 완전히 헛 미사를 봉헌한 것입니다. 구체적 사랑 실천을 통해 이웃 안에서 주님을 만날 때 비로소 성체성사의 완성입니다.

 

요약하면 의인의 양들에 속하고자 한다면 내 사랑의 응답에 관계없이 적극적으로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한 방식입니다. 종교적 의무만으로는 충분치 못합니다. 우리는 곤궁중에 있는 이들에 도움의 손길을 뻗칠 수 있습니다. 그들이 ‘어떻게how’ 그렇게 되었는지 또 ‘왜why’ 그렇게 되었는지 알 바가 아닙니다. 단지 이들은 가장 어려운 상태에 있기 때문에 무조건 특별히 사랑받고 도움받아야 합니다. 더구나 이들은 그대로 예수님의 현존입니다. 그러니 이들을 돕는 것은 그대로 예수님을 돕는 것입니다.

 

복음의 최후 심판은 우리를 두렵고 떨게 하려는 의도가 아닙니다. 분명 아닙니다. 그것은 미래에 관한 것이 아니라 오늘 우리에 대한 도전입니다. 내가 양들에 속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보장의 길은 바로 지금 이웃을 사랑하고loving, 보살피고caring, 관용하고tolerant, 받아들이는accepting 것입니다. 

 

오늘은 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 대축일입니다. 바로 오늘 지금 여기서 사랑 실천을 통해 만나는 우리의 모두가 되시는 착한 목자 예수님이십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사랑의 영적 승리의 삶을 통해 당신을 날로 닮아가게 하십니다. 방금 읽은 기도문을 나눔으로 강론을 마칩니다. 

 

“주님, 오늘 저를 도우시어, 오늘의 모든 사람안에서, 모든 체험 안에서 당신을 찾고 발견하고 당신께 응답하게 하소서. 주님, 오늘 제 모든 생각과 지향과 활동과 응답이 오로지 당신 사랑과 섬김으로 향하게 하소서“ 아멘.

 

 

 

 


Articles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