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의 사랑, 침묵의 훈련 -침묵 예찬-2021.12.18.토요일

by 프란치스코 posted Dec 18,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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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2.18.토요일                                                                                    예레23,5-8 마태1,18-24

 

 

침묵의 사랑, 침묵의 훈련

-침묵 예찬-

 

 

요셉 수도원 성탄카드의 배경 그림과 수도형제들의 얼굴 모습들의 구성이 참 깊고 신비롭고 평화롭고 아름답습니다. 깊은 사랑의 침묵중에 태어난 성가정의 예수님 아기와 더불어 동안의 미소띤 수도형제들의 모습이 참 보기 좋습니다. 무엇보다 감지되는 사랑의 침묵의 분위기입니다. 흡사 침묵의 호수위에 피어난 흰 연꽃송이같은 얼굴들이었습니다.

 

오늘 강론 제목은 “침묵의 사랑, 침묵의 훈련-침묵 예찬-”입니다. 옛 사막 수도자들은 예외없이 사막의 침묵과 고독을 사랑했습니다. 하느님을 찾는 수도승들의 생래적 특징이 침묵과 고독에 대한 사랑이요 이 또한 하느님 사랑의 표현입니다. 정말 하느님을 사랑하는 관상적 성향의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침묵과 고독을 사랑합니다. 오늘(11.15) 보름날 달밝은 밤에 아주 예전 써놨던 '둥근 달'이란 시도 생각납니다.

 

“푸르른 밤 하늘

휘영청 밝은 달 하나

온누리 

환히 밝힌다

푸르른 깊은 침묵이

휘영청 환한 사랑 

둥근 달 하나

낳았구나!

푸르른 깊은 침묵의 하늘이!-2001.2.11

 

얼마전 수확이 끝난 텅 빈 충만의 배밭, 광야의 수도승들같은 겨울 동안거에 들어간 배나무들을 보며 쓴 글입니다.

 

“일체의 

부수적인 것들은

미련없이 

다 떠나 보내고

본질로 남아

동안거

깊은 침묵중에

봄꿈을 꾸는

겨울나무들

겨울은 이렇게 지내는 거다.”-2021.12.12

 

대림2부 강론은 저녁성무일도 마리의 노래중 “오” 후렴을 나누고자 합니다. 흡사 깊고 아름답기가 하느님의 깊은 침묵중에 태어난 “오” 후렴처럼 생각됩니다. 

 

“오, 하느님이여, 이스라엘 집안을 다스리시는 분이여, 불타는 가시덤불속에서 모세에게 나타나시고 산에서 그에게 당신 법을 주셨으니, 오소서, 팔을 펴시어 우리를 구원하소서.”

 

20세기의 가톨릭 교회의 대표적 영성가를 꼽으라면 저는 주저없이 토마스 머튼을 꼽고 싶습니다. 참으로 침묵과 고독을 사랑했던 트라피스트 수도승이요 그의 주옥같은 무수한 글들은 이런 깊은 침묵중에 태어난 것임을 깨닫습니다. 토마스 머튼의 침묵예찬과도 같은 침묵의 소중함이란 시도 나눕니다.

 

“침묵은 양선함입니다

마음이 상했지만 답변하지 않을 때

내 명예에 대한 방어를 온전히 하느님께 맡길 때

바로 침묵은 양선함입니다

 

침묵은 자비입니다

형제들의 탓을 드러내지 않을 때

지난 과거를 들추지 않고 용서할 때

판단치 않고 마음속 깊이 변호해줄 때

바로 침묵은 자비입니다

 

침묵은 인내입니다

불평없이 고통을 당할 때

인간의 위로를 찾지 않을 때

서두르지 않고 씨가 천천히 싹트는 것을 기다릴 때

침묵은 인내입니다

 

침묵은 겸손입니다

형제들이 유명해지도록 입을 다물 때

하느님의 능력의 선물이 감춰졌을 때도

내 행동이 나쁘게 평가되든 어떻든 내버려둘 때

바로 침묵은 겸손입니다

 

침묵은 믿음입니다

그분이 행하도록 침묵할 때

주님의 현존안에 있기 위해 세상 소리와 소음을 피할 때

그분이 아는 것만으로 충분하기에 인간의 이해를 찾지 않을 때

바로 침묵은 믿음입니다

 

침묵은 흠숭입니다

“왜”하고 묻지 않고

십자가를 포옹할 때

바로 침묵은 흠숭입니다.”

 

이런 침묵이 우리를 치유하고 위로하며 구원합니다. 침묵 안에 현존하시는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토마스 머튼은 관상가이자 침묵의 사람입니다. 침묵의 관상과 사랑의 활동은 분리된 것이 아니라 하나입니다. 침묵의 관상에서 샘솟는 사랑의 활동입니다. 그러니 침묵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랑할 때 저절로 훈련이 뒤따릅니다. 기쁨도, 희망도, 사랑도, 기도도 훈련이고 침묵도 바로 훈련임을 깨닫습니다. 깨어 침묵의 훈련에 전념하는 대림시기입니다.

 

저는 21세기를 대표하는 가톨릭 교회의 살아 있는 성인이자 영성가를 꼽으라면 주저없이 현재의 프란치스코 교황님을 꼽겠습니다. 어제는 마침 교황님의 85세 생신날이었습니다. 전 전주 수요일 일반 알현시 교황님 강론도 참 깊고 아름다웠습니다. 침묵의 사람, 성 요셉에 대한 내용으로 성 요셉뿐 아니라 프란치스코 교황님 역시 침묵의 사람임을 깨달았습니다. 통째로 번역하여 나누고 싶은 강론이 한둘이 아니지만 이번 침묵에 대한 강론은 그러했습니다. 침묵의 여정중의 성 요셉으로 묘사했습니다. 특히 공감하는 감동적인 부분을 나눕니다.

 

“침묵, 얼마나 자주 우리는 침묵을 필요로 하는지! 침묵은 중요하다. 나는 다음 지혜서 말씀에 충격을 받았다. ‘온유한 침묵이 만물을 감쌌을 때, 당신의 전능의 말씀이 하늘로부터 뛰쳐나왔다.’ 바로 침묵의 그 순간에 하느님은 자신을 계시하신다. 

 

복음은 나자렛의 요셉이 발설한 말은 단 하나도 언급하지 않는다. nothing! 무無다! 그는 결코 말하지 않는다. 이것은 그가 ‘말없음tacitum’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아니다. 왜 복음이 한마디도 말하지 않는지 거기에는 깊은 사유가 있다. 자신의 침묵으로 성 요셉은 성 아우구스티누스가 쓴 것을 확신했기 때문이다. 말씀이 사람이 되신 ‘그 말씀the Word’이 우리 안에 자라나면서 ‘말들words’은 저절로 사라지기 때문이다. 

 

영성생활은 말씀자체이신 예수님이 우리 안에서 자라나는 정도에 따라 말들도 사라지는 것이다. 세례자 요한은 말했다. ‘그분은 커져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요한3,30). 바로 이것은 그분은 말씀하셔야 하고 자신은 침묵해야 함을 뜻한다. 요한은 자신의 침묵을 통해 말씀이 살이 되신 분의 현존을 위한 공간을 마련해드리도록 우리를 초대한다.

 

성 요셉의 침묵은 결코 말없음의 침묵이 아니라 경청으로 가득한 침묵, 근면한 침묵, 그의 위대한 내면을 보여주는 침묵이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 말한다. ‘아버지는 한 말씀을 하셨고 그 말씀은 바로 그의 아드님이다.’

 

삶의 관상적 차원을 회복해야 한다. 그러나 많은 이들이 침묵을 두려워한다. 그리하여 계속 말을 쏟아내며 라디오를 텔레비전을 찾는다. 그들은 두렵기에 침묵을 받아들일 수 없다. 철학자 파스칼은 말한다. ‘사람들의 모든 불행은 단 하나의 사실에 기인한다. 그들은 자기의 방안에 고요히 머물수가 없는 것이다.’ 침묵의 훈련없이, 침묵의 수행없이 우리의 혀는 우리를 괴롭힌다. 진리가 빛나게 하는 대신 우리의 혀는 위험한 무기가 된다. 실로 우리의 말은 아첨, 허풍, 거짓말, 험담, 모함의 말들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대선을 앞둔 오늘의 현실에서 수없이 목도하는 이런 공해와 같은 쓰레기 같은 말들이요 가짜 뉴스들입니다. 오죽하면 기자들을 기레기라 하겠는지요! 내면을 그대로 반영하는 혀의 말들이요 그만큼 내면의 침묵이 고갈되어 있다는 반증입니다.

 

정말 영성가들은, 성인들은 침묵의 사람들입니다. 성 요셉, 세례자 요한, 십자가의 요한, 오늘 복음의 의로운 성 요셉, 프란치스코 교황, 또 제1독서의 예언자 예레미야 예외없이 모두가 침묵의 사람들입니다. 오늘 복음은 요셉의 태몽입니다. 하느님께서 얼마나 요셉을 신뢰했는지 감지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얼마나 성 요셉을 흠모하는지 요즘 배웁니다. 예전 마음 순수했을 때는 태몽도 많았는데 오늘날 태몽을 꾸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모두가 침묵중에 일어납니다. 주님 천사를 통해 밤의 침묵의 꿈중에 나타나 마리아에 관한 비밀을 소상히 밝히는 하느님입니다. 성 요셉의 침묵과 환대, 겸손과 경청, 그리고 마지막 섬김과 순종의 모습이 참 아름답고 거룩합니다. 

 

‘잠에서 깨어난 요셉은 주님의 천사가 명령한 대로 아내를 맞아들였다.’

 

하느님은 얼마나 성 요셉이 고맙고 사랑스러웠겠는지요! 정말 하느님과 요셉의 신뢰와 사랑의 관계는 한없이 깊어졌을 것이며 성 요셉의 무궁한 내적 힘의 원천이 되었을 것입니다. 성 요셉 역시 예수님을 키우면서 이 태몽의 꿈을 결코 잊지 못했을 것이며, 하루하루 날마다 침묵과 경청의 하느님 환대를 통해  하느님과의 관계를 깊이했을 것입니다.

 

제가 볼 때 예레미야 예언자, 역시 깊은 침묵의 영성가입니다. 깊은 침묵중에 하느님의 말씀을 들었음이 분명합니다. 예레미야서 서두 말씀은 얼마나 고무적이고 은혜로운지요! 언젠가의 그날은 바로 대림시기 오늘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실현됩니다. 매일매일의 오늘이 바로 그날입니다.

 

“보라, 그날이 온다! 주님의 말씀이다. 내가 다윗을 위하여 의로운 싹을 돋아나게 하리라. 그 싹은 임금이 되어 다스리고 슬기롭게 일을 처리하며, 세상에 공정과 정의를 이루리라. 그의 시대에 사람들이 구원을 받고 안전하게 살리라. 사람들이 그의 이름을, ‘주님은 우리의 정의’라고 부르리라.”

 

바로 이 거룩한 미사시간, ‘주님은 우리의 정의’라 부르시는 주님을 모심으로 우리 모두 정의와 평화의 삶을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 모두 사랑과 침묵의 결정체인 주님의 성체를 모심으로, 침묵의 사람, 정의와 평화의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주님, 이 시대에, 우리 나라에, 우리 공동체에, 우리 하나하나에 정의와 평화가 꽃피게 하소서.”(시편72,7).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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