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6.27.연중 제13주간 월요일 아모2,6-10.13-16 마태8,18-22
영원한 안식처安息處인 주님
-희망의 순례자-
“주님, 당신께서는 대대로
저희에게 안식처가 되셨습니다.”(시편90,1)
오늘 말씀 묵상중 문득 떠오른 구절입니다. 우리의 영원한 안식처이자 정주처는 바로 주님이심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고향에서 고향을 그리워하는(homesick at home)" 역설적 향수의 인간입니다. 바로 몸담아 살고 있는 오늘 지금 여기가 고향이면서도 고향이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이래서 순례여정의 도상에 있는 우리들입니다. 더불어 떠오르는 말씀입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마태11,28)
바로 주님이 우리의 영원한 안식처安息處이자 정주처定住處처임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니 어느 곳이든 주님과 함께 할 때 안식처의 고향임을 깨닫게 되고 저절로 장소에 초연하게 됩니다. 이것은 제가 산티아고 순례여정중 체험했던 진리이기도 합니다. 배낭에 미사도구를 준비하여 순례 여정 곳곳에서 날마다 미사를 봉헌하니 바로 어디나 주님 계신 안식처이자 고향이었습니다.
산티아고 순례 여정중 날마다 목적지에 도착하면 우선 미사드릴 제대를 눈여겨 보았다가 다음날 일어나 아침미사를 봉헌한후 하루의 순례여정에 올랐습니다. 지금도 생생했던 체험은 날마다의 떠날 때의 기쁨입니다. 주님의 집을 향한 ‘떠남의 기쁨’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하루만 지체해도 답답한 심정이었습니다. 2014년 순례후 8년이 지났지만 지금도 흡사 하루하루 계속되는 순례여정중의 삶처럼 느껴집니다.
“주님의 집에 가자할 제,
나는 몹시 기뻤노라.”(시편122,1)
정말 800km 2000리, 산티아고 순례여정중 걸으며 가장 많이 바쳤던 화살기도였습니다. 그러니 순례여정중의 삶중에 영원한 안식처인 주님과의 날로 깊어지는 우정이 얼마나 결정적으로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고향에서 고향을 그리워하는’ 근원적 향수homesick를 많이 해소해 줄 수 있는 유일한 처방이 주님과 우정의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역시 주님과의 날로 깊어져 가는 우정의 사랑을 희구希求하며 쓴 자작시가 생각납니다.
“당신
언제나 거기 있음에서 오는
행복, 평화
세월 지나면서 색깔은 바랜다지만
당신 향한 내 사랑
더 짙어만 갑니다.
안으로, 안으로 끊임없이 타오르는 사랑입니다.
세월 지나면서
계속 날로
새로워지고, 좋아지고, 깊어지는
당신이면 좋겠습니다.”-1997.3.
무려 25년전 ‘오늘 지금 여기 이 자리’에서의 고백이었지만 여전히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은 소망所望의 고백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오늘 복음의 이해가 확연해 집니다. 오늘 복음은 어제와 흡사합니다. 어제는 루가복음이었지만 오늘은 마태복음으로 주님의 제자가 되기 위한 추종의 자세에 대한 가르침으로 어제의 셋째 예화는 생략되어 있습니다.
율사와 주님과의 대화입니다. 예수님의 기적들을 목격하면서 율사는 흥분했음이 분명합니다. 풋열심이 아닐까 하는 의심도 듭니다.
“스승님,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스승님을 따르겠습니다.”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
정처없는 예수님을 따를 준비가 되어있는가 묻습니다. 새삼 예수님의 안식처이자 정주처는 세상의 가시적可視的 일정한 장소가 아닌 주님이신 하느님임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니 예수님께는 역설적으로 머무는 어디나 하느님과 함께 하는 안식처이자 정주처였음을 깨닫습니다. 참으로 영원한 안식처인 주님과 우정의 사랑만이 장소로 부터의 이탈을 가능하게 함을 봅니다. 앞서 장소부터의 이탈을 말했다면 두 번째 제자와의 문답은 인간관계에서 이탈을 말합니다.
“주님, 먼저 집에 가서 아버지의 장사를 지내게 허락해 주십시오.”
“너는 나를 따라라. 죽은 자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어라.”
주님을 따르는 제자직이 얼마나 엄중한 일인지 각성케 하는 충격요법의 과장된 표현입니다. 죽은 자들의 장사는 하느님 나라의 도래와 요구를 모르는 죽은 이들에게 맡기라는 것입니다. 사실 이런 주님의 절박한 요구를 절절히 깨달은 제자라면 주님은 아버지의 장사를 지내도록 묵인默認할 것입니다.
참으로 세상에서 모든 인간관계들의 집착에서 초연하라는 것입니다. 인정머리 없는 무정한 사람이 되라는 게 아니라 항상 제자직의 사명의 엄중함을 깊이 자각하라는 말씀입니다. 영원한 안식처인 주님과의 우정이 날로 깊어지면서 이런 장소로부터, 사람들로부터의 이탈이 가능하겠습니다. 이런 이들은 사람들을 지극히 사랑하면서도 마음 깊이에서는 이들을 영원한 안식처인 주님께로 안내할 것입니다.
“하느님을 잊은 자들아, 깨달아라.”
하느님을 잊은 자들을 회개로 이끄는 천둥같은 화답송 시편 주님 말씀입니다.
“올바른 길을 걷는 이는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
영원한 안식처인 주님과 깊은 우정관계중 올바른 길을 걷는 이는 하느님의 구원을 체험하리라는 말씀입니다.
인간의 모든 비극과 불행의 근본 원인은 하느님을 잊음에서 기인합니다. 주님과의 날로 깊어가는 우정이 참나의 참사람으로 만들어 줍니다. 거칠고 삭막한 광야여정중 주님이신 하느님을, 영원한 안식처인 주님을 잊을 때, 이런 주님과 무관無關한 삶일 때의 인간은 참으로 위험하기 짝이 없습니다.
무섭고 두렵기로하면 사람보다 더한 동물도 없을 것입니다. 하느님을 잊고 무지에 눈멀어 본능의 욕망대로 살 때, 사람은 괴물도, 악마도 될 수 있고, 급기야는 세상맛에 중독되어 폐인도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오늘 제1독서 아모스서는 하느님을 떠난 인간이 얼마나 망가져 악하게 될 수 있는지 정말 실감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정말 참사람은 예언자 아모스 하나처럼 생각됩니다. 참으로 영원한 안식처인 주님안에 정주하기에 이런 분별력의 지혜와 용기일 것입니다. 새삼 정의의 예언자 아모스의 고독이 얼마나 컸을지 상상을 초월합니다.
“이스라엘의 세 가지 죄 때문에, 네 가지 죄 때문에 나는 철회하지 않으리라.”에 이어지는 참으로 거론하기 부끄러울 정도로 상식과 상상을 초월하는 천인공노天人共怒할 악행을 공공연히 자행恣行하는 악마같은 사람들입니다. 하느님을 완전히 망각했을 때의 인간 모두의 가능성입니다. 여전히 반복되는 악순환의 역사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때로는 정말 인간에게 희망이 있는지 회의가 들기도 합니다.
“나는 너희를 이집트 땅에서 데리고 올라와, 사십 년 동안 광야에서 이끈 다음, 아모리인들의 땅을 차지하게 하였다.”(아모2.10)
영원한 인도자이자 영원한 안식처인 주님을 상기해야, 끊임없이 베풀어 주시는 하느님의 은혜를 체험해야 이런 악순환의 질곡桎梏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새삼 ‘기억의 훈련’이 얼마나 절실한 수행인지 깨닫습니다. 이래서 평생 매일 끊임없이 분투의 노력을 다해 바치는 우리 수도자의 하느님 찬미와 감사의 공동전례기도인 시편성무일도와 미사입니다.
좌우간 오늘 제1독서 아모스 예언자는 우리의 무지를 일깨우며 회개를 촉구합니다. 끊임없는 회개와 더불어, 영원한 인도자이자 안식처이자 정주처인 주님과 우정의 관계를 깊이함이 무지無知의 악惡에 대한 근본적 처방임을 깨닫습니다.
주님과 날로 깊어가는 우정의 사랑과 더불어 이탈의 사랑, 이탈의 순수, 이탈의 지혜, 이탈의 자유요, 세상 사람들과 피조물에 대한 한없이 깊은 연민의 사랑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순례여정중의 우리와 우정의 사랑을 날로 깊이해 주십니다. 다음 오늘 미사중 본기도, 마음 깊이 새기고 사시기 바랍니다.
“주님, 천상은총으로 저희를 빛의 자녀가 되게 하셨으니, 저희가 다시는 오류의 어둠 속을 걷지 않고, 언제나 진리의 빛속에 살게 하소서.” 아멘.