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김의 여정 -내적 깊이의 본질적 삶-2021.8.21.토요일 성 비오 10세 교황(1835-1914) 기념일

by 프란치스코 posted Aug 21,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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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8.21.토요일 성 비오 10세 교황(1835-1914) 기념일 

룻기2,1-3.8-11;4,13-17 마태23,1-12

 

 

 

섬김의 여정

-내적 깊이의 본질적 삶-

 

 

 

오늘은 성 비오 10세 교황 기념일이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1821.8.21-1846.9.16.), 탄생 200주년 기념일입니다. 두 성인의 생몰연대를 보니 거의 동시대 분들입니다. 분명한 사실은, 누구에게나 공평한 확실한 사실은 언젠가 죽는 다는 것입니다. 죽음보다 확실한 것은 없습니다. 

 

오래 많이 살아서 성인이 아니라 어떻게 참되게 살았느냐에 따라 성인입니다. 생몰연대를 확인해 보니 성 비오 10세 교황님은 79세를 사셨고, 순교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인은 25세를 사셨으니 교황님은 성 김대건 안드레아 보다 세배 이상을 사신 셈입니다. ‘어떻게 죽어야 하나?’는 물음은 저절로 ‘어떻게 살아야 하나?는 물음으로 직결됩니다.

 

내 인생 여정을 일일일생, 하루로 압축한다면 어느 시점에, 일년사계로 압축한다면 어느 계절에 위치해 있겠는지요? 참 자주 인용했던 물음입니다. 이렇게 적용해보면 삶이 참 절실하게 느껴질 것입니다. 저절로 하루하루 깨어 내적 깊이의 본질적 깊이의 삶을 추구할 것입니다. 

 

어느 분의 기발한 생각에 공감한 일이 생각납니다. 코로나 시대 마스크는 침묵의 삶을, 거리두기는 고독의 삶을, 자주 손씻는 일은 회개의 삶을 상징한다는 것입니다. 침묵과 고독, 회개의 삶을 통해 내적 깊이의 본질적 삶에 이르고 보이지 않는 내적 연대도 깊어질 것입니다.

 

가톨릭 굿뉴스를 여는 순간 책 제목이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미소는 나의 소명-아름답게 나이 들기 영성-”이란 제목에 나이 듦을 아름답게 바라볼 수 있는 방법을 대략 소개하고 있었습니다. 정말 ‘그럼에도 불구하고’ 늘 미소띤 얼굴로 노년을 살아가야 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답은 분명합니다. 자발적 기쁨으로 섬김의 여정에 항구하며 늘 깨어 내적 깊이의 본질적 삶을 추구할 때 늘 미소띤 얼굴로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기념하는 두 성인도 이런 섬김의 삶의 모범입니다. 이미 살아서 성인으로 추앙 받았던 비오 10세 교황님에 관한 감동적 삶을 소개합니다.

 

-교황은 사목 표어로 “모든 것을 그리스도 안에서”(에페1,10)로 삼았다. 가난한 출신의 교황은 항상 자신의 출신을 잊지 않으려고 “나는 가난하게 태어났고, 가난하게 살았으며, 가난하게 죽고 싶다.”라고 말할 만큼 가난을 사랑하였다. 교황은 종래의 호화스럽던 교황의 의식주의 상당부분을 생략함으로써 되도록 간단하고 검소하게 치렀다. 

 

교황의 일과는 거의 매일 일정했다. 오전 4시에 일어나서 6시에 미사를 집전하였다. 8시 정각이 되면 바티칸 궁전의 2층에서 개인적인 연구를 하느라 책상에 있었다. 여기서 사사로운 알현을 받았다. 그의 큰 책상은 보통 문서와 서류들로 쌓여 있었고, 중앙에는 성 요한 마리 비안네 신부의 성상과 성녀 잔 다르크의 성상이 놓여 있었다. 

 

정오에는 공식 회견을 했고, 1시에는 자신의 측근들과 점심 식사를 했다. 식사를 마친 후에는 잠깐 동안 막중한 의무와 책임으로 돌아오기 전의 휴식을 취했다. 저녁 식사는 9시에 이루어졌고, 그 이후에도 밤이 깊을 때까지 다시 일했다.”-

 

하루하루의 일과에 참으로 충실했던, 근면, 검소, 섬김의 삶이 몸에 뱄던 참 귀하고 아름다운 성인 교황이셨습니다. 섬김의 사랑과 겸손은 영성의 잣대입니다. 섬김의 권위, 섬김의 직무등 우리에게 영성이 있다면 파스카의 영성, 바로 섬김의 영성뿐이겠습니다. 베네딕도 성인도 당신의 수도공동체를 ‘주님을 섬기는 배움터’로 정의합니다. 그러니 수도자의 삶은 평생 섬기는 법을 배우는 여정중의 삶입니다.

 

아주 오래전 수도원 설립 초창기에 있었던 사건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늦은 전화에 퉁명스럽게 전화를 받았던 저에 대한 격렬한 항의에 즉시 사과했고 곧 이어진 깨달음이었습니다.

 

“아, 나는 서비스업에 종사하고 있구나! 섬김의 직무, 서비스업 말이다. 서비스업의 3대 요소는 1.사람이 좋고, 2.사람이 실력이 있어 유능하며, 3.환경이 좋아야 하겠구나. 서비스업인 음식점의 경우가 잘 들어 맞겠구나! 주방장의 인성이 좋아 친절히 환대를 잘하고, 음식 솜씨도 탁월하며, 식당내의 환경이 단순하고 넉넉 편안하다면 서비스업에는 최상일 것이다. 과연 주님의 서비스업에 속하는 여기 수도원은 세 조건을 갖췄는가?”

 

벼락같은 깨달음이었지만 30년이 지난 지금도 참으로 부끄럽게도 여전히 많이 부족한 섬김의 삶입니다. 그리하여 매일 강론을 써서 나누는 것 하나만이라도 섬기는 마음으로 최선을 다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내적 깊이의 본질적 삶은 섬김의 삶, 하나뿐임을 역설하십니다.

 

“너희는 스승이라고 불리지 않도록 하여라. 너희의 스승님은 한 분뿐이시고 너희는 모두 형제다. 또 이 세상 누구도 아버지라고 부르지 마라. 너희의 아버지는 오직 한 분, 하늘에 계신 그분뿐이시다. 그리고 너희는 선생이라고 불리지 않도록 하여라. 너희의 선생님은 그리스도 한 분뿐이시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참으로 우리를 부끄럽게 하는, 무지의 어둠을 밝혀주는 죽비같은 깨달음을 주는 말씀입니다. 참으로 우리를 세상 우상들로부터 자유롭게 하는, 겸손과 섬김의 참 나를 살도록 일깨우는 구원의 복음입니다. 바로 삶의 중심인 주님만을 바라보며 주님과 형제들을 겸손히 섬기는 섬김의 여정에 항구하라는 말씀입니다. 어제 금요 강론중 어느 영성대가의 인터뷰시 고백에 공감했습니다.

 

“감정에 휘둘리지 마라. 그것은 영성이 아니다. 나는 이 삶에서 비상한 어떤 것도 기대하지 않는다. 나는 결코 초자연적인 것들도 찾지 않았다. 옛 수도교부들도 똑같았다. 자기 착각. 자기 기만을 영성이라 착각하지 마라. 평범한 일상에 충실함이 제일이다. ‘우리는 무엇보다 온갖 겸손중에 섬김을 실천해야 한다(We should carry out our service in all humility)’.”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영성이 있다면 섬김의 영성이 있을 뿐이며 섬김의 사랑과 겸손이야말로 성덕의 잣대입니다. 바로 이런 섬김의 모범이 제1독서의 주인공 룻입니다. 하느님 섬김과 이웃들 섬김이 하나로 표현된 룻의 참 겸손한 삶입니다. 다음 룻과 보아즈의 아름다운 만남과 대화에서 환히 드러나는 룻의 겸손한 섬김의 영성입니다.

 

-‘룻은 얼굴을 땅에 대고 절하며 그에게 말하였다. 

“저는 이방인인데, 저에게 호의를 베풀어 주시고 생각해 주시니, 어찌 된 영문입니까?”

보아즈가 대답하였다.

“네 남편이 죽은 다음 네가 시어머니에게 한 일과 또 네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네 고향을 떠나 전에는 알지도 못하던 겨레에게 온 것을 내가 다 잘 들었다.”-

 

우연은 없습니다. 하느님 구원 섭리 안에 살아가는 우리들입니다. 하느님의 보시는 바, 종교나 국적이 아니라 섬김의 사랑과 겸손뿐임을 깨닫습니다. 이런 보아즈의 만남을 통해 룻은 오벳을 낳았고 그는 다윗의 아버지인 이사이의 아버지가 됩니다. 그러니 이방 여인 룻이 나은 오벳은 다윗의 할아버지가 되는 셈이며, 우리 구원자 예수님은 다윗의 자손이 되니 하느님 구원 섭리의 손길이 참 오묘합니다.

 

참으로 우리 주님은 겸손과 사랑의 섬김의 사람을 당신 구원 섭리의 도구로 삼으심을 깨닫습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당신을 닮아 섬김의 여정에 항구할 수 있도록 도와 주십니다.

 

“행복하여라, 주님을 경외하는 사람! 그분의 길을 걷는 모든 사람!”(시편128,1).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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